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버린 들장미

in #kr5 years ago (edited)

1828년 11월 19일 슈베르트 영면

‘사지선다’가 전 과목에 적용될 무렵을 떠올려 보면 모든 과목이 그랬지만 특히 음악이나 미술은 정말 가관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미술의 예를 들어 볼까요? 중국의 남종화, 북종화 어떤 그림도 제대로 감상한 적 없지만 그 유파의 특징이며 대표 화가를 댈 수 있고 ‘ 고낭자사인신후’라는 주문도 머리에 남아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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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냐구요. 고전파 낭만파 자연주의 사실주의 인상파 신인상파 후기인상파의 등장 순서를 기억하기 위한 암기용 주문이죠. . 음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부헨모모신베성베슈가 이건 뭔지 알아? 바하는 음악의 아버지(父) 헨델 음악의 어머니(母), 음악의 신동 모차르트, 악성 베토벤 이런 식으로 외우는 주문이었습니다. 문제가 이렇게 나왔거든요. “다음 중 음악가와 그 별명이 다르게 연결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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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하고 오늘은 음악가들의 별칭 주문 중 ‘슈가’에 대해서 얘기해 볼까 합니다. ‘슈가’는 설탕이 아니고, ‘슈베르트 가곡의 왕’이라는 뜻이었어요. 청소년기의 어느 날, 음악 시간에 배웠던 ‘보리수’의 멜로디를 처음 듣던 날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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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량이 좋아서 소풍 가면 항상 카수 1순위로 불려나갔던 친구 녀석이 부른 ‘보리수’의 가락은 그 가사와 관계없이 운동장 한 가운데 잎 무성한 보리수가 서 있고 그 그늘 아래 누군가 걸터앉아 그리운 사람, 또는 어릴 적 친구를 부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원래 가사와는 관계 없이 그저 그렇게 들리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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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듯 부드럽고 기분 좋게 귀를 간지럽히던 ‘내 귀의 슈가’, 다른 거장들보다는 훨씬 친절한 음악 세계를 우리에게 선사해 준 슈베르트의 생애는 그렇게 달콤하지 못했습니다. 외모를 평하여 안됐지만, 일단 슈베르트는 심각한 추남으로 유명했지요. 우리가 흔히 보는 슈베르트의 초상화는 그의 친구이자 화가였던 빌헬름 리더가 그린 것인데 이건 상당히 미화된 그림이라고 합니다. 19세기 식의 ‘뽀샵’이라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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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는 155센티미터 (5피트 1인치) 정도로 군대에서도 안 받아주는 땅딸보였고 머리는 큼직한 배불뚝이였습니다. 어려서 별명이 ‘작은 버섯’, 우리 말로 짖궂게 옮겨보면 ‘버섯돌이’였으니 대충 짐작이 가지요? 어려서는 그래도 귀여운 외모였다고 하는데 성장하면서 오히려 점점 더 기울어갔던 것 같습니다. 당연히 여자들의 인기를 구가할 처지는 아니었겠지요.

하지만 슈베르트에게도 아픈 사랑은 있었습니다. 테레제라는 이름의 여자였지요. 한창 왕성하게 작곡 활동을 하던 슈베르트는 어느 날 어릴 적부터 자신을 아꼈던 음악의 스승의 80회 탄신 기념 음악제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독창자가 그만 펑크를 내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하나 당황하던 때 한 처녀가 슈베르트 앞에 나타납니다.

“슈베르트씨 제가 그 역을 맡으면 안될까요?”

앗 당신은? 슈베르트는 크게 놀랐습니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교장 선생님이었는데 슈베르트의 음악적 재능을 이해하면서도 작곡을 업으로 삼는 것은 절대 안된다고 못박던 완고한 사람이었습니다. “음악을 더 할 거면 부자의 연을 끊자!”는 선언을 듣고 서러운 마음으로 방황할 때 꽃다발을 묶어 주며 당신은 훌륭한 재능이 있다며 위로해 주었던 바로 그 소녀가 성숙한 모습으로 자신 앞에 서 있었던 겁니다.거든요. 그녀의 노래 실력은 훌륭했고 성황리에 음악회를 마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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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르트는 외로움을 운명처럼 타고난 사람이었습니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말 안 듣는 아들을 두 번이나 내쫓았고 어머니가 임종할 때 ‘프란츠! 프란츠를 불러줘요’라고 애타게 외쳤지만 끝내 슈베르트는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간 뒤에 집에 도착한 슈베르트는 미친 듯한 슬픔으로 다락방에 올라가 울먹이며 노래를 지었고 그게 유명한 슈베르트의 자장가입니다. 즉 아이를 위한 자장가가 아니라 자신을 정답게 재우던 어머니에 대한 추모곡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그런지 슈베르트의 자장가는 유난히 구슬픕니다. 베토벤의 자장가는 무슨 가곡 비슷하게 우아하고 (잘 자라 내 아기 내 귀여운 아기 아름다운 장미꽃 너를 둘러 피었네. 잘 자라 내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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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의 자장가는 경쾌한 왈츠 같은데 (잘자라 우리 아가 앞뜰과 뒷동산에 새들도 아가양도 다들 자는데.....) 슈베르트의 자장가는 부르다가 웬지 눈물이 맺힐 것 같지요. “잘자라 잘자라 노래를 들으며 꽃같이 어여쁜 우리 아가야 귀여운 너 잠잘 적에 하느적 하느적 나비 춤춘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더니 이 외로운 버섯돌이 땅딸보에게 사랑이 찾아온 겁니다. 그 사랑의 열기 속에 그는 가곡 공장 공장장처럼 가곡을 찍어내듯 생산해 냅니다. ‘마왕’이며 ‘소녀의 탄식’ ‘달에게 부침’ 등 144곡을 쏟아냈으니 무슨 가곡의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이 그의 뇌 속에서 돌아가고 있었던 모양이지요. 하지만 그 컨베이어 벨트는 대량생산한 싸구려 포드 자동차가 아니라 람보르기니급의 수제 차량을 뽑아내는 최고급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들장미>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요즘은 모르겠습니다만80년대엔 중학교 음악책에 실려 있어서 합창 및 중창 대회의 단골 레파토리였던 노래죠 “웬 아이가 보았네. 들에 피이~~인 장미화 갓 피어난 어여쁜 그 향기에 탐나서 아낌없이 보네 장미화야 장미화 들에 피인 장미화”. 이 노래는 사실 슈베르트의 아프고도 유일했던 사랑의 온기를 담고 있는 노래이기도 했습니다. 슈베르트가 자신이 아버지와의 불화로 방황할 때 “프란츠 당신은 뛰어난 분이에요” 하면서 꽃다발을 묶어 준 그 소녀를 생각하며 노래를 지었기 때문이지요. 테레제 같이 예쁜 들장미를 정신없이 들여다보는 ‘웬 아이’는 어쩌면 슈베르트 자기 자신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테레제는 꽤 대담하고 거침없는 여성이었습니다. 후일 그렇게 존경하는 베토벤을 만나고도 베토벤의 늙고 병든 모습에 충격받아 아무 말 못하고 뛰쳐나온 소심남 슈베르트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지요. 슈베르트가 <들장미> 악보를 선사하자 감동한 나머지 슈베르트씨 저와 결혼해 주시겠어요? 를 먼저 부르짖었다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 슈베르트가 조금만 더 박력 있게, 자신감 있게 다가가서 그 부모에게 “따님을 행복하게 해 주겠습니다.” 부르짖었다면 슈베르트는 자신의 소심함과 열등감을 너끈히 메워줄만한 테레제와 함께 해로할 수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는 일이라고는 콩나물 그리는 것 밖에 모르고 무슨 말을 해 보라면 우물쭈물하기 일쑤인 헝클어진 머리의 남자에게 딸을 내 줄 부모는 요즘에나 당시에나 드물었을 겁니다.

테레제의 부모는 슈베르트에게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면 그때 보세.”라고 점잖게 퇴짜를 놨고 결국 테레제는 가난한 음악가 대신 넉넉한 형편의 제빵사와 결혼하게 됩니다. 곽근수의 음악가 이야기(http://sound.or.kr 중 슈베르트편)에 따르면 테레제는 슈베르트에게 결혼 피로연에 참석을 부탁하면서 자신을 위한 노래를 작곡해 줄 것을 부탁했다고 합니다. 한 번 인용해 보지요. “이상한 예감으로 봉투를 뜯어보자 테레제의 결혼 청첩장이 들어 있었다. 초대글 말미엔 "피로연에 꼭 참석해 주세요. 그리고 저를 위해서 노래 한 곡을 들려주시길 간절히 빕니다"라는 부탁이 테레제의 친필로 쓰여 있었다. 절망감과 배신감으로 며칠을 지새운 슈베르트는 테레제의 결혼 피로연에 참석했다. 그녀의 부탁대로 새로 그녀를 위해 쓴 피아노 소나타 가 단조를 직접 연주했다. 사랑을 잃은 애절한 마음이 악절마다 절절히 스며든 소나타였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자신의 결혼 피로연에서 노래를 들려주기를 청하고, 그 노래를 들으며 이별을 고하는 여자, 그리고 여자의 부탁에 응하여 처절한 심정으로 피아노 건반을 누르며 가슴 속에 돋아나는 사랑의 멜로디를 끊어내야 했던 남자. 슈베르트의 이후 인생은 사실상 이 첫사랑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슈베르트의 말입니다.

“나는 진정으로 사랑한 여자가 한 사람 있었죠. 그녀도 나를 많이 사랑해 주었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깊은 감정을 넣어 노래하는 사람이었죠. 얼굴이 조금 곰보이고, 미인이라곤 할 수 없었지만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은 여자였죠. 그녀는 나와 결혼하려고 3년이나 기다렸지만 나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할 능력이 없었고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떠나 보내야 했습니다. 나는 그녀를 언제까지나 사랑할 것입니다. 그 뒤로 나는 그녀 이상으로, 아니 그녀를 사랑한 만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일단 그녀와 헤어진 뒤 슈베르트는 술꾼이 됐습니다. 술 앞에 장사 없다고 안 그래도 볼품없던 외모는 끔찍한 수준으로 망가져 갔고 몸도 만신창이가 됐습니다. 애정 복은 없었지만 친구 복은 많았던 슈베르트였고 친구들은 ‘슈베르티아데’ (‘슈베트르의 밤’이라는 뜻)라는 슈베르트만의 음악회를 열어 주는 등 헌신적으로 슈베르트를 도왔지만 슈베르트는 깊이 모를 외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했지요. 방탕한 생활을 하던 친구 쇼버와 함께 들른 사창가에서는 매독을 얻었고 그 여파로 삭발을 하고 가발을 쓰고 다녀야 했습니다. 사랑의 기회도 아주 가끔 있었지만 딱지를 맞거나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지요. 그 슬픔 속에서 슈베르트는 계속 ‘슈가’같은 노래들을 창조했으니 어쩌면 이 또한 사랑의 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의 슬픔이란 사람의 마음을 땅 밑으로 파묻어 버리는 흙무더기이기도 하지만 때로 인간에게 인간이 낼 수 있는 능력 이상의 에너지를 자라게 하는 기름진 토양이 되기도 하니까요.

그런 슈베르트의 음악에 한없이 홀리면서도 멜로디 뒤켠에 숨은 그의 한숨에 슬퍼지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겁니다. "나의 작품은 음악에 대한 나의 이해와 나의 슬픔의 표현이다. ” 여기까지는 들어 줄만 합니다. 하지만 그의 다음 말에서는 어떻게 할 수 없이 숙연해지고 맙니다. 신이 인류에게 그의 음악을 선물하기 위해 슈베르트를 이렇게 슬프게 살게 했을까 싶은 맘이 들 정도지요. “슬픔으로서 만들어진 작품만이 사람들을 가장 즐겁게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슬픔은 이해를 날카롭게 하고 정신을 굳세게 해준다."

그가 오래 살았다면 만년의 여유로운 모습으로 “슬픔도 힘이 되더라구요.” 하면서 허허허 웃었을지 모르나 그는 서른 한 살의 나이로 너무나 아까운 젊음으로 세상 여행을 끝맺습니다. 물론 그 나이에도 모차르트를 능가하는 편수의 작곡을 했지만 말입니다. 외람된 이야기입니다만, 슈베르트 정도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면 , 그토록 아름다운 무언가를 뿜어낼 수 있다면, 실연의 아픔쯤은 백 번도 더 경험할만하다는 맹랑한 각오(?)가 듭니다. 최백호 선배님 노래 가사처럼 “실연의 달콤함도 없는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는 실로 무참하고 덧없는 생각이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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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후회속에 살았을 것 같네요 슬픈 첫사랑과 짧은 생, 아타깝네요

그런 게 인생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쉽고... 짧은 게

겨울에는 슈베르트^^ 입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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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나그네.....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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