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축년 대홍수

in #kr6 years ago

1925년 7월 4일 을축년 대홍수

20세기 후반에 팔자 세기로 유명한 ‘58년 개띠’가 있다면 전반기에는 ‘묻지마라 갑자생’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1924년생들을 일컫는 말이지요. 그들은 한반도 사람들이 감당해야 했던 두 차례의 국제전을 경험하고 치러야 했던 세대입니다. 일제 말기에 스무 살이었으니 군인으로 징용으로 남양군도에서 중국 내륙까지 끌려다녀야 했고 천신만고 끝에 돌아와서는 또 6.25라는 전대미문의 전쟁을 경험하는 비운의 세대였지요. 그들의 팔자가 사나운 건 그들의 돌 무렵 때 이미 증명이 됩니다. 1925년 을축년, 그러니까 묻지마라 갑자생들이 채 걷지도 못하거나 걸음마를 막 뗄 때 한반도에는 또 하나의 전대미문의 사건이 들이닥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을축년 대홍수입니다.

을축년대홍수.jpg

7월 초는 장마 기간이었고 어떤 이는 태풍이 밀고 올라왔던 7월 9일 경을 을축년 대홍수의 시작으로 잡기도 하지만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기록을 근거로 7월 4일로 잡아 봅니다. 장마철이니까 비도 오락가락했겠죠. 이 7월 초 경기 지역을 뒤덮은 장마 전선에 이어 태풍이 들이닥치면서 서울 한강 일원은 최악의 홍수에 뒤덮이고 황해도 이남의 거의 모든 강이 범랍합니다.
.
이후 8월에는 청천강 압록강 일대에 집중 호우가 쏟아졌고 또 한 차례 태풍이 영호남 지역을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한강만 강이냐 압록강도 강이다 압록강만 강이냐 낙동강도 강이다는 술자리 노래식으로 거의 전국이 물바다가 됩니다. 을축년 대홍수죠.

을축년대홍수2.jpg

이때 전국을 폭격한 집중호우의 강수량은 700-970밀리미터. 피해액은 조선 총독부 1년 예산의 58퍼센트에 해당하는 1억 300만원에 달했습니다. 사망자만 647명이었고 파손되고 유실된 집은 수만 채, 이재민도 수십 만 명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괴멸적 타격을 입은 것은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경성이었습니다. 경성의 명물이었던 한강인도교가 떠내려 갔고 용산에 있던 철도청의 1층까지 물이 들어찼으며 남대문까지 홍수의 끝자락이 닿았으니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을축년 대홍수는 서울 인근을 초토화시켰고 서울의 지도와 인심과 문화를 바꾼 자연 재해였습니다. 그 예 하나를 들어 볼까요. 지금 망원동에 서 있는 망원정은 예로부터 내려온 그 망원정이 아닙니다. 80년대까지 상습 침수 구역이었던 이곳에도 을축년 대홍수는 거침없이 덮쳤고 망원정을 통째로 쓸고 가 버렸기 때문이지요. 연산군 시절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올라설 수 있었다는 흥청망청의 전설 망원정이 쓸려간 것도 안됐지만 더 안된 것은 당장 집을 잃어버린 망원동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피난한 곳이 합정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망원동 사람들은 대대로 자신들이 뼈대 있는 양반 마을 사람들이라고 여겼고 합정동 사람들을 깔아 보아 왔습니다. 합정동이라는 게 ‘합정’이라는 우물에서 온 동네 이름인데 절두산에서 순교한 가톨릭 신도들의 목을 친 망나니들이 그 우물에서 칼을 씻었다는 전설이 있으니만큼 그렇게 상층민들이 사는 동네는 아니었던가 보죠. 망원동에서 피신 온 사람들 일부는 합정동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도 영 배알이 꼴렸던가 봅니다. 1927년 총독부에 “상놈을 구장으로 모실 수 없으니 바꿔 달라.”고 민원을 냈으니까요. 당연히 합정동 원주민(?)들도 속이 뒤집혔을 것이구요. (Korea Daily 2010.7.19 전우용 교수 기사에서 참조)

을축년대홍수1.jpg

사람만 그런 게 아닙니다. 한강 서쪽의 절경으로 우뚝 솟았던 선유봉은 홍수 이후 납작해집니다. 홍수에 혼이 난 일제가 그 선유봉을 폭파시켜 그 골재로 한강둑을 쌓는 데에 이용했으니까요. 그래서 오늘날의 선유도는 양화대교 아래 야트막한 섬으로 변합니다. 이 정도는 약과죠.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잠실은 원래 강북이었다가 강남으로 변했으니까요. 원래 왕실 여인들이 양잠 시범을 보이던 그 ‘잠실’은 아마도 오늘날의 한강 밑바닥에 잠들어 있을 겁니다. 즉 그 잠실은 강북에 있었지만 홍수 이후 강의 흐름이 바뀌면서 강남이 돼 버린 거죠. 이밖에도 오늘날의 서래 마을은 반포에서 수재를 당한 사람들이 개척한 것이 마을의 시초가 됐고 조선 시대 이래 번잡한 장터였던 송파 나루는 홍수의 직격탄을 맞은 후 점차 쇠퇴해 갑니다.

선유봉.jpg
겸재 정선의 그림 선유봉입니다. 이게 선유도 공원이 돼 있다고 보시면 되겠습.....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습니다. 온 경성 시민들을 물의 사막으로 몰아넣었던, 즉 물천지이긴 하지만 청계천 하숫물이 우물로 들어가 버려 온 도시의 식수가 끊기다시피 했던 지옥같은 홍수였고 전국적인 물난리였지만 이 홍수로 인해 수천년 동안 감춰진 것들이 조심스레 드러납니다. 그 사나울 물길이 쓸고 간 위에 암사동 선사 주거지가 모습을 드러냈고 백제의 옛 도읍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도 이 홍수 이후에 수천년의 비밀을 걷고 우리 앞에 나타난 거지요 . 그 홍수가 아니었던들 어느 아파트 기초공사로 사라졌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아니면 더 큰 홍수가 오기를 기다리며 수백년을 더 기다렸을지도 모르구요.

아무리 절박한 위협의 뒤에도 희망의 꼬리는 달리는 법이고 막막한 비극 속에서도 새로움의은 움을 틔우는 법입니다.

Sort:  

저희 할머니가 1925년생이셔서 더 재밌게 읽었습니다.

저의 부모님세다가 격었을 입이 딱 벌어지게하는 홍수네요.

돌아가신 친정 아버지께서도 을축생 소띠셨습니다.
평생을 일하시며 가족을 위해 희생하시며
온 몸으로 시대를 살아내신 분이셨습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아버지
제 안에 살아계십니다.

선유도가 아닌 선유봉을 그림으로라도 보게되니 느낌이 새롭네요. 말 그대로 강산이 바꼈네요.

Coin Marketplace

STEEM 0.29
TRX 0.12
JST 0.033
BTC 62934.09
ETH 3118.65
USDT 1.00
SBD 3.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