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황제 부의 즉위

in #kr5 years ago

1908년 11월 15일 마지막 황제 부의 즉위

북경에 가면 만리장성만큼이나 꼭 들르게 되는 곳이 이화원이다. 그 넓디넓은 호수와 그 주변에 솟은 산들이 사실은 사람의 손으로 파헤친 자리에 물을 붓고 그러다 나온 흙을 쌓아올려 만든 인공 호수와 인공 산이라는 사실에 기가 질리게 마련이다. 경복궁 하나 짓기 위해 난리 블루스를 쳤던 우리에 비하면 더욱 그렇다. 물론 부러워서 그러는 것만은 아니다. 이 호수를 만들고 산을 쌓아올리다가 도대체 몇 명이 지쳐 쓰러져 죽어갔겠으며 그들이 흘린 눈물이 저 호수의 물에 비해 적기야 하겠는가 말이다. 이화원 곳곳에는 색다른 구경꺼리들이 많은데 그 중의 한 곳은 청나라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황제인 광서제의 동계 유폐지였다는 옥란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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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스물이 훨씬 넘도록 이모 서태후의 수렴청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황제는 자신의 권리를 되찾고 또 날로 병들어가는 나라에 새 기운을 불어넣고 싶었다. 그를 도왔던 것이 강유위 등 변법자강운동가들이었고, 나이 스물 일곱 살 때 무술변법을 일으켜 한 번 나라를 바꿔 보려고 했지만 서태후를 위시한 보수 세력의 반격에 여지없이 참패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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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후 서태후의 철저한 감시 속에 답답한 여생을 보냈는데 1908년 11월 14일 갑자기 죽는다. 그리고 서태후도 그 뒤를 따르듯 세상을 떠나는데 이 가련한 황제의 죽음을 두고 독살설이 끊임없이 제기됐고 21세기에 정밀검사를 해 보니 독살이 맞았다는 설도 전한다. 아무튼 황제가 죽었고 그 황제를 손아귀에 넣고 대청제국을 실질적으로 망하게 했던 (여자가 대빵된다고 좋은 거 하나도 없다) 서태후도 죽었다. 죽기 직전 서태후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지명한 것이 부의였다. 영화 <마지막 황제> 그대로다.

1908년 11월 15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이자 진시황 이후 이어온 중국의 오랜 제정(帝政)의 마지막 주인이 제위에 올랐다. 즉위식 때 하도 울어제껴서 그 아버지 순친왕이 “조금만 기다려라 곧 끝난다 곧 끝난다.”고 달랬는데 그걸 들은 이들이 몹시 불길하게 여겼다더니 아니나다를까 그가 아기 티를 채 벗기도 전에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조는 멸망한다. 더 이상 그는 황제가 아니었다. 물론 자금성에서 생활했고 새로이 들어선 중화민국으로터 예우는 받았지만 말이다. 그 후 그에게 밀어닥친 풍운은 <마지막 황제>에도 대충 나오니 (안나오는 부분도 많지만) 역시 그냥 넘어간다. 중국의 마지막 황제에서 일본의 괴뢰국 만주국 황제로, 다시 전범으로 포로가 되고 수용소에서 교화를 받기까지 그의 일생은 황제에서 죄수까지 인간사의 최상층과 최하층을 오간 드라마탁 그 자체였다.

영화에는 그에게 영향을 준 교도소장이 나온다. 혼자 씻기는 커녕 신발끈조차 매지 못하던 부의로부터 그 시종들을 떼어내고 부의 스스로 할 것을 명령하고, 독립심을 가지라고 윽박지르던 교도소장 그는 김원이라는 이름의 조선족이었다. 그에 따르면 부의는 스스로 문고리도 잡지 못해 헝겊을 대고 문을 열었고 가끔 있는 목욕 시간, 누구보다 기민하게 움직여 탕안으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단 누가 먼저 몸을 담근 경우는 절대로 물에 들어가지 않았다. 평생 물 속에 누구랑 같이 있은 적은 없고 누구의 몸이 닿은 물을 써 본 적도 없었다니 당연한 노릇이었겠지만.

출옥 후 그는 그야말로 평범한 삶을 산다. 만주족 2백만의 대표로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도 지냈지만 그의 직업은 북경 식물원의 정원사였다. 그는 그 직에 임명됐을 때 “황제가 됐을 때보다 더 기뻤다.”고 했다고 한다. 허공에 매여 있던 발이 땅에 닿을 때의 느낌이었을까. 쉰을 넘은 부의는 식물원의 민병 (民兵 - 군중 조직의 일종)에 들어갈 나이가 아니었음에도 황소 고집을 부려 그 일원이 되어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홍위병들에 의해 교도소장 김원이 닦달을 받는 장면이 나오고 군중들에게 몇 마디 호소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김원이 홍위병들에게 시달릴 때 부의 역시 못지않은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부의는 이때 병이 위중하여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는데 홍위병들이 들이닥쳐 병원 의사 멱살을 잡고 뭐 이런 반동을 치료하느냐고 호통을 쳤다. 꼼짝없이 거리로 들어메쳐지려는 찰나 그를 구한 것은 주은래였다.

주은래는 홍위병 우두머리에게 전화로 고함을 질렀고 홍위병이 두려워 치료를 거부하는 의사들을 채근해서 부의를 치료하게 한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홍위병들은 “전범들에게 지나친 관심을 보인” 김원을 잡으려 들었고 부의에게 그에 필요한 증언을 요구했다. 그때 부의는 결연하게 이렇게 썼다고 한다.

“나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과 정치협상회의 위원의 신분으로, 김원 선생의 학생신분으로 보증한다. 김원 소장은 나의 은사이며 전국에 이름 있는 모범 간부다.”

몇 번이나 들이닥치는 홍위병들 앞에서 그는 몇 번이고 같은 주장을 쓰면서 그들에게 저항했다고 한다. 그 순간 부의는 평생을 남의 손에 이끌려 다닌 황제가 아닌 존엄성을 지닌 인간이었을 것이다. 도무지 바라지도 않았던 만인지상의 자리에 먼 친척 아주머니의 지명 하나로 덜커덕 앉았던 순간 역사의 회오리에 내던져졌던 그 정신없는 삶을 마칠 때 그는 아내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황제도 되어 봤고 백성도 되어 봤습니다. 내 생애의 종말은 휼륭하다고 생각합니다. 나같은 사람을 개조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죠. 그 어떤 나라에서도 불가능했을 거요.”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추락해 본 남자. 그가 마지막 황제로 자금성을 밟았다. 1908년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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