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머쓱한 과거

in #kr5 years ago

1969년 3월 5일, 1973년 3월 5일 우리들의 머쓱한 과거

20년 전에 합법적으로 출판되고 수만 독자가 읽은 역사책을 읽었다고 해군 장교가 징역형을 선고받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져 얼척없이 암담해지긴 해도, 그나마 공화국으로서 대한민국은 많은 변화와 발전을 거쳤다고 여긴다. 얼마 전 후배들에게 “옛날에는 애국가가 들리면 길 가다가도 부동자세로 서서 애국가를 들어야 했단다.”라고 했다가 거짓말쟁이 취...급을 받았을 때, 극장에서 영화 시작하기 전에 짧으면 5분 길게는 10분 동안 강제로 ‘문화영화’를 봐야 했다는 얘길 하니 무슨 탈북자 보듯 나를 바라봤을 때, 나의 나이 들었음과 대한민국의 변화를 동시에 실감해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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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질문을 던져 보자. 장례식에 가면 으레 만나는 상주들의 옷은 대개 검은 양복과 흰 한복이다. 상주는 검은 양복에 상장을 팔에 차고, 그 부인들은 흰 한복을 입고 분주히 움직인다. 굴건 제복을 입는 경우는 눈을 씻고 봐도 없고 좀 격식을 차리는 경우도 검은 양복에 굴건을 써서 기묘한 장례식 패션을 연출하기도 한다. 그럼 이 검은 양복, 흰 소복의 풍경은 어떻게 정착된 것일까?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1969년 3월 5일 정부는 그 이틀 전 3월 3일 박정희 대통령 각하가 서명한 ‘가정의례준칙’을 공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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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례에 있어서 허례허식을 일소하고 그 의식절차를 합리화함으로써 낭비를 억제하고 건전한 사회기풍을 진작'함을 취지로 한 이 ‘가정의례준칙’은 관혼상제 전반에 걸친 ‘권장사항’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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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운데 상례(喪禮)에 해당하는 대목을 읽어 보자. “호곡은 삼가하게 하며, 상제가 머리를 풀거나 맨발이 되는 일이 없게 하며..... 상제의 복장은 따로 마련하지 않고 남·녀의 양복·한복을 구분하여 한복은 흰 색, 양복은 검은 색의 평상복으로 하되 굴건과 머리테 등은 간단한 상장으로 대체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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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보니 많은 풍경이 떠오른다. 어렸을 때만 해도 상갓집은 아이고 데이고 곡소리가 진동을 했다. 수십 명이 몰려들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면서 아이고 아이고 무슨 주문 외는 것 같이 부르짖던 풍경, 상주는 굴건 제복에 죽장을 짚고 문상객들을 맞았고 골목에선 천막이 쳐지고 고스톱 소리 드높은데 밤샘 술잔 소리가 드높던 모습들..... 그에 비하면 오늘날의 영안실은 무척이나 간소하고 조용하다. “한복은 흰 색, 양복은 검은 색”의 상주들은 더 이상 곡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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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례준칙의 취지는 충분히 긍정적인 것이었다고 본다. 얼마나 많은 허례와 허식이 있었으며 예를 차리다가 낭비되는 돈과 에너지는 얼마였던가. 그럴 때 가정의례준칙을 제정하고 그를 따르라고 권유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사람들의 별로 좋지 않은 습관의 하나. “좋은 말로 해서는 좀체 먹히지 않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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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불위의 대통령 시대였다. 가정의례 준칙이 ‘권장사항’에 그쳐 무기력해지자 정부는 칼을 빼든다. 1973년 6월 1일 정부가 여섯 가지 금지 사항을 명시하고 그를 어길시 처벌할 것을 선언하고 나온 것이다. “ 청첩장이나 부고장을 돌리면 안 된다. 화환을 진열하면 안 된다. 답례품을 주면 안 된다. 굴건제복(屈巾祭服)을 입으면 안 된다. 만장(輓章)과 상여를 사용하면 안 된다. 술이나 음식물을 대접하면 안 된다. 상제의 종류는 발인제와 위령제로 제한하고, 전통적으로 행하여왔던 노제·우제,삼우제는 금지한다. 상복은 평상시에 입던 복장에다가 규격화된 상장을 사용하도록 한다. 제사는 부모 조부모까지만 지낸다. 상주·제주 등 당사자, 위반자가 14세 미만인 경우에는 그 친권자나 후견인 등을 2백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즉결재판에 회부돼 5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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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결혼식들이 줄줄이 취소됐다. 매주 문전성시를 이루던 예식장은 갑자기 시베리아로 변해 버렸고, 하객들은 축의금이 금지된 줄 알고 축의금을 가져오지 않았다가 낭패를 보기도 했다. 예물 교환은 금지가 아니라 가급적 하지 말라는 권장사항이었지만 혼주들은 눈치를 보면서 갑자기 무 베는 칼에서 청룡언월도가 되어 버린 ‘가정의례준칙’을 주시했다. 굴건 제복을 입어도 벌금이었고, 청첩장을 돌리고 좀 호화로운 예식을 치를라치면 국세청의 눈초리가 번득였다. 허례허식 추방 궐기대회가 곳곳에서 뻔질나게 열려 애꿎은 목청들을 상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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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의 일상을 법과 처벌로서 바꾸어 보겠다는 시도는 결국은 실패로 돌아갔다. 허례허식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오늘날 결혼식과 장례식장에는 한 번 쓰고 버려 버리는 화환으로 가득하고 부조금에 허리가 휜다고 아우성을 치면서도 부조금 인플레이션은 끝을 모른다. ‘흰 한복과 검은 양복’ 이외에 가정의례준칙이 승리를 거둔 대목은 많지 않아 보이는 요즘, 그래서 오히려 가정의례준칙이 그리워지기도 하지만, 그 연후에 머쓱해지는 이유는 정부가 국민의 청첩장을 단속하고, 상복에 시비를 걸고, 손님들에게 음식을 내면 호된 벌금을 두드려맞는 것이 당연했던 시기, 정부가 힘으로 국민의 일상을 바꿔 보려는 어이없는 시도를 하던 시기가 지금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요즘 정부가 이런 행동을 한다면 ‘미쳤다’는 소리를 못 면할 일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행해졌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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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절정 중의 하나가 1973년 3월 5일 벌어진다. 전국의 중국집에 ‘쌀밥 사용 금지령’을 내린 것이다. 한창 쌀 부족 말이 나오고 혼분식이 장려되던 때여서 그랬는지, 박정희 대통령이 유난히 싫어했던 화교에 대한 견제책이었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정부의 한 마디에 전국의 중국집에서 볶음밥과 잡채밥이 사라져야 했고 중국집 주인들은 물정 모르고 볶음밥을 주문하는 손님들에게 해명 아닌 해명을 하느라 천불이 나야 했다. 만약 이런 일이 오늘날 벌어진다면 헌법재판소부터 각 지방법원까지 위헌 소송부터 행정소송까지 봇물에 홍수가 날 것이 뻔하고, 역시 ‘미쳤다’는 소리에 걸맞은 행각이었건만 1973년 3월 5일 중국집 쌀밥금지령은 천연덕스럽게 발해졌고 성실하게 지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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