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가 되어간다steemCreated with Sketch.

in #kr6 years ago (edited)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하진 않았다. TV 대신 길게 늘어진 책장으로 책은 빼곡했지만 그걸 굳이 꺼내서 읽으려 들지 않았다. 부모가 책을 읽으면 자연스레 아이들도 따라서 책을 읽게 된다는 말이 무색할정도로 엄마는 책벌레였고 나는 밖에서 나가 노는 아이였다.

어쩌다보니 외고에 가게 되었고 프랑스어를 전공했다. 공부를 특출나게 잘하는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외고에서의 날들은 가히 잔혹했다. 밀려나는 등수, 이미 모든 공부를 마치고 온 친구들 틈에서 평범하던 나는 점점 공부에 대한 자신감도 학교에 대한 흥미도 잃어갔다. 학교는 잔인할 정도로 시험을 많이 봤고, 그 시험의 결과서를 미술시간에 쓰지도 않았던 스케치북보다 더 큰 종이에 등수를 찍어서 나눠줬다.

그렇게 다니던 학교에서 내가 유일하게 정붙였던 수업이 '프랑스어'였다. 외고에 입시만을 위해 넣었던 '프랑스어'과 였고, 왜 그 과에 지원하였냐 묻는 사람들에겐 그럴싸한 이유를 대가며 합리화시켰다. 사실은 흥미도, 재능도 없던 프랑스어였지만 말이다. 갑갑한 고등학교 생활에서 무엇인가 출발점이 같은 곳에서 배울 수 있는 과목이 유일하게 '프랑스어'이기도 했다. 선생도 학생도 대학 입시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등한시하던 그 수업만 유일하게 두 눈 말똥말똥하게 뜨고 들었던 것 같다.

남들이 다 안하는 과목만 혼자 공부하고 성적표에서 유일하게 볼 만한 등급이었던 프랑스어 덕분에 대학도 '불어불문학과'로 진학했다. 문학을 원했던 것이 아니었고, 누구나 다 그렇듯 가장 가능성이 높은 전형으로, 내 수준에 맞는 대학에 지원해서 합격증을 받아들고 대학을 다녔다. 불어불문학과 즉, 어문학을 전공하는 수업에는 정말 '책'을 좋아하는 친구가 많았다.

책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에게 문학 전공은 그닥 유쾌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때는 그래도 의식적으로 책을 읽었다. 수업시간에 다룬 책들을 두 페이지라도 읽어보려고 도서관에 갔고, 수업시간에 주워들은 작가, 작품 같은 것으로 나름 '문학'을 전공한 사람 티를 낼 수 있었다. 시험때도 외워서 찍는 객관식보다 차라리 내 생각을 풀어쓰는 서술형 답안지를 좋아했기에 인문학 수업도 찾아 듣곤 했었다. (아직도 세상에서 철학하는 사람이 제일 멋있다)

문학으론 밥벌이가 안된다는 세상 사람들의 말에 비판하며 다섯짜리 페이퍼를 제출해서 A+을 받던 나도 취업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실리를 따지고 들었다. 아무래도 프랑스어에 재능이 없고 책을 좋아하는 학문자 스타일도 아니었으며 학교에서 불어불문학으로 한가닥 하는 사람도 아니었기에 남들 다 한다는 경영학도 들어봤다. 그러다 시간에 쫒기듯 새로운 분야인 IT에 발을들이고 어느덧 6개월차 병아리 개발자가 되어 밥벌이를 하고 있다. 생활은 어느정도 안정적으로 되었으며 오늘도 카페에 앉아 9월에 접수한 SQLD 시험에서 돈을 날리지 않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다.

그러다 문득 내가 너무 바보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펼치고 나혼자 책에 대한 의문을 고민해 본 순간이 언제였는가 생각해본다. 너무 멀다. 취업 준비를 한답시고 모자랄 게 없는 전공 학점은 학관에서의 삶을 접게 만들었고 잠을 자기 위해서든 책을 읽기 위해서든 가던 도서관도 발길을 끊은지 오래다. 책을 읽지 않으니 물음이 사라지고, 책을 읽지 않으니 지식이 자라나지 않는다. 취업준비 6개월, 개발자로서의 삶 6개월, 나는 그렇게 바보가 되고 있다.

내 사고에 지식을 집어 넣지 않은 것은 아니다. C언어, 쿼리, 여신 업무, 총계정 지식 등 회사에서 물론 고마운 사람들 덕에 많은 것을 배웠다. 하지만 이는 밥벌이를 위한 필요조건이지 내 인생을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다.

언제까지 이 바보같은 삶을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이렇게 바보가 되는 것이 나의 운명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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