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보 전투가 남긴 것

in #kr6 years ago (edited)

1937년 6월 4일 보천보 전투

김일성 가짜론의 연원은 유서가 깊다. 극작가 오영진은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환영 대회 때 연단에 등장한 서른 넷의 새파란 김일성을 보고 군중 속 일부에서 "저건 가짜다!" 소리가 튀어나왔다고 증언하고 있다. 만주 벌판 누비며 일본군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백전노장이 저런 애숭이라니 말이 되는가 하는 항변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기실 김일성 장군이 되기에 저 청년은 너무 젊다는 반론은 무의미하다. 청산리 대첩을 지휘하던 때 '김좌진 장군'은 서른 한 살에 불과했으며, 당장 6.25 때 한국군은 서른을 갓 넘긴 참모총장이 지휘하지 않았던가. 황소도 얼어 죽는다는 만주 벌판에서 풍찬노숙하며 수시로 죽을 고비를 넘기는 빨치산 대장이 백발성성한 노인일 것이라는 것은 안방에서 군불 때면서 아이들에게 들려 주는 이야기 속에서라면 몰라도, 현실에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1937년 6월 4일은 "만주 벌판에서 조국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김일성 장군의 전설이 씨를 뿌린 날이며 또한 만개한 날이고 그럴싸한 화석으로 남게 만든 날이었다. 6월 3일 밤 압록강 건너 만주 땅에는 수십 명의 어두운 그림자가 모여들었다. 그들은 뗏목을 타고 소리 없이 노를 저었고 이윽고 조선의 혜산진 땅에 발을 딛었다. 조선인민혁명군 90여명이었고, 그 지휘자는 김일성이었다. 국내에서 빨치산들에게 호응해 온 조국광복회원 80여명이 힘을 합쳤다.

보천보전투.jpg

6월 4일 밤 10시 김일성이 권총으로 신호탄을 쏘아 올림으로써 역사적인 보천보 전투가 시작됐다. 그런데 양상은 조금 이상하게 전개된다. 기관총을 멀리서부터 쏘면서 진격한 덕에 주재소에 나와 있던 일본인 경찰 3명과 조선인 경찰 2명이 사태를 미리 파악하고 도망친 것이다. 이날 보천보 근처의 일본인 중에서 죽은 사람은 멋모르고 반항했던 일본인 요리사 하나, 그리고 엄마 등에 업혀 있다가 유탄에 맞아 죽은 어린아이 하나였다. 후퇴하는 유격대원을 추격해 온 일본 경찰을 사살하긴 했지만 '대첩'이라고 하기엔 뭣한 전과였고, '청사에 길이 빛날 전과'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하지만 그 의미를 부인할 수는 없다. 김일성 자신 "군사적 승리보다는 정치적 승리"를 목적에 두었다고 했거니와, 무엇보다 조선 독립을 위해 싸우는 무장 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국내 진공 작전'을 펼쳤다는 자체가 커다란 화제를 낳았다. 조선 동아일보는 경쟁적으로 호외를 냈고, 당시 금주 중이던 여운형은 흥분해서 사람들을 끌어모아 밤새 환호작약하며 통음한 후 함경도 두메산골 보천보 현지로 달려갔으며 임시정부의 김구도 감격하여 김일성 쪽에 사람을 보냈다고 하니 그 충격과 의미를 짚어 볼 수 있을 것이다. 1929년의 거대한 학생 운동도 수포로 돌아가고, 내로라 하던 조선의 인사들이 일제에 대한 저항을 포기해 가던 시절, 김일성의 국내 진공은 "조선 아직 죽지 않았다."는 선언이었고, 일본의 피해가 적었다 해서 쉽게 폄하할 성격의 사건은 아니다. 딱 이만큼이면 좋았을 것이다. 남이건 북이건 이 정도로 평가하고 넘어갔으면 오죽이나 좋았을까.

보천보호외.jpg

남한에서 '보천보 전투'는 오랫 동안 금기시되어 온 이름이었다. 교과서에서 언급하기는커녕 연구 논문에서도 다루기조차 껄끄러웠다. 김일성이 이끄는 독립군 운운했다가는 어느 귀신한테 잡혀 먹힐지 모르는 세월 속에서 30년대 무장 독립군이 국내 진공을 이루었던 (그 전과가 보잘것없을망정) 보천보 전투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표백되어 사라져 버렸다. 여운형의 환호도, 동아일보가 호외까지 내며 흥분했던 기억들은 불온의 딱지 속에서 흔적도 없이 녹아 없어지고 말았다.

북한도 다르지 않다. "대포도, 비행기도, 탱크도 없이 진행한 자그마한 싸움이었지만" 북한은 보천보를 "일제의 폭압 밑에 신음하던 우리 인민에게 조국해방의 서광을 안겨준 역사적 사변"으로 끌어올리며 "민족적 독립과 자주권을 부활시키려는 혁명적 의지와 불굴의 투쟁정신을 내외에 널리 보여 준" 건곤일척의 전투로 끌어올렸다.

오늘날 보천보 전투 당시 희생된 일본인의 상점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 쓰여진 글은 그 중의 압권이다.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시며 천재적 전략가이신 혁명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몸소 조직하신 보천보 전투 때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인민의 피를 빨아먹던 이 일본놈 상점을 습격하고......"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의 광휘 아래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주도하지 않은 항일운동들은 대부분 곁가지로 치부됐고 사라져 갔다. 무장 독립 투쟁이 가장 치열하던 시절, 일본군에게 굴욕을 안겼던 청산리 전투, 봉오동 전투, 그리고 <격정시대>의 작가 김학철이 소속되었던 조선 의용대가 일궈낸 빛나는 호가장 전투, 그 외 동북아시아 곳곳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역사들을 북한은 가르치지 않고 있다. 가르치더라도 '기타 등등'의 영역에 턱걸이할 뿐.

신념에 의해 그 실체가 좌우될 때 역사는 슬프다. 현재의 정치적 판단과 지형에 따라 과거를 깎고 더할 때 역사는 생명력을 잃는다. 그래서 보천보는 남과 북 사이를 가르는 그림자가 현재와 미래만이 아니라 과거로 거슬러 드리워질 수 있음을 입증하는 처참한 증거명으로 남는다. 우리는 보천보로 대변되는 반쪽을 잃었고, 저쪽은 보천보라는 이름으로 다른 반쪽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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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읽고 갑니다.
김일성에 대해 하나도 몰랐는데 이런 내용도 있었군요

20세기의 파란 많은 한국인 중의 하나입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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