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지사 심산 김창숙

in #kr6 years ago (edited)

1962년 5월 10일 심산 김창숙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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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를 통틀어 가장 완강하고 꼿꼿하게 일제에 맞섰고 최후까지 일점 흔들림없던 세 명의 지사(志士)로 꼽히는 세 명이 계십니다. 단재 신채호, 만해 한용운 그리고 심산 김창숙이다. 물론 다른 분들이 이 세 분보다 못하다는 뜻이 아니라 이 세분의 고집이랄지 결기랄지 당시 사람들이나 후세인들에게 비쳐지는 모습이 유독 단단했다는 의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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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럽게도 단재와 만해는 해방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아쉬운 일이기는 하나 그 뒤에 이어진 전쟁과 독재를 보지 않고 가신 것은 오히려 다행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재나 만해 성격에 폭탄이라도 들고 모처로 돌진했을지도 모르니까요. “내 너희 같은 자들에게 이 나라를 맡기자고 독립 운동 한 줄 아느냐!” 하면서 말입니다. 저 하늘 위에서 두 분은 차라리 먼저 떠나온 것에 가슴 쓸어내렸을지도 모릅니다. 일본인도 아니고 해방된 제 나라의 대통령을 두고 “내 죽거든 내 눈을 빼 대한문에 매달아 놓으면 포악한 독재정권이 반드시 망할 것을 목격하리라.”고 절규하는 심산 김창숙을 내려다보면서는 더욱 그랬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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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김창숙은 전통의 명가 의성 김씨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유학자의 엄격한 가정교육 하에서 자라났지만 다행히도 심산의 부친은 보통 양반과는 다른 분이었습니다. 하물며 천민 의병장이 건방지다고 목이나 치던 양반 꼴통과는 질적으로 다른 분이셨습니다. 공부하는 아들을 불러 농사일을 시키며 귀천이 따로 있지 않다고 교육시켰다고 하니까요. 을사조약이 맺어졌을 때 서울에 올라가 울분을 토하는 와중에 그 감방 경력을 처음으로 쌓았던 청년 유림은 경술국치를 맞고는 아예 혼이 나가 버린 듯 술로만 세월을 보내다가 다시 한 번 절치부심하게 됩니다. 내 기어이 잃어버린 나라를 다시 찾으리라.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는 유학자로서 뼈저린 통한을 곱씹습니다. 민족대표라는 33인 가운데 기독교가 16명 천도교도 15명 불교도도 2명이 낀데 반해 조선 왕조 5백년 동안 우대받았고 대의명분 하나는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다는 유림 선비들의 이름 석 자는 눈을 씻고 봐도 끼어 있지 않았던 겁니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어쨌든 김창숙으로서는 부끄럽기 이를데 없는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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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유교의 나라였다. 실로 나라가 망한 원인을 따져보면 이 유교가 먼저 망하자 나라도 따라서 망한 것이다. 지금 광복운동을 선도하는 데 3교의 대표가 주동을 하고 소위 유교는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다. 세상에 유교를 꾸짖는 자는 ‘쓸데없는 유사, 썩은 유사는 더불어 일하기가 부족하다’ 할 것이다. 우리들이 이런 나쁜 명목을 덮어썼으니 무엇이 이보다 더 부끄럽겠는가?” 라며 울분을 터뜨린 그는 뒤늦게나마 유림의 체면을 세울 일 하나를 기획합니다. 이름하여 ‘파리 장서 사건’입니다. 김창숙의 주도로 약 137 명의 유림들이 연명한 독립탄원서를 평화회의가 열리던 파리로 보낸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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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한국이 독립할 능력이 없으므로 보호를 한다고 했는데 이는 혼란만 일으킬 뿐입니다. 민족의 주체성은 고유의 사상과 문화에서 이루어진 것인 바, 일시적으로 꺾일지언정 그 정신은 천만년을 지나도 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라의 운명이 이 회의에 있음을 절감하고 나라 없는 삶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결의를 알려드리니 만국 대표 여러분은 깊이 살펴주십시오.” (파리 장서 내용 중)

이 탄원서를 기초한 것은 경남 산청의 유림 곽종석이었습니다. 그는 죽을 자리를 얻었다고 기뻐하며 적극적으로 나섰고 체포된 뒤에도 일본 법에 호소하는 죄수가 아닌 적국의 포로라고 주장하며 항거하고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합니다. 그 기개를 고스란히 받아 안은 김창숙은 그제껏 손 하얀 선비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과감한 행동도 서슴지 않게 되지요. 친일파 자금이 흘러든 부호의 집 담을 넘는 것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한 친일파 부호가 일본 경찰에 자수할 것을 권하자 김창숙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친일 부자들의 머리를 독립문에 내걸지 않으면 어찌 조선이 독립할 수 있겠는가.”

이 단호한 결의를 어찌어찌 꺾어 보려다가 죽음을 당한 이가 밀정 김달하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심산에게 접근하여 생고생하지 말고 귀국하여 편안히 지내시라, 좋은 자리 마련해 놨다고 유혹하다가 처단당하고 말았으니까요. 이후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아오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던 심산 김창숙은 결국 그것이 빌미가 된 2차 유림단 사건에 체포됩니다. 취조 과정에서 말할 수 없는 악형에 시달리는 와중에 고문 경관에게 써 내밀었던 시 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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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광복을 도모한 지 10년에 가정도 생명도 돌보지 않았노라. 돌무더기 아래 스러진 일생은 백일 하에 분명하거늘 고문을 야단스레 할 필요가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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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 앞에서는 아무리 흉포한 일본 순사라도 기가 죽게 마련입니다. 시를 번역해서 읽은 일본 형사는 고문의 강도를 낮췄다고 합니다. 뭘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영감이로구나 싶었을 겁니다. 더하여 심산은 재판 과정에서 변호사를 거부합니다. 김완섭 변호사가 와서 변호를 하겠노라 간청을 했지만 그는 끝내 변호를 거부했지요. 그 변호 거부의 변은 비장하면서 한켠으로 참담합니다.

“어머님 돌아가시고 자식도 죽어 집이 망했으매, 늙은 아내와 며느리의 울음소리, 꿈결에도 소스라치네. 포로 신세의 광태(狂態), 어찌 욕되다 이르리오. 바른 도리 얻어야 죽음도 영광인 줄 알리라. 그대들의 구구한 변호, 사양하노니, 병든 이 몸 구차히 살기를 원치 않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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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그가 중국에 있을 때 쓸쓸히 돌아가셨고 아들 둘은 모두 일제의 손에 죽었으며 며느리는 청상이 되어 집안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모두를 바라보기만 할 뿐 살펴주지 못했던 가장으로서의 괴로움이 어찌 작았을까요. 하지만 그는 자신을 피고인으로 여겨 변호를 받을 요량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주청에 따라 기꺼이 독립 청원서를 쓰고 죽을 자리를 얻었노라 기쁨을 감추지 못하던 스승 곽종석이 ‘죄인이 아닌 포로’를 자임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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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 계신 분이 심산

고문으로 두 다리를 못쓰는 처지가 됐지만 심산 김창숙은 기어코 해방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일찍이 1921년에 김원봉 이극로 오성륜 등과 함께 “스스로 조선민족 대표라 일컬으면서 미국의 노예 되기를 원했음은 그 광복 운동 사상에 치욕 됨이 크다. 이것은 방치할 일이 아니므로 문책하지 않을 수 없다.”고 격렬히 성토했던 바로 그 인물, 미국에 한국을 위임통치해 줄 것을 요청했던 이승만이 해방된 나라의 정권을 잡는 걸 지켜 봐야 했습니다. 적어도 해방 공간에서 이승만 ‘박사’에게 따박따박 꼬장꼬장 꼬챙이같은 질문을 꽂아넣은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만, 그 이승만에게 김창숙은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이 이미 민족을 팔았거니와 어찌 다른 날에 국가를 팔지 않는다 보장하겠는가.”

남북의 분단을 누구보다 가슴 아파한 그였고 5.10 남한 단독 선거도 반대한 그였지만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한 북한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선을 그었습니다. 삼팔선을 베고 죽을지언정 분단은 안된다며 삼팔선을 넘는 김구에게 “이승만하고도 협조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김일성의 협조를 얻어내겠는가.” 한탄했다고 하며 6.25때 서울이 함락된 후 남로당의 거물 이승엽이 나서서 회유했으나 단호히 거절했고 1.4후퇴 때에는 부산으로 남하하니까요.

언젠가 부산 피난 시절, 해방 뒤 그가 심혈을 기울여 일군 성균관대학교 졸업식에서 남긴 훈화가 발견됐습니다. “우리가 이 성대한 식전(式典)을 거행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3.8선 이북 전선에서는 우리 국군 장병 몇 백, 몇 천 명이 총칼에 선혈을 뿌리고 사장(沙場)에 백골을 묻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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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장병 수십만이 피를 뿌리고 지켜낸 공화국, 또 자신의 다리를 잃어가며 다시 찾은 나라가 망가지는 것을 그는 못 견뎌 했습니다. 이승만 정권이 효창운동장을 짓는답시고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독립운동가들의 묘를 옮기려 들었을 때 불도저 앞에 드러누워 저지하거나 이승만 대통령의 출마를 반대하거나 하야를 권유하는 등 이승만의 눈에 가시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자유당 일방으로 악법들을 통과시키고 시행함은 전 책임이 대통령에게 있으므로 하루라도 빨리 하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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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끝내 이승만 대통령이 성난 국민들에 의해 하와이로 쫓겨 가고 새로운 민주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목격합니다. 조선의 선비에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반독재에 대한 항거자까지, 심산 김창숙만큼이나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내고 형형한 두 눈빛으로 지켜 본 사람이 또 있을까요?

심산 김창숙은 1962년 5월 10일. 그가 그렇게도 반대했던 단독선거가 있은지 14년만에 세상을 뜨셨습니다. 두 아들은 벌써불귀의 객이 된지 오래였고 너무나 애처로운 나머지 담배라도 배우라며 담배를 가르쳐 준 며느리가 그 유족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지요. 성균관대학교 총장부터 백범기념사업회장 안중근기념사업회장 등등 장 자리는 꽤 도맡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심산에게는 집 한 채 변변히 남아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병원비조차 없어 여관과 병원을 전전하던 조선의 마지막 선비이자 독립운동가는 그렇게 자신의 일생을 바친 나라를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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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이 1957년 지은 <통일은 어느 때에> 란 시를 읽어 보면서 그분의 삶을 되새깁니다. .

“조국 광복에 바친 몸
엎어지고 자빠지기
어언 사십 년
천하는 지금
어느 세상인가
사람과 짐승이 서로들 얽혔네
붉은 바람 미친 듯
땅을 휘말고
태평양 밀물 넘쳐서
하늘까지
닿았네

아아, 조국의 슬픈 운명이여
모두가 돌아갔네
한 사람 손아귀에......
반역자의 주먹에

평화는 어느 때나
실현되려는가
통일은 어느 때에 이루어지려는가
밝은 하늘 정녕
다시 안 오면
차라리 죽음이여
빨리 오려므나.”

이 포스팅은 임시정부기념관 건립을 위한 다음 스토리펀딩에 실었던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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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해방 이후 모습을 보면..
모순이 너무 커서 때론 오싹한 기분이 들기도합니다.
그나마 독립지사분들께서 하늘에 계셔도 눈을 못 감으셨을텐데 며칠 전에는 조금 웃지 않으셨을까싶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근현대사에 대해서 너무 무지했던 저 자신을 자책하게 되는 글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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