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화영’, 내게 너무 아름다운 그녀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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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것 그대로를 보여주는 영화가 좋다. 그런 펄떡거리는 영화들은 나를 끌어당긴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가 그랬고, ‘똥파리’가 그랬다. ‘박화영’도 그런 영화였다.

박화영은 엄마에게 “개씨발 썅년아!”라고 악다구니를 하는 ‘딸’이다. 동시에 가출한 아이들에게는 ‘엄마’다. 실제로 가출한 아이들은 그녀를 ‘엄마’라고 부른다. 사실 ‘박화영’은 아이들의 엄마라기보다, ‘은미정’의 엄마다. 아이돌 지망생인 미정은 늦은 밤 화영에게 묻는다. “너 진짜 내 엄마 할래?” 그 순간, ‘화영’은 ‘미정’의 ‘엄마’가 되었다.

박화영은 엄마의 역할에 미련할 정도로 충실하다. 자신의 엄마를 “개씨발 썅년”이라고 부른 이유도, 자신이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미정은 화영이 좋아하지 않는다. 필요로 한다. 다 안다. 화정도. 하지만 그래도 화영은 미정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 '엄마'니까. 미정의 남자친구에게 폭행을 당해도, 미정의 잘못으로 낯선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해도, 그 둘의 잘못으로 살인죄를 뒤집어 쓸 상황이 되어도, 애써 웃으며 미정에게 말한다.

“니들은 나 없었으면 어쩔 뻔 봤냐(했냐)?”

세상 사람들이 박화영을 어찌 생각할지 알고 있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해서, 매력적인 외모를 갖지 못해서 생긴, 애정결핍을 엉뚱한 곳에서 미련하게 해소하고 있다고 여길 테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반응 둘 중 하나일 테다. 은정과 그 남자친구를 욕하거나, 아니면 박화영을 욕하거나. 왜 안 그럴까? 불쌍한 화영을 지독히도 이용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을 욕하거나 그럴 수 없다면, 살을 빼고 외모도 가꾸지 않는 화영을 욕할 수밖에.

영화 ‘박화영’은 화영이 (아마도) 살인죄 누명을 뒤집어쓰는 것으로 끝이 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나는 뜬금없이 화영의 20년 뒤가 떠올랐다. 그녀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박화영에 나오는 인물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사랑받지 못했기에 집요하게 자신만 사랑하려는 이들과 사랑받지 못했기에 미련하게 타인을 사랑하려는 이들. ‘은미정’은 전자이고, ‘박화영’은 후자이다.

정직하게 말하자.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우리는 ‘미정’이다. 그래서 그리도 ‘미정’이 싫은 거고, ‘미정’이 싫은 만큼, ‘화영’도 싫은 게다. 서글프게도 그것이 지금 우리의 자화상이다. 자신을 사랑하려다, 누구도 사랑할 수 없게 되어버린 존재들. ‘은정’과 ‘화영’은 각각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은정은 여전히 자신만을 사랑하느라 진정한 사랑을 하지 못한 체 삶의 공허와 허무에 시달릴 테다. 하지만 화영을 다를 테다. 그녀는 건강하고 성숙한, 그래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있을 게다. 세상 사람들이 그리도 욕했던, 화영의 미련함 덕분에.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고 거짓 자수를 하는 화영을 보며, 나는 20년 뒤의 ‘박화영’을 보았다. 찬란하게 아름다운 ‘화영’을.

누가 뭐래도, ‘박화영’은 내게 너무 아름다운 그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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