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여자

in #kr6 years ago

1977년 9월 27일 <겨울 여자> 개봉

얼마 전에 연예 뉴스 프로그램이 런칭됐었다. 담당 PD는 얼마 되지 않는 제작비로 이곳 저곳 구멍나는 데를 막으면서 아이템 챙기고 녹화하고 하여간 손발이 넷이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물론 작가들도 마찬가지였고. 그런데 날벼락이 떨어졌다. 팀장님께서 득달같이 전화를 하셔설랑 어떻게 그 사람이 죽었는데 연예뉴스팀이 가지 않을 수 있냐며 당장 지방에 있던 그 사람의 빈소에 달려가라고 펄펄 뛰었던 것이다. 가뜩이나 시간 없어 죽겠는데 지방까지 어떻게 다녀오냐며 입이 나오는 제작진이었지만 까라면 까는 것은 군대만이 아니다. 밤새 남쪽 끝까지 차를 달려 빈소를 찍어 방송을 냈다. 하지만 방송된 다음에도 댓발은 나온 제작진의 입은 들어가지 않았다. “도대체 김추련이 누구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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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을 바라보는 팀장에게야 김추련은 아련한 추억의 바다로 그를 인도하는 이름이지만 촬영갔던 20대 후반 30대 초반에게 김추련은 김춘추와도 비슷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작가 한 명이 불만 가득한 어조로 물어 왔다. 차장님은 김추련 알아요? 당연히 “아니?” 하며 눈 똥그랗게 뜨는 걸 기대했겠지만 나는 김추련을 알고 있었다. “알지. <겨울여자>의 그 남자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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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9월 27일 단성사는 ‘추석 특선 푸로’로 한국 영화 <겨울여자>를 선정했다. 서울시내의 내로라 하는 극장들은 저마다의 특색이라고 할까 선호하는 영화풍이 있었다. “70밀리 시네마스코우프”를 자랑하던 대한극장은 우람한 화면과 생생한 사운드로 <아라비아의 로렌스>같은 스케일 거대한 작품들을 주로 취급했고 광화문의 아카데미 극장은 정동길을 걷는 연인들을 겨냥한 로맨틱한 영화들을 주로 틀었다. 스카라 극장도 넓은 화면으로 대작들을 주로 상영했고 명보극장은 60년대 한국 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극장이었다. <아리랑> 등 일제 시대로부터의 역사를 자랑하는 단성사의 영화는 조금 그 내력값을 하지 못했다. 주로 서부활극이나 홍콩영화를 많이 틀었기 때문이다.

“단성사 뒷골목은 소위 기생들이 많은 홍등가였다. 종로 일대가 유흥가였다. 그리고 그 일대는 깡패들이 많았던 우범지대였다. 그래서인지 주로 액션영화가 인기를 끌었고 자연스럽게 액션영화를 많이 상영했다. 그 때문에 당시 영화계에서 ‘액션영화’ 하면 단성사로 통했던 것 같다. 또 액션물은 학생들도 좋아했는데 인근에 경기고, 덕성여고, 창덕여고 등 학교가 많아 학생들도 극장을 많이 찾았다.” (단성사 전 상무 이용희의 인터뷰 중 - 한국영상자료원 웹진)

그러던 중 1977년 9월 27일 개봉한 <겨울여자>는 한국 영화의 산실로서의 단성사의 위상을 단번에 회복시켜 놓았다. <겨울여자>는 며칠 전 세상을 뜬 천재 소설가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을 제치고 당시 한국 영화 최고 흥행작으로 떠올랐다. 각색은 최인호처럼 발군의 소설가였던 김승옥이 했고 김호선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 작품에는 김호선 감독에 한국 영화의 영원한 히어로 신성일이 등장하고 그 상대역으로 장미희가 열연했으며 곁들여 김추련, 송재호, 박원숙 등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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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추련이 맡았던 운동권 대학생 역에는 이덕화도 물망에 올랐었지만 막판에 탈락했다고 한다. 하나 더 재미있는 에피소드로는 신성일은 처음 호흡을 맞추는 장미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 같이 생긴 애가 어떻게 주인공이냐.” 그의 눈에 장미희는 빈대떡처럼 넓적한 못생긴 얼굴이었다니. 허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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앳된 여자 주인공 '이화'가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장하면서 만나는 여러 남성들을 통해 현대사회의 갈등을 묘사하고 파격적인 현대 여성의 성(性) 모랄을 담은 <겨울 여자>의 남녀 주연은 아무래도 한국 최고의 배우 신성일과 떠오르는 신성 장미희였다. 김추련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주연이라고 명함을 내밀 처지는 못되었다. 그런데 이 엄연한 전제를 무시한 일대 사건이 단성사 간판 위에서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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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극장의 얼굴은 단연 간판이다. 개봉관들의 간판 그림을 그리는 이들은 ‘화공’이라고 불리우며 대접을 받았고 그들은 영화의 대표적인 장면들과 주인공들의 극적인 모습을 간판에 담았다. 당시 <겨울 여자>의 간판을 그린 단성사 화공 백춘태씨는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회고를 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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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구레나룻이 시커먼 놈이 찾아와서는 간판에 자신의 얼굴을 넣어달라는 거야, 쳐다보지도 않았더니 일이 끝나도록 기다리다가는 포장마차로 날 데려가더군. 그래 이름만 넣어주겠다고 했더니 꼭 그림이어야 한대. 며칠 동안 찾아오는 정성이 기특해서 '에라 욕 한번 먹자' 하고 걔를 신성일보다 크게 그렸지. 개봉날 난리가 났어. 신성일 측에서 가만 있겠어? 미술부 문 닫고 도망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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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레나룻 시커먼 청년은 영화 <겨울여자>에서 여주인공 이화와 사랑을 나누는 운동권 청년 정치학도 석기 역을 맡은 영화배우 김추련이었다. 김추련과 장미희가 남루한 다방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 중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들으며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은 명장면으로 남아 있거니와 당대의 배우 신성일을 뒷전에 세우고 자신을 단성사 간판의 주인공으로 부각시키고자 했던 당찬 배우 김추련은 이 영화를 통해 스타가 됐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영화 속에서 교통사고로 일찍 죽은 것처럼, 김추련은 2011년 11월 8일 “외로움과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유서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서 이 세상과 이별하고 영원한 ‘겨울 남자’로 남는다.

<겨울여자>는 단성사에서만 58만 명이라는, 당시로서는 전무후무한 국내 영화 흥행 기록을 세운다. 이 영화의 포스터 문구는 매우 인상적이다. “수십 편의 외화를 마다하고 왜 명문 단성사는 이 영화를 특선(특별히 선정)했을까!” <겨울 여자>는 무려 100일 동안 연일 전회 매진 행진을 펼친다. 추석 특선 프로로 나온 영화가 해를 넘기고 구정 특선 프로까지 이어졌고 3월이 되어서야 그 아쉬운 막을 내리게 된다. 앞서 말한 바대로 한국 영화 최고의 흥행 기록이었다. 당시 내리막을 걷고 있던 한국 영화는 그로부터 13년 동안 그 기록을 깨지 못한다.

그 영화 <겨울여자> 장미희의 그야말로 호탕한 웃음이 포스터 전면을 장식했던 영화, 나는 동네 신도극장에서 전자인간 337인가 로봇 태권브이인가 하여간 ‘2본동시’로 봤지만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고 저 누나가 옷을 벗든 입든 꾸벅꾸벅 졸며 만화 영화 시작하기만을 기다렸던 영화 <겨울여자>가 1977년 9월 27일 개봉됐다. 김추련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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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일 원작소설로 알고 있습니다.
참 소문이 무성했던 영화로 기억합니다.
그 때만 해도 그런 영화는 어른들 몰래 보는 걸로^^

ㅎㅎㅎ 저는 이본동시에서 가끔.... 그런 영화를 얻어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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