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자의 전설과 동백림 사건의 시작

in #kr5 years ago

1967년 4월 22일 한국 농구 세계 2위 동백림 사건의 시작

1999년 미국 테네시 주 녹스빌에는 ‘여자농구 명예의 전당’이 세워졌다. 여자농구 규칙을 확립한 ‘여자농구의 어머니’ 센다 에벗, 올림픽 2회 우승에 빛나는 리디아 알렉시바 소련대표팀 코치, 18세의 최연소선수로서 미국에 올림픽 은메달을 안겼던 리버만 클라인 등 쟁쟁한 여자농구 선수와 지도자 26명이 헌액된 가운데 한 명의 동양인이 버티고 있었다. 이름은 박신자.... 그녀에 대한 소개는 다음과 같다. '당대 아시아 최고의 여자농구선수', '1967년 세계선수권에서 한국을 준우승으로 이끌며 MVP를 차지한 선수', '1979년 세계선수권과 1988년 서울올림픽에 행정가(administrator)로 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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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생으로 그 시절에 흔했던 자(子)자 이름을 가진 박신자는 가히 농구 천재였다. 한국 농구의 원로 이성구는 박신자를 처음 봤을 때를 선명하게 기억했다. “1954년 박신자가 중학생 때였다..... 너무 농구를 잘해서 ‘반해 버렸다’. 당시 숙명여고선수단이 홍콩 원정경기를 가졌는데 중학생인 박신자의 플레이는 눈부셨다. ‘농구때문에 세상에 나온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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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여고를 졸업한 박신자를 이제나저제나 학수고대하던 팀이 상업은행 (우리은행 전신) 팀이었다. 라이벌 한국은행팀에 허구헌날 밟히던 상업은행은 여고졸업반 가운데 대어 아니 대룡이라 할 박신자를 잡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고 결국 박신자는 상업은행 유니폼을 입는다. 그것이 1959년. 첫 해에는 한국은행의 노련함에 쓴잔을 마셨으나 이후 박신자와 선수들의 기량이 무르익으면서 한국은행을 제치고 국내 최강자의 자리에 오른다. 이때 상업은행 농구팀은 장안의 화제였다고 한다. 일간스포츠 창사 기념으로 마련된 ‘박정희 장군배’ 쟁탈 동아시아 여자농구 대회에서 일본을 꺾고 우승한 것은 박신자의 상업은행팀이 오른 봉우리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박신자는 이 경기가 아닌 다른 한일전을 잊지 못할 순간으로 기억한다. ‘박정희 장군배’ 이전, 박정희 장군이 쿠데타를 착착 준비하고 있던 1961년의 이른 봄, 상업은행 팀은 일본으로 전지훈련을 가 있었다. 상업은행팀은 당시 일본 최강의 팀이었던 니찌보 히라노를 격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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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 종주국으로서 이 땅의 딸들의 태반에게 ‘자’(子)자 이름을 붙게 했던 일본을 누른 순간 어린 여자 농구 선수들은 기쁨으로 펄펄 뛰었다. “일본을 이겼다.”는 것은 평범한 승리감 이상의 기쁨이었다. 이후 어느 일본인 대학팀과도 경기를 가졌는데 경기 이후 상대팀 대학의 일본인 교수가 상업은행팀을 방문했다. 영문 모를 일본인 교수의 방문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여자 선수들은 울음바다를 이룬다. “저는 사실 한국 사람입니다.” 한국인임을 숨기고 살던 이가 현해탄을 건너 온 여자농구 선수들의 분전에 그만 울컥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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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자가 있는 한 일본은 한국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일본 농구인들의 한탄이었다. 박신자 외에도 김추자 김명자 3인방은 상업은행의 보물이었다. 이들을 주축으로 한 여자농구 대표팀이 1967년 체코 세계 여자농구 선수권 대회에 나서게 된다. 공산국가라면 불구대천의 원수 이상도 이하도 아니던 시절이었다. 또한 공산국가들도 ‘미제의 주구’ 한국을 곱게 봐 주지 않던 때였다. 참가부터 난항이었다. 일본 주재 체코 대사관에서 비자 발급을 쉬이 내주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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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어찌 해서 체코 프라하까지 날아가긴 했는데 선수단은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얼어붙고 만다. 그들을 맞이한 것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외교일꾼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여자농구 선수들에게 북한 선전물을 쥐어 주고 화장실까지 쫓아다니며 추근댔다. 남이나 북이나 비슷하게 치사하게 놀던 시절이었다. 이에 항의하던 한국팀 단장은 ‘한국의 얼굴’ 이라는 홍보책자를 돌렸다가 추방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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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차가움이 코트를 지배하던 시절, 그래도 한국팀은 흔들림없이 경기에 임한다. 14번 박신자, 한국팀 최장신 176센티미터 (애걔)의 센터는 늠름하게 경기를 이끌었고, 그 팀 후배 김추자, 김명자와 주희봉 임순화 등 제일은행 출신 선수들은 쳐다보기도 버거운 장신의 꺽다리들을 헤집고 기적을 일구기 시작했다. 스포츠에 관한한 종주국 소련을 능가하는 저력을 보였던 동독팀이 한국에 나가 떨어졌고 일본도, 유고도 이탈리아도 맥없이 자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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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의 고비는 체코전이었다. 한국팀의 기둥이던 박신자가 5반칙으로 퇴장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한국팀은 1점차로 뒤진 채 후반 막바지에 이르렀다. 경기 종료 7초전 체코의 공격. 이리저리 공을 돌리던 체코팀 선수 사이로 한 한국 선수가 날렵하게 뛰어들었다. 인터셉트. 박신자의 후배 김추자였다. 벤치의 선수고 코치고 몽땅 일어나 괴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지르는 가운데 김추자는 레이업슛을 성공시킨다. 역전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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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과의 경기에서는 어쩔 수 없이 패하고 말았지만 한국 여자 농구팀은 세계2위를 차지했다. 구기종목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아니 스포츠 전 종목을 통틀어 이만한 성적을 올린 것은 흔치 않았다. 거기에 박신자는 또 하나의 신화를 남긴다. 당연히 우승팀에 주어져야 할 MVP가 준우승팀 한국의 센터 박신자에게 주어진 것이다. 농구팀이 귀국하자 거국적인 카퍼레이드가 이뤄졌고 수만 명의 시민들이 몰려나와 꽃가루를 뿌리며 환호했다. 박신자는 그 중심에 있었다. 인터뷰 와중에 한 기자가 물었다. "후배와 농구 팬들에게 도움이 될 말을 한 마디 해주세요. 특히 성공의 비결을 말씀해 주세요" 그 때 박신자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미치는 거예요. 무엇에나 한 가지 일에만 미치는 거예요. ”

그런데 역사란 게 참 묘하다. 이 감동적인 드라마는 끔찍하고도 음습한 사건을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대회가 시작되기 직전 조선일보는 유학 중이던 이기양 기자에게 체코 입국 취재 여부를 알아보도록 했고 이기양 기자는 4월 14일 루프트한자 편으로 체코에 입국했다. 하지만 그 뒤 이기양 기자의 소식은 끊긴다. 소문과 수군거림은 수십년 동안 분분하지만 그의 행적은 밝혀진 바 없다. 북한에 납치됐을 것 같다는 설이 가장 유력할 뿐.

당시 우월한 국력을 바탕으로 유럽에서의 북한의 남한인들 포섭 작업은 활발했고 상당수 지식인들이 북한의 도움을 받으며 공부를 하거나 그 협조자가 됐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기양 기자의 실종은 그 가운데 한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켰다. 그는 귀국하여 중앙정보부에 이기양 실종과 아울러 베를린을 필두로 한 유럽에 사는 한국인들의 '사상적 혼란'을 알렸고 중앙정보부장 남산 돈까스 김형욱은 멧돼지처럼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동백림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다. 외교 관례고 예절이고 돌보지 않은 수사는 수많은 누명과 외국의 항의와 국격의 낙하를 불렀고 한국 현대사의 한 아픔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남북 모두가 조금씩은'미쳐' 있던 시대의 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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