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나는 매년 수영복을 사 모으는 취미가 있다.

in #kr6 years ago (edited)

나는 매년 수영복을 사 모으는 취미가 있다.

별로 입을 일은 없다.

가끔 바다를 가긴 하지만 거의 겨울에만 가기 때문에,


고2때 집이 망했다.

그 전에도 비슷한 상황은 몇번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망했던건 고2 때였던것 같다.

집이 망했다고 해도 내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니고 있던 보습학원은 문제없이 계속 다닐 수 있었고,

달에 3만원 정도 받던 용돈은 학원 마치고 친구들과 군것질 하는데에는 크게 문제는 없었다.

사고싶은 문제집을 사지 못했던 것은 기억에 남는다.

집안 사정 생각 안하고 문제집 사달라 말하기에는 나름 눈치볼 나이는 됐던것 같다.

아르바이트를 했었고, 가끔 그렇게 모은 돈으로 신발 따위를 구입했었다.

절박한 사정에 비해서 그렇게까지 절박한 심정으로 공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냥 무언가를 잘 알고 행동하기에는 어려운 나이였고, 입장이었던것 같다.

공부를 조금 더 열심히 했다면 어땠을까에 대한 후회는 물론 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대학에 진학했다.

그래도 남들 다 하는건 해보고 싶었으니깐,

여름 되면 바다가고, 겨울 되면 스키장 가는게 당연한 친구들이 조금 신기했다.

대학교때는 돈을 조금 벌었다.

학비는 학자금 대출을 받았고, 번 돈은 소소한 유희를 위해서 썼다.

먹고 싶은걸 먹었고, 입고 싶은걸 샀었다.

그나마 그 시간이 지금 나의 취향을 만들 수 있었다고 본다.

'여행'

은 나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단어였다.

여행이라고 할만한 것을 가본 것은 초등학생때 가족여행으로 사이판 갔던 것 정도

중학교때 누군가 가족여행을 데리고 가 준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가 나에게 주제넘는다는 표현을 썼다.

첩의 조카를 함께 데려와준것만 해도 감사하라는 그런 의미였던 것 같은데

그 이후에 나에게 여행은 너무나 무거운 단어가 되었다.

어디론가 떠났다가 돌아오면 돌아올 곳이 사라져 있을 것만 같았다.

군대에 있을 때 좋았다.

돌아갈 곳이 없어도 된다는 사실이 좋았던 것 같다.

의식주를 걱정해도 되지 않는 경험은 생각보다 쾌적했다.

그때부터 여행 비슷한 여가를 보내기 시작했다.

여행이라기엔 조금 웃기고,

여가를 "보낼 수 있게 된" 것이 맞는 것 같다.

돈을 벌고, 저축해도 돈이 남으니 돌아다닐 수가 있었다.

전역할 즈음에는 돈이 꽤 있었다.

못해도 1년 동안 세계를 돌아다니고도 남을 만큼은 있었던 것 같다.

그 돈으로 가족들이 살 집을 구했다.

여행을 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다.

원체 그렇게 여행을 좋아하지도 않을 뿐더러 아예 선택지에서 고려해본 적이 없기에

어학연수나 워킹홀리데이를 가보지 못한 것은 조금 아쉽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전역하자마자 눌러 앉은 것은 최소한의 책임감의 발로였던것 같다.

가끔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을 하다 보면 "여행에 미치다" 라는 콘텐츠를 마주한다.

다들 그렇게 여기저기 잘 돌아다니고 사는지 몰랐다.

그렇게 너무 태평하고 즐거워 보이는 남들을 볼때면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움튼다.

그것이 나에 대한 묘한 죄책감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행복해지는 법을 잃어가는것만 같다.



나는 매년 수영복을 사 모으는 취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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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두기엔 아까운데 하나씩 꺼내 입고 포스팅 해 보심이..
풀보팅 하겠습니다. 그거 모아 여행 가즈아~~ (으헤헤 ^ㅇ^)

삭제가 안 된다는 점 때문에 한번 숙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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