'귀염둥이'를 기억하시는지

in #kr5 years ago

2007년 1월 10일 귀염둥이 김형은 사망

매우 뜽금없고, 지나치게 어처구니없기는 하지만 가끔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가졌으면 어떨까 망상에 가까운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대통령부터 노숙자까지, 귀공자에서 양아치까지 온갖 인생을 대신 살아볼 수도 있고, 등장만으로도 사람들의 환호성과 비명과 웃음을 자아낼 수 있게 될 정도의 레벨만 갖춘다면, 연예인이란 정말 해 볼만한 직업 아니겠습니까. 그 경지에 오르는 과정이 하늘에 별 달고 마감공사하는 정도로 어려워서 그렇죠.

그러나 연예인들을 가까이서 보면 볼수록 연예인이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직업이 아니며 상상을 초월하는 불편함과 인내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남을 웃기려면 스스로 울어야 하고 남을 울리려면 자기 머리와 가슴은 부서져야 한다는 것, 그것은 수사만이 아닙니다.

자신을 더욱 많은 이들이 알아보아야 줏가가 올라가는 한편으로 맘 놓고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 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개나 소나 아무개다 소리지르는가 하면 술 한 잔 받으라고, 또는 따라 달라고 찐따붙는 이들에게 노출되기도 하지요. 그러다 싸움이라도 나면 주먹 한 번 내지르지 않고도 "아무개 포장마차에서 폭력 휘둘러....."의 기사 주인공이 되기 십상입니다.

연예 프로그램에는 한 번도 발담그지 않았고, 연예인들과 함께 일한다기보다는 항상 그들을 섭외하고 뭔가 요청하는 입장이었던 제게 연예인들과 싶은 사귐의 기회는 아쉽게도 없었습니다. 스쳐 지나가듯이, 바쁜 스케쥴의 틈새를 노리는 스토커처럼 그들 주위를 맴돌거나 함께 일하면서도 사무적인 농담 주고 받으면서 소주 한 잔 하자는 말조차 제대로 못한채 어영부영 프로그램 마무리할 때도 많았구요. 그건 제 주변머리의 문제입니다만.......

'특명 아빠의 도전'을 연출할 때, 저는 크리스마스나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을 극도로 두려워했습니다. 주부들의 명절 증후군 같은 것은 아니고, 그런 특별한 때에는 언제나 연예인을 섭외해서 그들을 불우이웃들의 1일 아빠로 설정, 과제를 주고 성공을 '시키고' 선물을 전달하는 이벤트를 치루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몇년 전의 크리스마스 어간에 제게 떨어진 임무는 1일 아빠로 웃찾사 멤버들 6명을 단체 도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스타들보다 스타의식이 강한 매니저"의 무례함에 치를 떨면서, 당시 전국 순회 공연을 하고 있던 웃찾사 멤버들의 꼬리를 따라다니면서 '연습 조금만 하시죠.' 라고 엎드려 빌다시피 하고 있었지요. 매니저만 제외하면 다른 웃찾사 멤버들은 어디서 굴러먹다 온 줄 모르겠지만 줄넘기 하나 들고 와서 곡예에 가까운 묘기를 해 달라고 강요하는 PD의 부탁을 성실히 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각각의 코너가 다른 그들은 한데 모으기조차 쉽지 않았고, 단체 도전의 성격상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이지 않고는 진전이 불가능했기에 저는 애가 타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한쪽에서 벼락같은 호통 소리가 들리기에 고개를 돌려 봤을 때 '귀염둥이' 코너의 김형은씨가 누구에겐가 쌍시옷 들어가는 야단을 맞고 있었습니다. 개그맨 선배인지 기획사 사장인지 과문한 저로서는 알길이 없었지만 저는 함께 야단을 맞는 듯 가슴이 철렁거렸습니다. 도전팀 6인 가운데 유일한 여자로서 5분뒤 가까스로 모일 도전팀에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해 줘야 할 처지였던 겁니다. 김형은씨의 얼굴은 이미 굳을 대로 굳어 있었고 살짝 눈물이 비치는 것까지 보이더군요.

호통을 치던 누군가가 휙 제 갈길로 가 버리고 김형은씨가 얼굴을 감싸고 소파에 앉아 버렸을 때 저는 잠시 망설였습니다. 동작 하나 상황 하나 부탁 부탁하면서 일을 이어오던 처지에 김형은씨가 이거 나중에 하면 안돼요? 해 버리면 꼼짝없이 하루를 더 들여 그들을 따라가야 하고 그 뒤 일정들이 사정없이 꼬여 버리게 되어 있었죠. 그냥 피곤한 정도면 어떻게든 아양을 떨고 이왕 하는 거 빨리 끝냅시다 하면서 설득해 보겠는데, 제가 보기에도 찌그러지도록 혼이 나서 굳어버린 그녀의 얼굴에 대고 어떻게 해 봅시다는 말이 나오지를 않더군요.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 후 저기요....... 하면서 건네는 제 말조차 이미 기가 죽다 못해 중천에 이른 뒤였습니다. 저를 쳐다보는 그녀의 얼굴 분장은 많이 지워져 있었습니다. 땀일 수도 있고 눈물일 수도 있지만 그때 생각엔 아차 엄청 울었구나 싶었지요. "연습 좀 해야죠?"라는 말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괜찮으세요?"라고 말을 건넨 순간 저는 한 사람의 얼굴이 그토록 빨리 바뀌는 모습은 처음 봤습니다.

눈물 범벅에 얼음장같이 굳었던 얼굴이 봄햇살처럼 펴지면서 이종규씨와 함께 '귀염둥이' 코너를 열연하던 그 얼굴...... 아래 위보다는 왼쪽 오른쪽으로 발달한 눈매가 초승달처럼 구부러지며 웃는 그 얼굴로 변했던 겁니다. 그리고는 발딱 일어나서는 역시 '귀염둥이'의 어투로 채따라 일어서지 못했던 제 어깨 위로 발랄한 멘트를 날렸습니다. "그러엄요. 괜찮고 말구요. 연습해요 이제?"

30초 전에는 미이라같던 그녀가 어떻게 장난기 넘치는 미소와 발그레한 홍조까지 되살아난 귀염둥이로 둔갑할 수 있는가, 그녀가 김형인씨며 윤택씨며 이종규씨며 기타 우리 도전 팀들을 찾아다니며 잠을 깨우고 등을 두드리고 팔을 잡아끌며 "빨리 연습하자"고 재우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저는 아주 잠시지만 넋을 잃고 있었습니다. 김형은씨 표정의 극적인 전환을 계속 리플레이시키면서 말입니다.

그녀는 그 직후의 연습에서 평소보다 더 즐거워하면서 오버하면서 넘어지고 깔깔거리면서 악착같이 연습에 임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제 눈에는 반 넘어 지워져 버린 채 수습할 새 없었던 그녀의 얼굴 분장이 선연히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고마왔고, 그래서 연예인 되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로구나, 자신의 감정과 상황 모두를 자신의 웃음 뒤로 가둬 버릴 수 있는 능력은 정말 나로선 흉내조차 못낼 일이겠구나 고개를 가로저었었지요.

김형은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저는 눈물로 얼굴 분장을 지우다가 제 앞에서는 땀으로 분장을 마저 깎아내리던 그녀의 줄넘기를 생각했었습니다. 제게 연예인이란 아무나 하는 게 아냐~~를 몸으로 가르쳐 주었던 그녀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그날 미처 전하지 못했던 인사를 뒤늦게나마 전합니다. "고마왔습니다 김형은씨......... 이제는 천국에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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