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에세이] 나의 정의론 (1)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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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를 찾아서


지난 20대 초반, 나는 내 행동 양식에 커다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누구나 맞이하는 순간이지만, 나에게도 사회 진출의 시기가 코앞까지 다가온 탓이었다. 그동안 나는 말 잘 듣는 학생으로서 주어진 길만 걸으면 되었다. 사고(思考)를 이끌어 줄 표준 교육 과정이 있었고, 잘못을 지적해 줄 어른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오롯이 나의 행동과 나의 삶을 책임져야 할 때가 된 것이었다.

나는 곰곰이 나의 과거를 돌아보았다. 나는 천성이 비굴하고 비열하면서, 자기 편의적이었다. 내가 동참한 행위의 책임을 친구에게 떠넘기기 일쑤였고, 배려를 잊고 내 기분에 따라 행동하기가 일상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신뢰할 수 없었다. 나는 결코 ‘법 없이도 살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는 내 행동의 기준이 될 만한 준칙이 절실했다. 거창한 사회 정의가 아니라, 내 일신을 바르게 운신할 규범이 필요했다. 오히려, 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기는 쉬우나, 현재 내가 취해야 할 행동을 정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이야 일제의 부역자들을 거침없이 비난할 수 있지만, 그 당시 제국주의의 국제적 흐름 속에 살고 있었다면, 나는 과연 항일(抗日)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 최소한 부정의(不正義)라고 생각할 수는 있었을까. 그리고 지금도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조직 내의 악습들을, 앞으로 나는 거부할 수 있을까. 내 비루한 인성에 비추어, 그대로 두었다가는 작은 아이히만이 되어 평범한 악을 저지르며 살아갈 것만 같았다. 나는 이 위기감 속에서 당장 내 행위의 준칙을 마련해야 했다.

마침, 이 시기에 우리 사회에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크게 유행하였고, 나 역시 내 고민과 맞물린 이 책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물론 마이클 샌델의 책은 사회의 정의에 대하여 생각하는 법을 제시하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개인의 행동을 규율할 방침을 정하는 데에도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준칙의 후보들


샌델은 정의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그것은 ‘최대 다수 최대 행복’으로 정의되는 공리주의자유의 존중, 그리고 미덕의 추구였다. 여기에서 미덕의 추구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이어진 고대의 정치사상이라면, 자유의 존중과 공리주의는 18세기부터 사람들의 정의관을 형성한 근현대적 정치사상이었다. 흔히 보수주의, 종교적 우파와 동일시되는 미덕 이론은 바람직한 삶에 대한 탐구를 통해 정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으나, 자유시장주의로 대표되는 자유 이론은 이에 반하여 정의의 원칙이 최선의 삶이나 미덕과 같은 주관적인 견해에 좌우되어서는 안 되며, 정의로운 사회라면 각 개인의 자유를 존중해 각자의 삶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제러미 벤담 같은 공리주의자들은 다시 이를 비판하며 자유주의로부터 도출되는 자연권을 “죽마에 올라탄 헛소리”라 비웃고, 모든 도덕적 주장이 반드시 행복의 극대화를 전제하여야 하며, 도덕적 주장의 유일한 출발점은 결국 공리의 원칙이라고 역설하였다.[3] 나는 샌델이 알려준 이 세 가지 기준을 준칙의 후보로서 하나씩 검토해 나갔다.

먼저 나는, 정의를 논할 때 가장 흔하게 인용되는 공리주의부터 내 행동의 준칙으로서 적합한지를 살펴보았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공리주의는 행위의 결과를 합리적인 이성으로 헤아려 봄으로써 정의를 발견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제아무리 좋은 의도로 한 행동이다 하더라도 그 결과가 나쁘다면 이를 옳은 행동으로 평가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공리주의의 주장은 무척 설득력이 있었다. 예를 들어, 애완용으로 수입해 기르던 붉은귀거북을 방생했던 행위는, 생명을 아끼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을지는 몰라도, 하천의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잘못된 행동인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그럴듯해 보이는 공리주의의 주장은 내 행동을 규율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될 수 없었다. 나는 당장의 처신을 결정해야 하는데, 공리주의의 사고방식은 불확실한 미래에 그 정당성을 저당 잡히는 까닭이었다. 결과가 드러날 때까지 내 행동이 옳았는지를 판단할 수 없다면, 즉 미지의 미래에 행위의 기준을 둔다면, 현재의 나는 어떠한 행위도 도덕적으로 판단 내렸노라 말할 수 없게 된다. 게다가 공리주의적 판단에서, 결과라는 것도 끝이 모호하다. 새옹지마의 고사처럼 사건은 사건의 꼬리를 물고 인과관계를 형성하는데, 어디까지를 내 행동의 결과로 보아야 하는지 가늠할 수 없다. 공리주의를 따르자면 나는 죽을 때까지 정의를 입에 담지 못할는지 모른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비밀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미 특수부대원의 예를 한 번 상상해보자. 나는 해군 특수부대 실(SEAL) 소속으로 은밀히 탈레반 무장단체를 찾고 있었지만, 그만 지나가던 현지의 농부 두 명에게 목격되고 만다. 이들 농부의 목숨을 놓고 공리주의를 적용하자면, 나는 농부를 살렸을 때의 기대이익(한 명의 생명)과 죽였을 때의 기대이익(부대원이 처할 위험도 감소)을 비교하여, 농부를 죽임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고, 또 더 나아가 그들을 죽임으로써 만연해질 군 내부의 생명 경시 풍조를 들먹여 농부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으며, 이를 다시 받아 인류 불행의 원인이 지나친 인구 증가에 있으니, 농부를 제거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행위의 결과를 어디까지 확장하느냐에 따라 행위의 옳고 그름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논리는 ‘미끄러운 비탈길의 오류’라 불리며 비판받지만, 이 오류가 없다면 공리주의의 사고방식은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너무나 쉽게 긍정해 버리는 탓에, 이를 벗어나기가 결코 쉽지 않다. 다섯 명의 환자를 위해 건강한 한 명을 희생하여 신체장기를 나누자고 할 때 공리주의는 대체 어떤 논리로 반대할 수 있겠는가. 결국 공리주의는 미끄러운 비탈길 위에서 그 종착지를 확인하지 못하며, 어느 시점에서도 내 행동을 판단 내릴 수 없도록 만든다.

그렇다고 결과의 현출을 배제한 채 단순히 공리주의적 논리의 성립만으로 도덕성을 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약 이를 인정하면 우리가 결코 옳다고 받아들일 수 없는 추악한 행위조차 정의로움으로 꾸며낼 수 있게 된다. 일본은 지난 태평양 전쟁에서 잦은 학살과 갖은 만행을 저질렀으나, 여전히 동아시아의 해방과 평화를 위함이었다고 항변하며, 실제로도 동아시아의 근대화를 이끌었다고 정당화한다. 동기만을 따지는 공리주의 아래에서는 모두가 자신을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할 수 있고, 누가 무엇을 주장하든 도덕적 중립 상태를 만들어, ‘무엇이 바른가’의 문제 자체를 제거해 버린다. 이는, 내가 가진 자기 편의적 성격과 사후 합리화의 기능을 보았을 때, 절대 나를 다잡을 준칙으로 삼아서는 안될 끔찍한 사고방식이다.

(계속)


참고문헌

[1] Dawkins, R. (2007). 만들어진 신. 이한음 (번역). 경기도 파주 : 김영사 (원전은 2006년에 출판)

[2] de Waal, F. (2005). 내 안의 유인원. 이충호 (번역). 경기도 파주 : 김영사 (원전은 2005년에 출판)

[3] Sandel, M. J. (2010). 정의란 무엇인가. 이창신 (번역). 경기도 파주 : 김영사 (원전은 2009년에 출판)

[4] Sandel, M. J. (2012).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안기순 (번역). 서울 : 미래엔 (원전은 2012년에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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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공리주의이든 무엇이든지간에 언어나 행동은 그 사태를 고정(fixation?)시킬 수밖에 없죠. 평가는 그 후의 평가자의 가치관에 좌우되고요. 좋다. 나쁘다. 선하다. 악하다의 문제는 시대적 가치관에 따라 변화되지만 본질에 있어서 규정할수 없는 무언가는 있는거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그걸 자비심과 지혜로 이해했지요. 내가 한 행동의 결과가 나와 나를 둘러싼 모두에게 이롭게한다는 견지에서의 행동지침만 있을 뿐이죠. 결과에 대한 평가는 또다른 문제같습니다. 즉 자신의 행동에 대한 가치근거로써 지혜와 자비로 무장한다면 세속의 평가에 떳떳할 수 있는 용기와 확신이 생기겠죠.

주장이 아닌 단순한 제 사견입니다.

제 생각을 다시 정리해보자면, 제 자신은 그렇게 지혜와 자비로 무장되어 있지 않으니(칸트가 주장한 순수이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스스로 결론을 도출하는 '모두를 이롭게 한다'라는 식의 공리주의적 사고로는, 자기합리화 밖에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결과에 대한 평가 없이 자기 행동의 떳떳함만을 주장하는 경우로, 수많은 친일파와 독재자, 학살자들이 있어왔습니다. 자신들은 대의를 행했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 같은 도덕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될까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혜와 자비를 얻을 그릇이 안되기 때문에 더욱더 계산적인 도덕은 도덕적이지 않게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계산적인 도덕은 자비심과 지혜와 거리가 멀겠지요. 어찌보면 자신이 그릇이 작다고 생각하시는 그 시점부터가 자비심과 지혜의 시작인거 같습니다. 왜냐하면 겸손함에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그 영향에 대해 조심할수 있으니까요.

모두를 이롭게 한다는 공리주의적 사고를 주장하는 사람들속에서 위선자와 위선자가 아닌 자를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겠지요. 자신의 행동의 떳떳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이롭게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 다음 공리주의를 외쳐대는 자가당착적 오만함일 수도 있겠지요. 아마 정말로 떳떳한 사람이라면 묵묵히 비판을 감내하고 받아들이겠죠. 그 행동이 모두를 위한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나중의 비판의 부메랑도 감내할 용기가 있었을테니까요.

그래서 우리같은 보통사람이 성인군자가 되기는 어려운거 같습니다. 하지만 지향은 해야겠지요.

짤 노파심, 왕자님을 비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제 의견을 정리한것 뿐입니다.

좋은 말씀이십니다. 피터님 정말 노파심이 많으시군요ㅎㅎ 제가 항상 개의치 않고 좋아하는 거 아시면서^^

자유주의도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공리주의는 문제가 많죠 ㅎㅎ 벤담은 자폐증환자였다고 하더라고요
다음글이 어떻게 전개될지 기대가 됩니다.

벤담이 그런 병력이 있었군요. 벌써 다음글에 대한 부담이 밀려옵니다ㅎㅎㅎㅎ

아 그런가요~~^^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저도 공리주의에 대해 관심이 갑니다.

벤담이 그랬군요...
우리 아이도 훌륭하게 키워야겠네요~

그런 고급정보를 ㅎㅎ

정의란 무엇인가 책을 아주 따분하고 재미없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최근에 그 책이 왜 재미 없었는지 이유를 일부 알게 되었는데, 마이클 샌델 전공이 철학이 아니라 법학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재미 없을수밖에요 ㅎㅎ

아하 어쩐지 잘 읽히고 비슷한 생각이라했더니... 제가 법학과를 졸업한 적이 있습니다ㅎㅎ

막상 닥치면 어찌 될지 모르겠으나, 공리주의는 오늘날처럼 복잡하고 다변하는 곳에서는 그 원칙의 향기가 덜 하지는 않을까요? 하지만 항시 본인에 대한 사고를 자주 하시니 범인의 수준은 아닌듯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글에서도 적었듯 저는 공리주의가 도덕의 원칙이 될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추후 조금 더 설명해볼까합니다

네. 생각보다 말이 앞서갔군요. 실례가 안 되었기를..
다음 글 기대할께요...

아닙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의 생각일 뿐입니다. 이렇게 댓글로 소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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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리스팀해요
준칙의후보들 전까지읽음

우와! 고마워요!

아ㅠㅠ
그밑에서 부터 공리주의부터 머리아파..
학교 사회책에 공리주의라는 목차가 있고 그에 대한 정보들을 쭉ㅡ나열해 놓은걸 왕자가 복붙한거같아. 난 여기까진가봐. ㅠ.ㅠ즐거웠다. 나의 정의론. 읔. 다음 ...다음 일기에서 봐.

(찡님이 이곳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숨쉬어 찡! 숨! 안돼!!!!!!ㅠㅠ

ㅋㅋㅋㅋㅋㅋㅋ
아 찡......

공리주의는 다수결 만큼이나 부질 없죠.
특수 상대성 이론과 같이 특별한 전제와 상황을 만들면 이상적일 수도 있겠으나, 사회의 복잡성을 고려한다면, 정의의 기준으로 보기에는 어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통해서 '깨어난 정의의 왕자님'이 되실 것 같은데... 과연... 그 정의는 어디에서??? ^^ 2부로 이어집니다... 이런 느낌...ㅋㅋㅋ

재미있는 것이, 사람들은 공리주의가 정의를 논하는 방식이 아님을 동의하면서도, 논쟁이 벌어지면 꼭 공리주의를 들고와서 정의를 외치더라고요ㅎㅎㅎㅎ 공리주의를 들고오는 순간 옳고 그름을 따지자는 것이 아닌, 이해득실을 따져보자라는 것이 되는데, 여전히 공리주의는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작용하는 듯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당시에 책과 함께 동영상 강의도 모두 찾아서 봤던 기억이 나네요. 제 삶에 적용해볼 생각은 못했는데 슬립프린스님의 생각의 전개를 따라가는 것도 재미있네요. 뭐든지 어떤 이론이든지 구체적 개인의 삶에 적용해볼때 가장 흥미진진해지는것 같아요

저 고민을 할 때가 공무원이 되기 직전이었습니다. 미력하나마 공권력이라는 것을 휘두를 수 있게되는데, 단순히 지시를 따르는 것만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니, 제 처신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퇴사한 지금은 그러한 고민들만이 지적 자산으로 남아있네요ㅎㅎ

공리주의는 정책을 실행함에 있어서 정해진 집단 내에서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고자 할 경우와 같이 많은 전제조건을 만족시킨 후 고려 가능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피해를 보는 소수에 대한 고려 또한 선행 또는 후행되어야 어느정도 정당화가 가능할 듯 합니다.

동의합니다. 그래서 공리주의는 다수가 모여 정책예비평가를 할 경우에나 할만한 것이지 저 개인이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이론이든 주장이든 각각의 장점과 단점은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완벽한 사람은 없듯이 말이죠 :)
여러 이론의 좋은 점을 취합해서 각각의 상황에 맞는 나만의 이론을 정립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프린스님도 여러 이론을 다 공부해본 후, 자신에게 맞는 원칙을 정하셨겠지요? ㅎㅎ

네네, 글에서도 밝혔듯 거창한 사회 정의까지는 모르겠고, 일단 제 행동의 원칙 정도는 세우고 싶었습니다. 앞으로 제 원칙을 찾아 나가는 과정을 적어보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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