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 한고조 유방을 도운 사람들 (큰 일을 하려면 능력도 좋지만 포용력이)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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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 한고조 유방을 도운 사람들 (큰 일을 하려면 능력도 좋지만 포용력이)

전투력에서는 항우에게 졌지만 유방에게는 좋은 신하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유방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 많은 인재들을 받아들였지만 항우는 시간이 지나며 모든 인재들이 떠나게 됩니다.

항우를 도우던 책사 범증은 떠나고 맹장인 팽월과 영포는 유방에게 가고 자신 휘하에 있던 한신은 유방에게 가서는 대원수가 됩니다. 항우 휘하에서 떠난 인재 중에 진평도 있습니다. 진평은 항우 진영을 잘 알았기에 이간계를 펴서 책사 범증과 대원수 종리매를 항우로 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항우는 인재가 있어도 쓸 줄을 몰랐고 유방에게는 항우에게는 없던 친화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군사는 장량이, 보급은 소하가 전쟁은 한신이 그리고 유방에게는 내조를 하던 여후라는 부인도 있었습니다.

장량

장량의 자는 자방(子房)이고 한나라 때의 개국공신이자 군사가이다. 장량의 생졸 시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지금의 안휘.호현 동남 지역의 사람으로 조부와 부친이 대를이어 한나라 소후와 선혜왕의 오대에 걸쳐 재상을 지냈다. 진나라가 한나라(전국시대)를 멸망시킨이후 한나라의 회복을 도모하며 자객들과 교류를 맺고 박랑사에서 진시황을 살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실패하여 하비로 도망치게 되었는데 다리 위에서 우연히 만난 황석공으로부터 『태공병법(太公兵法)』을 얻었다고 한다. 진나라 말기 농민전쟁 중에 무리를 모아 유방에게 나아가 중요한책사가 되었다. 초한(楚漢)의 전쟁기간 동안 "6국의 후대를 세우지 말 것, 영포, 팽월과 연합할것, 한신을 중용할 것" 등의 계책을 내놓았으며 또한 남쪽의 항우를 정벌할 것과 초군을 섬멸할 것을 주장하여 유방이 항우를 이기고 한 왕조를 건립하는 데 커다란 공로를 세웠다. 한 왕조의 건립후 유방은 그를 유후로 봉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량(張良)이 은거한 장가계 (중국문화답사기 2 : 형초지역의 도원지몽을 찾아서, 2004. 7. 7., 다락원)

소하

장쑤성 패군 풍현 출생. 한신.장량.조참과 함께 고조의 개국공신이다. 진(秦)나라의 하급관리로 있으면서, 일찍이 고조 유방이 무위무관일 때부터 접촉을 가졌다.

유방이 진나라 토벌의 군사를 일으키자 종족 수십 명을 거느리고 객원으로서 따르며 모신으로 활약하였다. 진나라 수도 함양에 입성하자 진나라 승상부의 도적문서를 입수하여 한(漢)나라 왕조 경영의 기초를 다졌다.

한나라 유방과 초나라 항우의 싸움에서는 관중에 머물러 있으면서 고조를 위하여 양식과 군병의 보급을 확보했으므로, 고조가 즉위할 때에 논공행상에서 으뜸가는 공신이라 하여 찬후로 봉해지고 식읍 7,000호를 하사받았으며, 그 일족 수십 명도 각각 식읍을 받았다. 뒤에 한신 등의 반란을 평정하고 최고의 상국에 제수되었다. 재상 시절 진나라의 법률을 취사하여 《구장률(九章律)》을 편찬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하 [蕭何] (두산백과)

한신: 성역소하 패역소하 (成亦蕭何 敗亦蕭何)

한신이 공을 세운 것도, 뒤에 기만당한 것도 모두 소하 때문이라는 뜻으로, 성공도 실패도 모두 같은 사람의 소행이라는 말.

成 : 이룰 성 亦 : 또 역 蕭 : 성 소 何 : 어찌 하
敗 : 패할 패 亦 : 또 역 蕭 : 성 소 何 : 어찌 하

홍매가 편찬한 《용제속필》에 나오는 말로, 한신이 소하의 경호원에게 살해된 것을 후세 사람들이비유한 것이다. 한신은 회음 사람으로,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학문과 무예를 게을리하지 않고 오직 자신을 단련시켜 기회를 노렸다. 초나라의 항우가 회음을 지나가자 한신은 그에게 가담하여 여러 번 계략을 제안하였으나 번번이 수용되지 않았다. 실망한 한신은 자신을 중용할 것이라고 믿어 유방에게 가담하였다.

그러나 항우와 큰 차이가 없음을 안 한신은 동료와 술로 고민을 달랜 와중에 모반을 도모하였다는이유로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이때 한신은 사형 집행관인 하후영에게 “한나라 왕은 천하를 원하지 않는구나. 나와 같은 장수를 죽이려고 하니”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하후영은 한신이 평범한인물이 아님을 알고 유방에게 사형을 면해 주도록 주청하여 사형을 면할 뿐만 아니라 치속도위가되었다.

이때 승상 소하를 알게 되었고, 소하는 한신이 큰 인물임을 알고 그를 삼군을 통솔한 대장에 천거하였다. 그러나 유방이 내키지 않음을 알아차리자 한신은 부하들을 데리고 도망쳤다. 하후영과 소하가 한신을 뒤쫓아 가서 겨우 설득하여 다시 데리고 왔다. 소하는 유방에게 재차 한신을 대장에임명할 것을 진언하였고, 유방도 이에 동의하였다. 대장에 임명된 한신은 유방의 천하 통일 사업에빛나는 공적을 세웠지만 이후 유방은 초나라 왕에 봉해진 한신이 권력에 야망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여 왕이 아닌 제후로 좌천시켰다.

유방과의 관계가 더욱 소원해진 것이다. 유방이 진희를 토벌하기 위해 출정한 직후 한신이 진희와내통하고 있다고 어떤 이가 여후(유방의 황후)에게 거짓으로 알렸다. 여후는 소하와 대책을 논의한끝에 한신을 죽이기로 결정하였다. 소하는 경호원에게 입궐하는 한신을 체포하여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후세 사람들이 이를 가리켜‘성역소하 패역소하(成亦蕭何 敗亦蕭何)’라고 하였다. 성역소하 패역소하는 소하로 말미암아 한신이 때로는 출세하기도 하고, 결국은 살해된 것을 가리켜 만들어진 고사성어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성역소하패역소하 [成亦蕭何敗亦蕭何] (두산백과)

조참

패군 출생. 원래 진나라의 옥리였으나, 유방이 거병하자 그를 따라 한신과 더불어 주로 군사면에서활약하였다. 몸에 70여 군데의 상처가 있으면서도 진군을 공략하여 한나라의 통일대업에 이바지한공으로 건국 후에는 평양후로 책봉되고, 그 후 경포의 반란 등을 평정하였다. 고조가 죽은 뒤에는공을 다투던 소하의 추천으로 그 대신 상국이 되어 혜제를 보필하였다. “소하는 정연한 법령을 만들고, 조참은 그를 이어받아 준수하며 청정한 정치를 하였다”는 뜻의 노래가 당시 시정에 있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참 [曹參] (두산백과)

여후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부인으로 중국 산동성 단현에서 출생하였다. 성 여(呂)씨이고 자는 아후, 이름은 치이다. 부친 여공은 패현에서 유방과 친분을 맺었으며 그 인연으로 유방을 알게 되었다. 당시 말단 관직에 무명의 유방과 결혼하여 중국 천하를 통일하는 평정사업을 도왔고, 유방이 항우를물리치고 한나라를 세우는데 내조하였다.

여후는 한나라를 세우는데 공헌하였던 한신과 팽월 같은 명신을 제거하는데 앞장섰다. 여후의 이런계략이 한나라가 안정적인 통치권을 유지하는데 기여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유방이 한고조가 되어 12년 만에 죽자 어린 아들 혜제를 즉위시키고 실권은 자신이 잡았다. 실권을 잡자 한고조가 총해했던 후궁 척희를 죽였고 아들인 유여의도 독약을 먹여죽였다.

혜제가 23세의 나이로 죽자, 혜제의 후궁에서 출생한 여러 왕자들을 차례로 등극시키면서 황제의권한을 대행하였는데, 자신의 친족인 여씨 일족을 고위고관에 등용시켜 사실상의 여씨정권을 수립하였다.

여후는 유방의 총비 척부인의 수족을 자르고 변소에 가두는 등 횡포를 자행하였는데 이런 여후의행동으로 폭정을 행한 여인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유씨만을 후왕으로 책봉하라는 유방의 유훈을 어기고 동생 여산, 여록을 후왕으로 책봉하였는데 이것이 유씨 옹호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여후가 죽자 곧 여씨 주멸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이 여씨의 난(실제는 미수에 그쳤다)이며, 여씨 정권은붕괴하고 고조의 차남 유항이 즉위하여 문제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여후 [呂后] (두산백과)

번쾌

시호 무후. 패(沛: 江蘇省 沛縣 남동부) 출신. 원래 개고기를 파는 미천한 신분이었으나, 유방의거병 뒤에는 그를 따라 무장으로서 용맹을 떨쳐 공을 세웠다. 홍문의 회에서, 유방이 항우에게 모살될 위기에서 극적으로 유방을 구해내었다. 유방이 즉위한 뒤 좌승상·상국이 되었으며, 그 뒤 여러 반란을 평정하였다. 무양후로 봉해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번쾌 [樊噲] (두산백과)

진평

허난성 란카오현 출신이다. 처음에는 항우를 섬겼으나, 이후 유방의 진영으로 옮겨가 한나라 통일에 공을 세웠다. 그는 계략에 뛰어나 항우의 책사였던 범증이 쫗겨나게 모략을 꾸몄고, 항우 휘하의 대장군으로 실력자로 평가받았던 종리매에 대한 신임을 잃게하였다. 이러한 진평은 유방의 신임을 받았으며 고향의 호유후에 임명되었다. 그후 곡역후로 승진하였고, 상국 조참이 죽은 후에는 좌승상이 되어, 여씨의 난 때에 주발과 함께 이를 평정한 후 유방의 아들 문제를 옹립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평 [陳平] (두산백과)

팽월

진나라 산양 창읍 출신이다. 진나라 말기 각지에서 봉기하여 군웅들이 할거하자 스스로 봉기하여군사를 일으켰다. 초나라 항우를 만나 그의 군사가 되었다. 하지만 항우가 자신의 공로을 인정하지않는다고 생각하여 반란을 일으켜 유방에게 투항하였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휘하에서 항우의 보급로를 공격하는 등 특히 후방에서 항우 진영을 괴롭혔다. 그는 유방의 휘하에서 여러차례 무공을 세웠으며 특히 해하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한나라의개국공신이었지만 그 공을 인정받아 제후국의 왕으로 봉해졌다. 하지만 병상에 누워있다 징병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여태후(유방의 처)의 모함을 받아 유방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팽월 [彭越] (두산백과)

문제

전한의 제5대 황제(재위 BC 180~BC 157). 이름 항. 묘호 태종. 고조의 넷째아들. 여씨의 난이 평정된 후 태위 주발, 승상 진평등 중신의 옹립으로 즉위하였다.

고조의 군국제를 계승하고, 전조.인두세를 대폭 감면하였으며 이러한 정책은 사회와 경제를 발전시켰다. 또한 자신이 직접 농업을 장려하는데 솔선수범하고 농지의 조세를 12년 동안 면제하였다. 문제는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였는데 화려한 건물를 신축하지 않았고 자신은 검정색 비단을 입었다.가혹한 형벌을 폐지하였으며, 흉노에 대한 화친정책 등으로 민생안정과 국력배양에 힘을 기울였다. 문제가 죽고 그의 아들 경제가 즉위하여 선왕의 정책을 잘 이어 나갔다. 중국사에서 문제와 경제(景帝)의 치세를 '문경의 치(文景之治)'라고 부르며 풍요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칭호로 사용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문제 [文帝]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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