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표 그 서글픔에 대하여

in #kr6 years ago

장기표 그 서글픔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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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 우수한 사람이 나이 들어서도 빛을 발한다면 참 좋은 팔자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젊어서 각광받고 촉망받던 사람이 늙어가면서 망가져 간다면 그에게나 보는 사람에게나 안타까운 일이겠다. 정작 망가져 가는 본인은 자신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걸 전혀 모르는 양을 지켜보노라면 얼마나 서글픈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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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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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장기표는 이부영, 김근태와 함께 재야의 트로이카로 불리며 그 엄혹한 전두환 시기에도 '세상 좋아지면 미래의 대통령감'이라고 운위되던 사람 중 하나다. 나는 그를 <우리 사랑이란 이름으로 만날 때>라는 책으로 기억한다. 장기표가 5.17 이후 수배를 받고 은신하던 집의 딸이 결혼하게 되자 그녀에게 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쓴 책이었다. 남녀의 사랑을 바탕으로 하여 사회와 역사, 민주화운동의 논리까지 부드럽고도 설득력있는 문체로 써냈으며, 생일 축하 선물로 즐겨 선정되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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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책.jpg

그는 노동자 전태일이 분신했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갔던 사람 중의 하나다. 전태일이 생전에 그리도 갖고 싶어했던 '대학생 친구'를 죽은 후로나마 처음으로 자처했던 사람이다. 그 어머니 이소선 여사로부터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진실하고 바르게 살려는 첫 사람이자 나에게는 영원한 스승이었다”는 평을 들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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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가까운 감옥살이를 했고 민중당 등 진보정당의 정치세력화에 진력했고 '마지막 재야'로서 이리저리 뛰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안스럽기 그지없었으나 언젠가부터는그 안스러움이 헛웃음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홍사덕하고 무슨 무지개연합인지 뭔지를 할 때는 무지하게 웃겼고 이기택 이수성 등과 함께 민주국민당을 만들 때에는 뭘 하자는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정연하던 그의 논리는 뭔가 나사가 풀려가고 있었고, 날카로웠던 그의 식견은 무도 못 썰 무딘 칼이 돼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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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2월 "문재인이 정계에서 퇴출돼야 마땅한 이유"를 읊으며 카랑카랑한 헛소리를 하는 걸 보면서는 마지막 동정심마저 잃었고 그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접었는데 오늘 그를 희한한 자리에서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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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웅국새봉헌.jpg

포천 어딘가에 있다는 "환웅 역사 박물관"에서 기묘한 행사가 열렸다. '환웅국새봉헌기념식'이다.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천부인인 환웅국새가 발견됐다고 주장하며 그를 축하하는 행사였다. 국새의 모양은 대단히 재미있다. 짐승 모양이 조각돼 있는데 이게 개같기도 하고 돼지 같기도 하다. 이게 환웅의 국새라면 마늘과 쑥 먹고 인간되기를 꿈꾼 건 호랑이와 곰이 아니라 개와 돼지일 것 같다. 고고학적 증거 ? 그런 건 물으면 실례다 저 동네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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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자리에 장기표가 등장한다. "장기표 (새문명정치아카데미) 회장은 고조선의 상징인 환웅국새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에 대해 소감을 피력하고 임성묵 총재의 조선세법과 본국검을 통독한 결과 고조선의 무예가 전승된 무경이라 극찬하고 본국무예가 환웅국새가 함께 결합된 역사적인 날이라 축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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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기표는 갔다. 간 건 이미 알았지만 이렇게 멀리 간 줄은 몰랐다. 고은은 그의 만인보에서 장기표를 이렇게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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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하얀 낯
머루눈
나막신소리 같은 목소리
정치와
인간을 혼동하는 정신
그대는 그렇게
시집가는 신부의 다홍치마였지 고뇌의 소프라노였지 "

아쉽지만 이 내용은 바뀌어야겠다.

두꺼운 낯
뱁새 눈
슬리퍼 땅에 끄는 목소리
환상과 현실을 혼동하는 정신
그대는 그렇게
폐차되는 차의 스페어 타이어였지. 버림받은 소프라노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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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가 찬양한 '환웅 국새'의 사진이다.... 뭐 이런 개돼지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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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웅국새.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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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어쩌다가...

허어 참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곱게 늙어야하는데 어찌 저렇게 됐는지!

곱게 늙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몸소 체현해 주신다고나 할까요

아...제목을 읽으며 서글프고
내용을 읽으면서는 참담하네요..

저도 저 사진과 내용 앞에서 얼마나 참담해졌는지 모릅니다. 80년대의 빛이 다양한 방식으로들 스러진다고나 할까요

늙었으되 어른이 되지 못한 ...

똑똑한 사람들은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야 한다던가요.... 아무도 그러지 않으니 혼자 돌 밖에요

제대로 나이 들어가는 사람이 상당히 드문 것 같습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후우........ 저렇게 안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수도쿠 같은 거도 열심히 풀어야하는 이유 중 하나 인지도 모릅니다. 노년에 망가지면서, 쌓아온 거 털어먹는 군상들을 보면, 분노하기 보다는 안타깝습니다. 너무 치열하게 살아 그럴까...

사람의 지혜나 역량도 총량이 있는 걸까요.... '지랄 총량의 법칙'이 있는 것처럼. 그래서 젊어서 쏟아부으면 늙어서 저렇게 되는 건지... 참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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