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미아방지>

in #kr6 years ago



나는 하루 3시간 이상을 가족과 보내기 위해 '아주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5~6시에 퇴근하는 걸 꽤 오래 유지해왔다. 주변에서도 내가 저녁 시간의 우선순위를 가족에 두고 있다는 걸 알다 보니 자연스럽게 회사에서도 저녁 회식을 잡지 않거나 굳이 하게 된다면 내가 빠지는 걸 이해해주었다. 오후 회의가 길어지고 있으면 먼저 가라고 배려를 받기도 했다. 전에 썼듯이 이직할 회사를 알아볼 때도 이 부분에 조건이 맞지 않으면 진행을 하지 않았다. 물론 나의 우선순위가 함께하는 사람들의 우선순위와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 깊게 살피는 노력은 필요하다. 그들이 모두 '그저 좋은' 사람이라서 나를 대낮에 퇴근시키는 건 아니다. 손해 보는 사람이 없는 거래로 만들어야 한다.



일찍 퇴근해서. 그게 뭐.



사실 매일 3시간을 가족과 보낼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도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도 한동안 그냥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사실은 가족과 매일 몇 시간을 보내는가는 중요한 게 아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의 품질이다. 생각해보면 아이가 없을 때는 아내와 신나는 저녁 시간을 보내면 되었고 첫째인 아린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둘째인 아솔이가 어느 정도 혼자 활동이 가능해지기 전까지의 4년 정도는 혼자 아기를 보느라 힘들었을 아내를 위해 집으로 달려가 살림이든 육아든 닥치는 대로 달려들면 되었다. 그런데 이제 두 아이들이 다섯 살, 세 살이 되고 나니 내가 해야 할 일이 상대적으로 많이 줄어들었다.

이러고 나니 퇴근해서 집에 있는 시간의 품질이 급격히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집에 들어가서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한 후 소파에 누워서 피곤하다, 여기 저기가 쑤신다고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만지기가 일쑤였다.(피곤하고 쑤시는 건 사실이다) 그러다 대충 눈에 보이는 집안 일을 도와주고 아이들이 이렇게 저렇게 놀아달라고 하면 가급적 최소한으로 응해주다가 잘 시간이 되면 나도 그날을 정리하고 누우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뭔가 편한 듯 불편한 시간을 흘러 보내던 중, 어느 순간 우리 가족의 육아의 스테이지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자각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이젠 해야만 하는 일들이 적어졌으니 뭔가 능동적으로 양질의 저녁 시간을 모델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젝트 <미아방지>



프로젝트명인 '미아방지'는 '미술하는 아린이, 방해하는 지 동생'의 줄임말이다.(진짜 미아방지 교육법을 기대하셨다면 죄송하다) 아린이는 미술활동을 좋아하고, 나는 그림을 배우진 않았어도 그림 그리는 데 두려움은 없는 편이라 저녁 시간에 함께 할 활동으로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얼마간의 계획을 잡아 미술 활동을 시작했다. 모든 활동 레벨은 아린이에게 맞춰졌기 때문에 아솔이는 프로젝트명에 걸맞게 옆에서 방해하는 역할을 충실하고 귀엽게 감당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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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미술치료 연구에 참여했던 기억을 동원하고 내가 했던 미술 놀이의 기억들과 구글의 힘을 빌려 활동 계획서를 썼다. 부끄럽지만 계획서와 활동 기록 사진이 있는 페이퍼 링크를 공유해본다. 앞뒤로 HTP를 붙여 넣은 건 그걸로 뭔가 진단을 해보려는 의도라기보단 미술 활동을 통해 아린이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측정할 수 있는 도구를 끼워 넣고 싶은데 딱히 아는 도구가 없어서였다. 계획에 따라 재료들도 이것저것 구매해서 많이 쌓아두었다.(그래봐야 아빠 옷 한 벌 가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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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모든 미술 활동들은 아린이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활동을 종료하고 아내와 그림들을 보고 이야길 나누며, 아린이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예전에 활용했던 아동의 그림을 이해하는 프레임웍을 따라가 보았다. 내가 전문가는 아니기에 빈약한 면이 많지만 그것도 활동을 진행할 때는 잘 몰랐던 그림 이면의 메시지들을 많이 찾아내는 데 도움이 되었고 나는 아린이가 가정 안에서 더 든든하고 안전한 지지를 느낄 수 있도록 해줘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Go Further.



<미아방지> 프로젝트 동안은 미술을 가르치진 않았다. 아린이에게 도구와 재료의 특성은 알려주었지만 어떤 그림이 좋은 그림이라던가, 이렇게 따라 그려보라는 식의 가이드는 전혀 주지 않았다. 아린이가 활동 자체를 즐기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중간에 아린이가 자신의 표현 능력의 한계에 좌절할 때도 원함과 능력 사이에서 스스로 적정선을 찾도록 그대로 두었다. 의미가 없진 않은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린이가 미술 활동을 진짜 즐기기 위해서는 좋은 그림에 대한 심적 표상을 개발할 수 있도록 적정 수준의 가이드를 하는 것이 오히려 활동에 몰입하고 성취감을 느끼며 미술을 즐기는 일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최적 경험이란, 주어진 도전을 잘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목표가 명확하고, 분명한 규칙과 즉각적인 피드백이 있는 상태를 말한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몰입」, 최인수 역, 한울림, 2004, 140면.

교사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학생이 자신만의 심적 표상을 개발하여 자신의 수행능력을 직접 모니터 하고 바로잡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안데르스 에릭슨, 로버트 풀, 「1만 시간의 재발견」, 강혜정 역, 비지니스북스, 2016, 233면.



그래서 이어질 미술 활동에서는 그림을 함께 배워나가려고 한다. 그림을 딱히 배워본 적이 없는 나에게도 아마 더 도전적인 과제가 될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아린이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것과(아내와 나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했는데 아린이가 가르쳐달라고 해서 시작했다) 아솔이에게 말을 가르치는 것(귀여운 것. 아직 말을 못 한다....) 그리고 매일 저녁과 주말의 놀이를 계획하는 것 또한 재미있는 프로젝트로 이어가려고 한다. 집에서까지 무슨 프로젝트를 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10년 후 우리 가족의 모습으로 답을 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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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5살 딸아이가 있지만 아직 한글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함께 한다는것 참 어렵고도 중요한 일인것 같네요.
잘읽었습니다. 보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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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해주셔서 감사해요! 같은 나이의 딸이 있으시다니 더욱 격려가 되네요.. 이번 주말도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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