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내전의 여걸 라 파시오나리아

in #kr5 years ago

1989년 11월 12일 라 파시오나리아 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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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아베 일본 수상의 안보법안에 반대하는 시위대 동영상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북을 두들기며 어깨를 들썩이며 랩같은 구호를 반복하는 일본 젊은이들의 흥겨운 시위였다. 그때 한 일본의 젊은 여성이 외치던 구호 가운데 일본어도 영어도 아닌 스페인어가 끼어 있었다. ‘노 파사란!’ 통과시키지 않겠다! 80년 전 스페인을 달뜨게 했던 역사적인 구호. 그 구호가 지구를 반 바퀴 돌고 80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울려 퍼지는 모습에 감회가 젖었던 기억이 새롭다. 80년 전 이 구호를 외친 이도 그 또래의 젊은 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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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성이 외친 구호는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무렵 시위대가 많이 부른 <훌라송>의 일부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 더 원한다 훌라훌라” 일어서서 저항하다가 죽을지언정 무릎을 꿇고 생을 구걸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드러내는 이 가사의 저작권자 역시 같은 여성이었다. 이름은 돌로레스 이바루리 고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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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스페인의 바스크 지역 광산 노동자의 딸로 태어났다. 원래 다산(多産) 전통의 남유럽 국가답게 그녀의 형제들도 축구팀급이었다. 11남매. 그 중에 그녀는 8번째였다. 여기서 바스크 지역의 역사를 잠깐만 훑고 지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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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크인들의 언어는 유럽 대륙의 인도 유럽어족과 완전히 다른 고립어 계열이다. 즉 바스크인들은 언제 어디에서 왔고 왜 그곳에 살고 있는지부터가 미스테리에 속하는 민족이다. 로마 제국이 스페인을 지배하던 시절에도, 이슬람 세력이 스페인에 초승달 깃발을 꽂았을 때에도 독립적 지위를 유지했던 깐깐한 사람들이었다. 중세 기사의 무용담으로 유명한 <롤랑의 노래>에서는 기사 롤랑이 샤를마뉴 대제의 군대 후위를 맡았다가 이슬람 군의 기습으로 장렬히 전사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때 롤랑을 공격한 것은 이슬람군이 아니라 바스크 인들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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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이 발생했을 때 대체로 바스크인들은 공화파 정부에 충성했다. 공화파 정부가 더 많은 자치를 허용할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고집 세기로는 전 유럽 어느 민족에 뒤지지 않는 바스크인들은 프랑코의 군대에 맞서 끝까지 저항했다. 프랑코를 돕는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쑥밭이 됐고 피카소의 그림으로 영원히 역사에 남은 도시 게르니카도 바스크의 도시였다. 이 바스크 출신의 광부의 딸 돌로레스 이바루리는 당연히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고 소녀 티를 벗자마자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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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녀는 평범한 남자와 결혼하여 열 댓 명의 아이들을 낳고 그들을 건사하느라 여념이 없는 여느 스페인 시골 여자들과는 팔자가 달랐다. 달라도 많이 달랐다. 그녀는 각종 사회과학 서적을 독학으로 읽으며 자신과 조국의 상황을 체득하고 사회운동가로 성장해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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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미네로 비스카이노> 신문에 처음으로 자신의 글을 발표하였는데, 이때 필명이 ‘열정의 꽃’이라는 뜻의 ‘라 파시오나리아’였다. 이 ‘열정의 꽃’은 1920년 이후 스페인 공산당에 입당했고 당 중앙대회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됐으며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제13차 공산당 전체회의에 스페인 대표로 참석하는 등 좌파 진영의 주요한 지도자로 성장해 갔다. 1936년 2월의 운명적인 선거에서 그녀는 목이 쉬어라 연설하며 좌파 연합 인민전선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고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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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1936년 총선은 치열했다. 72퍼센트의 높은 투표율 속에 좌파와 우파의 표 차이가 1퍼센트도 나지 않는 초접전이었다. 어쨌든 다수의 의사가 관철되는 것이 민주주의의기본 원리. 선거법에 따라 인민전선이 다수 의석을 가져갔고 공화파 정부를 수립했다. 돌로레스 이바루리도 국회의원이 됐다. 하지만 이미 프랑코 이하 군부나 지주 등 우익 세력은 정부에 복종할 마음이 없었다.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피비린내나는 스페인 내전이 시작됐다. 스페인 내전은 “전 세계 모든 이념들이 모인” 전쟁이면서 동시에 “양심의 시험대”라고 불리웠다. 선거에서 승리한 인민전선 정부의 정통성과 구세력의 압제의 타도를 부르짖으면서 전 세계의 양심들이 몰려와 ‘국제여단’을 구성하여 프랑코 군대와 싸웠다. 영국인 조지 오웰도, 미국인 헤밍웨이도 그 중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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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를 지키던 공산당원 소녀

이 내전에서 돌로레스 이바루리 의원은 저항의 여신(女神)으로 그리고 용기와 열정의 꽃으로 스페인 사람들과 공화파를 도우러 온 외국인들의 뇌리에 깊이 꽂히게 된다. 1936년 마드리드 방어전을 앞두고 그녀가 10만 군중 앞에서 한 연설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큰 울림으로 남았다.

“.....파시즘은 무사히 통과하지 못할 것입니다. 노 파사란! (No pasaran!) 왜냐하면 파시즘의 진로를 막아왔던 우리의 방어가 더욱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비겁한 적은 우리처럼 우리를 전쟁터로 이끄는 이상이 없기에 용감하게 돌진해오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는우리의 ‘민주 에스파냐’를 위해 이상과 사랑의 날개를 달고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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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냐. 이는 단순히 한 국가의 이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에스파냐는 케케묵은 인습에 사로잡힌 에스파냐가 아니라 민주적인 에스파냐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에스파냐는 농부에게 땅을 주고, 노동자들이 산업을 지배하는 사회이며, 사회보험을 도입하여 노동자들이 늙어서 노숙자로 전락하지 않게 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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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프랑스로 가서 공화파 지지연설을 하며 국제적 지지를 호소하기도 했는데 거기에서 바로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 더 원한다.”는 유명한 연설을 남긴다.

“노 파사란! 그들은 이곳을 통과하지 못한다!”와 “무릎 꿇고 살기보다....”를 절규하는 열정의 꽃이 어느 정도의 향기를 내뿜었는지는 헤밍웨이의 걸작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나>속 등장인물의 증언으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이 등장인물은 돌로레스 이바루리의 연설을 듣고 와서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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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고 음성만으로도 진실을 말하는 줄을 알겠더군, 그녀가 전하는 소식을 그 대단한 목소리로 들었을 때 그 순간은 이 전쟁의 가장 위대한 순간 중의 하나였네. 선과 진실이 마치 백성의 참된 사도에서 뿜어져 나오듯 그녀도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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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 군에 항복한 공화파 병사

그러나 스페인 내전은 프랑코 군대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녀는 수십 년 동안이나 고향을 떠나야 했다. 비참한 운명을 맞은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소련으로 망명해 큰 파란은 없었지만 아들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잃어야 했고 스페인 공산당 서기장으로서 꿋꿋이 자신의 이상과 신념을 고수했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의 봄 사태, 즉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 침공 때 오랜 침묵을 깨고 소련 공산당을 정면으로 비판하기도 했던 그녀는 프랑코가 죽은 후 민주화의 바람이 불어오던 1976년 스페인으로 귀환한다. 그녀의 나이 여든 한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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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 사후 스페인은 카를로스 국왕의 균형 잡힌 리더쉽 아래 민주화의 발길을 내딛었고 공산당도 합법화돼 선거에 참여한다. 1977년 무려 41년만에 치러진 총선에서 이바루리는 다시 한 번 국회의원이 된다. 역시 41년만의 재선. 당시 그녀의 나이 여든 둘이었다. 내전 시작 전의 스페인을 41년 살았고 독재 치하 스페인을 41년 떠나 있었던, 늙었으나 싱그러운 ‘열정의 꽃’ 라 파시오나리아의 귀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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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스페인으로 돌아온 뒤에도 위기가 많았다. 최대의 위기는 역시 1981년 2월 23일의 쿠데타 기도였을 것이다. 헌병대 중령이 수상 선출을 위해 모든 국회의원이 모여 있던 국회의사당을 습격했다. 자동소총이 난사되고 모두 엎드리라는 호령이 떨어졌을 때 모든 의원들이 책상 밑에 납작 엎드렸지만 두 사람만은 자리를 지켰다. “내가 왜 당신들 명령을 들어야 하는가.” 수아레스 현직 수상과 돌로레스 이바루리의 후계자로 스페인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산티아고 카리조였다. 마치 쿠데타군에게 “노 파사란! 여기는 민의의 전당 국회다.”를 외치듯 그들은 똑바로 자리에 앉아 쿠데타군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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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카를로스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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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카를로스 국왕이 군복을 입고 방송에 출연, 결연한 쿠데타 반대를 표명했고 1936년을 꿈꾼 군부의 반란자들이 체포되면서 쿠데타는 막을 내렸다. 아마 이 모습을 보면서 열정의 꽃 라 파시오나리아, 돌로레스 이바루리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스페인의 민주주의는 다시 시작했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돌로레스 이바루리 고메스, ‘라 파시오나리아’는 1989년 11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아흔 네 살. 두 세기에 걸친 한 세기에 가까운 삶. 그녀의 눈 앞에서 펼쳐지고 그녀의 몸을 휘감아돌았던 역사의 소용돌이를 그녀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볼 꼴 못 볼 꼴 무량대수로 겪었을 그녀가 숨을 거두던 날 가장 선명하게 눈앞을 스쳐갔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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