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비의 개천절

in #kr6 years ago

1924년 10월 3일 진로의 탄생

IMF 이후 사라져 가는 풍습 몇 가지가 있다. 하나가 함 파는 일이고 또 하나는 이런 저런 사람들 불러 모아서 하는 집들이다. 20년 전만 해도 결혼식에 가면 집들이 언제 하냐고 묻는 게 인사였지만 요즘은 그런 인사 하지도 않고 받아 주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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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 시절 우리 집 역시 꽤나 많은 집들이를 겪었는데 곧 집안 살림이 거덜이 났다. 특히 장식장에 폼으로 갖다 놔 둔 그럴싸한 양주병들은 일찌감치 말라 비틀어져 버렸다. 그런데 학교 동기들 집들이가 코 앞에 닥쳐 왔다. 그래 문득 든 생각이 텅 빈 병이지만 황금빛 배 모양으로 번듯했던 양주병에 소주를 담아 내놓는 것이었다. 술에 굶주린 진상들에게 나는 그 병을 내밀며 러시아산 보드카라고 105밀리 뻥포를 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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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페테르스부르크 특산이라는 보드칸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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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들 한 입씩 맛보더니 찬사 일색이다. 어 이거 향 좋은데..... 야 명품이다. 당연하지 원래 남아 있던 양주 향이 배어들었을 테니. 한 명이 연신 입맛을 다시다가 보드카 상품명을 끈질기게 물어왔다. 순간 당황한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이것이었다. “차미슐리아” 차미슐리아...... 이름도 멋있다..... 녀석들은 눈깜짝할 사이에 그 명품 보드카를 비웠다. 집에 돌아갈 무렵 아까 니들이 먹은 건 차미슐리아가 아니라 참이슬이라고 말했을 때 격노한 친구들의 발길질로 인해 신혼의 아내와 사별할 위기에 처했던 건 여담으로 남겨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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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스부르크 특산 보드카 차미슐리아의 주재료였던 참이슬. 그 원래 이름인 진로. 한국 소주의 대명사라 할 진로가 이 땅의 메마른 주당들의 목구멍을 적시게 된 역사적인 날은 1924년 10월 3일이었다. 도산 안창호의 어록을 주워섬기기 일쑤던 한 젊은 소학교 교사가 일본인 교장의 미움을 사 교단에서 쫓겨나면서 진로는 잉태되기 시작했다. 조선인이 할만한 사업이 별로 없던 시절, 양조장 사업은 그나마 접근성이 높은 사업이었고 동업자와 더불어 진천양조라는 양조장을 차린 것이다. 여기서 나온 상표가 진로(眞露)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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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로하면 두꺼비가 떠오르지만 초기 진로의 상징 동물은 원숭이였다. 평안도 지방에서는 원숭이가 지혜의 상징처럼 돼 있었단다. 그런데 분단과 전쟁 와중에 이 소주 자본가도 고향을 떠서 남쪽으로 내려왔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진로 상표의 소주를 만들게 되는데 남쪽에서는 ‘잔나비’에 대한 인식이 별로 좋지 않은지라 대체재로 선택한 동물이 복을 상징한다는 두꺼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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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비는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한국인의 술상 한가운데를 지키는 수호신이 된다. 진로의 주요한 라이벌이었던 삼학소주가 김대중에게 정치자금 갖다 줬다는 이유로 공중분해당한 뒤로는 더욱 성가를 올렸고 정부가 지역마다 카르텔을 두어 지역 소주 업체들이 자신들의 성벽을 지역에 둘러친 뒤에도 ‘두꺼비’는 서울 경기 지역을 확고하게 지켰다.

처음 나온 진로는 35도짜리 증류식 소주였다. 요즘의 빼갈을 상상하면 되겠다 하지만 이게 양곡 부족 등의 이유로 금지된 후 희석식으로 돌았고 도수는 점점 낮아졌다. 1965년에는 30도로 낮아졌고 1973년에는 또 다시 5도를 낮춰 25도로 정착한다. 이 25도짜리 진로 소주는 꽤 오랜 세월 주당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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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생이로서 고등학교 때에는 술을 입에도 안댔던 내가 처음 먹은 소주도 바로 이 25도짜리 진로였다. 당시 이 소주병은 다용도로 활용됐다. MT를 가면 몇 박스가 그냥 나왔던 소주병은 기타 케이스에 알뜰하게 채워 돌아왔었다. 지금같이 곧게 뻗은 목이 아니라 주둥이를 향할 때 둔탁한 곡선을 그리던 이 25도짜리 진로 소주병은 화염병을 만들기 그만이었고 알콜과 비슷하기는 하나 전혀 다른 용도의 액체를 채운 채 ‘산산이 부서져’ 갔던 것이다. 밥은 굶으면서도 대관절 두꺼비값은 어디서 그렇게 나와서 퍼마셨는지 모르겠으나 다른 건 몰라도 80년대 대학가는 두꺼비 참이슬이 젖과 꿀로 흐르는 가나안 땅이었다.

어디 대학가 뿐이었으랴.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도 어디 가서 물 한모금 축이고 재잘대야지”라고 노래했던 송창식의 <참새의 하루>처럼 하루 일을 끝낸 직장인들은 소주에 삼겹살에 상사 씹기를 곁들인 성찬을 즐겼고 두꺼비 몇 마리 작살내지 않고 집에 가는 것을 불명예로 삼았다. 헤어진 연인들은 떠나간 이의 이름을 부르며 두꺼비와 함께 울었고 두꺼비가 과한 경우 아스팔트 위에서 ‘참이슬’을 맞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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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마시고 잘 일어나면 내일의 활력소였지만 여차직하면 벌어지는 술자리 시비에서는 곧잘 병을 거꾸로 쥐는 일이 벌어졌고 술 확 깨는 사고의 흉기로 돌변하기도 했다. 1986년 서진 룸살롱에서 큰싸움의 발단이 된 것은 누군가 소주병을 고쳐 잡은 일이었고 <무인도>와 <님은 먼곳에>의 가수 김추자는 자기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날뛰는 매니저의 소주병에 극심한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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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는 변화무쌍한 술이었다. 기쁠 때는 맥주 이상으로 사람들의 어깨에 물결을 일으켰으나 슬플 때에는 한없이 사람들의 고개를 떨어뜨리는 묘약이었다. 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친구의 등을 두드리면서 건넬 수 있는 술이었고, "먹고 죽자!“를 부르짖으면서 비장하게 내밀 때에도, 두어 번쯤 미팅한 뒤 좀 얘기를 진행시켜 보고 싶을 때, 아니면 뭔가 화끈하게 진도를 빼고 싶을 때 어김없이 건네는 술 한 잔은 으레 소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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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에 등장하는 ”새벽 쓰린 가슴 위로 부어지는 찬 소주“도 그랬을 것이다. 이러다가 오래 못가지 탄식하면서도 술 쳐라 마셔라 하고 비틀거리면서 또 이러다가 오래 못가지 중얼거리던 사람들의 마음은 80년대를 넘어서서 지금도 공감대로 전해지고 있다.

언젠가 이 <노동의 새벽> 노래를 심하게 왜곡(?)하는 현장에 있은 적이 있다. 왜곡이라기보다는 극심한 프로이트적인 해석을 가미한 것이었는데. 가사는 하나도 변화가 없다. 단 노래의 주인공을 40대 후반 50대 초반의 ‘고개 숙인 남자’로 가정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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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찬 소주를 붓는다. 이러다가 오래 못가지. 이러다가 오래 못가지.” 물론 여기서 밤일이란 야근이 아니었다. 사뭇 비장하게 노동의 새벽을 부르던 중 이 발상이 전해지면서 노래는 폭소로 뒤죽박죽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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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다해 바둥치는....... 전쟁같은 노동일..... 오래 못가도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는 이 절망벽 깨뜨려 솟구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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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엄한 왜곡 속에 웃음꽃은 다발로 피었고 소주는 한없이 들어갔었다. 희망 없는 노동의 고통을 노래하다가 갑자기 비아그라 찬가로 둔갑하는 그 어이없는 변신 속에서도 소주 맛만큼은 여일하였고 변치 아니하였다.

뜻하지 않게 잠을 깨 자판을 두드리긴 하지만 오늘 만약 술을 먹게 된다면 오늘만큼은 참이슬을 찾아야겠다. 처음처럼은 오늘만큼은 디스다. 원래 25도짜리 소주는 한 병이면 혀가 꼬였고 다리가 풀렸지만 17도짜리 요즘 이슬은 세상살이와는 달리 오히려 순해졌다. 예전 독기 넘치는 두꺼비를 연방 잡으며 지껄인 숱한 말들과 허공을 갈랐던 주먹들과 벌어졌던 모든 해프닝들을 자락으로 깔고 안주로 삼으면서 두꺼비의 개천절을 즐겨 보리라. ..... 이러는데 마누라가 뭐 시키면 할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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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때는 정말. 소주가 흐르는 젖과꿀이 흐르는 땅이었죠
요즘엔 어떤지 모르겠어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죠 진짜

도수가 많이 순해지긴했지만
기분에 취해 홀짝홀짝 마시다보면 만취가 되버려서 다음날 후회하곤 하는거 같습니다ㅋ 절주가 쉽지가 않네요..

그거야 수십년 숙제 아니겠습니까 이제 편해지십시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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