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경칠서: 울료자(尉繚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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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칠서: 울료자(尉繚子)

《울료자》의 저자 울료자의 이름을 놓고 ‘위료자’와 ‘울료자’가 대립하고 있다.중국의 사전 《사해》는 위를 wèi와 yù로 표시하고 yù 부분에 울료(尉繚)를 예시하고 있다. 《사해》는 ‘울료자’ 명칭의 배경을 이같이 설명해놓았다.

“성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름은 료다. 위나라 대량 출신으로 진나라로 들어가 유세했다. 진나라 최고의 군정장관인 국위에 임명된 까닭에 ‘울료’로 부르게 되었다.”

당초 벼슬이름을 좇아 ‘위료’로 부르다가 이후 성씨로 굳어지면서 ‘울료’로 불리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울료자가 실존인물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한 증거가 없다. 사적에 알려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기》 〈진시황본기〉에 나오는 기록이 전부다.

울료자에 관한 논란은 기본적으로 《한서》와 《사기》가 서로 다른 울료자를 언급한 데서 비롯되었다. 《한서》 〈예문지〉는 ‘제자략, 잡가류’의 목록에서 《울료자》 29편을 언급하면서 그 아래에 6국시라는 반고의 주를 덧붙여놓았다.

학계에서는 반고가 말한 6국시를 기원전 4세기 중반의 전국시대 중기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사기》 〈진시황본기〉는 진시황 10년에 울료자가 천하통일에 관한 방책을 진언했고, 진시황이 그를 중용했다고 기록해놓았다. 사마천이 말한 진시황 10년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기 16년 전이다. 약 100년 사이에 2명의 울료자가 존재했던 셈이다.

울료자를 전국시대 중기의 인물로 간주하는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점을 논거로 제시하고 있다. 먼저 《울료자》의 첫 편 〈천관〉의 첫머리가 '양혜왕문울료자왈’로 시작되고 있는 점이다. 기원전340년 양혜왕은 도읍을 안읍에서 대량으로 천도했다. 시기적으로 반고의 6국시와 일치한다. 나아가 원문에 청신언, 신문, 신이위 등 군신 관계를 일관되게 드러내고 있는 점은 울료자가 양혜왕 때 활약했음을 보여준다.

토지불임(土地不任), 민류불친(民流不親), 무비불수(武備不修), 법도폐이(法度廢弛) 등의 표현도 당시 위나라의 실상과 부합한다. 언급된 인물 대부분이 전국시대 초기까지 활약한 사람이다. 위나라에서 군사전략가로 명성을 떨친 오기를 자주 언급하고 있다. 이런 점 등을 감안할 때 울료자는 양혜왕 때 활약한 인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진시황 때의 인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먼저 《사기》 〈진시황본기〉의 기록이 울료자의 행적과 관련된 유일한 기록인 점을 내세운다. 나아가 원문 가운데 군대의 편제에 관한 부분은 진시황릉에서 발굴된 병마용의 배열과 거의 일치하고, 군법이나 군령도 진나라의 색채가 뚜렷하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울료자》를 전국시대 위나라에서 활약한 울료자의 저술로 보는 것이 주류다.〈천관〉의 첫머리에서 ‘양혜왕’ 운운하고 있는 기록이 가장 큰 이유다. 광서 3년(1877)에 간행된 《무경칠서회해》도 같은 입장에 서 있다.

“울료자는 위나라 출신으로 귀곡자의 수제자였다. 음양의 이치에 밝고 병법에 조예가 깊었다. 전한 말기 유향은 〈별록〉에서 울료자가 상앙을 숭상했다고 말했다.”

상앙은 진효공 때 재상으로 있으면서 변법자강을 실현했던 인물이다. 울료자가 상앙을 롤모델로 삼았던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울료자》를 보면 엄정한 법령과 군령, 완벽한 제도 정비, 신상필벌의 중요성을 강조한 대목이 자주 등장하는 등 법가의 색채가 짙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법가뿐만 아니라 유가와 도가, 심지어 묵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자사상을 포괄하고 있다. 반고가 《울료자》를 잡가류에 넣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방연과 손빈은 물론 유세가인 장의와 소진의 스승으로 알려진 귀곡자는 전설적인 인물이다.울료자가 그의 제자였다는 이야기는 더욱 믿기 어렵다. 다만 전국시대 말기에 《울료자》가 출현한 것만은 확실하다. 실존인물로 간주할 경우 진시황 때의 사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싶다.

사마광은 《자치통감》을 편제하면서 울료자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실존 여부에 회의적인 입장을 드러낸 것이다. 실존인물로 간주할지라도 해당 인물을 반드시 《울료자》에 등장하는 것처럼 양혜왕과 병법을 논한 주인공으로 단정할 수도 없다.

그 어떤 사서도 양혜왕이 울료자와 병법을 논했다는 사실을 언급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같이 볼 경우 울료자의 활동시기와 관련해 《한서》와 《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양혜왕 또는 진시황 때의 인물로 간주하는 것 또한 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전국시대 말기에 이미 《손자병법》과 《오자병법》을 비롯한 여러 병서가 존재했고,그 중 하나가 바로 《울료자》였다는 사실이다. 병법에 관한 관심이 최고조를 이루었던 시기에 《울료자》라는 명칭의 병서가 존재했고, 울료자에 관한 전설이 뒤따라 만들어진 것이 거의 확실하다. 〈진시황본기〉에 울료자가 진시황을 두고 “인덕이 부족하고 호랑이와 이리 같은 마음을 가졌다” 운운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사마천이 진제국의 흥망을 전후로 하여 만들어진 무수한 전설 가운데 하나를 그대로 인용했을 공산이 크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울료자의 실존 여부가 아니라 《울료자》의 내용이다.

《울료자》가 세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북송 신종 원풍 연간이다. 북송 조정은 《울료자》를 ‘무경칠서’의 일환으로 편찬한 뒤 무과에 응시하려는 사람들이 반드시 읽도록 했다. 현존 《울료자》 24편의 원전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남송 이래 여러 학자가 《울료자》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는 곧 《울료자》의 진위(眞僞) 논쟁으로 비화했다.

고대 문헌 가운데 최초로 《울료자》를 언급한 것은 《한서》 〈예문지〉다. ‘제자략, 잡가류’에는 《울료자》 29편이라고 되어 있으나 ‘병서략, 병형세류’에는 31편으로 기록되어 있다. 나아가 남송 때 무경칠서의 일환으로 편제된 《울료자》는 24편으로 되어 있다. 남송 이래 여러 학자가 어느 것이 진본인지를 놓고 서로 다툰 이유다. 학자들은 무경칠서에 수록된 《울료자》 24편의 문체가 고전 문헌과 다른 점 등을 논거로 들면서 위서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원래 《울료자》는 존재하지 않았고, 후대인이 울료자를 가탁해 지은 위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이 청대까지 주류를 이루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서 속의 울료자 (무경십서, 2012. 9. 28., 역사의 외침)

울료자의 특징

오자(오기)와 울료자(울료)는 중국 전국시대의 병법가이다. 《손자병법》의 손자에 비해 생소하기는 하지만, 《오자》 《울료자》 모두 송나라 때 편찬된 《무경7서》에 《손자병법》과 함께 나란히 올라 있다.《오자》와 《울료자》 모두 현존하는 내용이 많지 않아서인지, 책은 작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병법서라고 하면, 군대를 움직이는 방법이나, 적을 속이고 이길 수 있는 술책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오자》와 《울료자》도 군대를 움직이는 법, 각종 전투에서 위기상황을 헤쳐 나가는 법 등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사람과 조직을 움직이는 법’,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다.

예컨대 위나라 무후가 “진을 치면 반드시 안정되고, 수비에 들어가면 반드시 견고하며,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방법”을 묻자, 오자는 이렇게 말한다. “유능한 자를 윗자리에 앉히고 무능한 자를 아래에 두실 수만 있다면 진지는 안정됩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마음 놓고 생업에 종사하며 관리들에게 친밀감을 느끼게만 한다면 방어 태세는 견고해 집니다. 또 백성들이 모두 주군을 옳다 하고 이웃 나라를 나쁘다 여기게 할 수만 있다면 전쟁은 이미 승리한 것입니다.”

울료자 역시 “옛말에 이르기를 훌륭하고 유능한 인재를 기용하면 시운을 따지지 않고도 매사가 순조롭고, 법령이 분명하면 점을 치지 않아도 좋은 결과를 얻게 되며, 유공자를 우대하고 수고한 자를 보살피면 하늘에 기원하지 않아도 복이 온다 했습니다”라고 말한다.

기업이나 국가나 적재적소에 인재를 쓰고, 직원/국민들의 경제생활을 안정시키며, 자기 회사/체제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때, 그 존속과 발전이 가능하다는 얘기겠다.

울료자도 이렇게 말한다.

“왕도정치가 행해지는 나라는 국민을 살찌우고, 패도정치가 행해지는 나라는 군대를 살찌우며, 명맥만 유지하는 나라는 관리들을 살찌우고, 망해가는 나라는 군주의 창고만 살찌우는 법입니다. 따라서 위만 채우고 아래에서 새나가는 나라는 환난이 닥쳤을 때 구제할 길이 없습니다.”

울료자는 좀 더 직설적으로 “적과 싸워서 반드시 이길 자신이 없으면 싸운다고 말하지 말고, 공격해서 반드시 탈취할 자신이 없으면 공격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밖에도 《오자》와 《울료자》에는 지휘관의 솔선수범,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에 대한 국가의 적절한 보훈을 포함한 신상필벌 등 조직을 이끌어나가는 데 필요한 좋은 얘기들이 많이 있다.울료자가 “극형은 신분이 높은 자일수록 엄격하고, 포상은 신분이 미천한 자를 우선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기억할 만한 얘기다.

하지만 《오자》와 《울료자》를 읽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인간에 대한 격려와 신뢰였다. 사람이 죽고 살고, 국가의 흥망이 걸린 전쟁에서는 요행을 바랄 수 없다. 오자도, 울료자도 이 사실을 잘 알았다. 그들은 일을 이루는 것은 결국 인간이라는 것을 믿는 철저한 인본주의자들이었다.

오자는 “천문이나 일시를 따지는 것은 사람이 할 일을 다 하는 것만 못하다” “황제께서 말하기를 ‘귀신에게 빌기 전에 자신의 지혜를 짜내라’했으니, 천문이다 방위다 하는 것도 사실은 사람의 일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울료자 역시 주나라 무왕이 3만 군사로 수십만 은나라 대군을 무찌른 얘기를 하면서 “여기에는 무슨 상서로운 징조나 기이한 현상도 없었으니, 오직 사람이 할 일을 다 했느냐 못했느냐에 따라 그렇게 된 것일 따름”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건 새삼스러운 얘기는 아니다.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던 ‘진인사대쳔명(盡人事待天命)’이 바로 이 얘기이기 때문이다.

《울료자》의 사상적 특징은 크게 4가지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다.

첫째, 정치군사 차원이다. 《울료자》는 정치적 조치를 군사적 승리의 전제 조건으로 내걸고 있다.〈병담〉의 대목이다.

“토지가 비옥한지 척박한지 여부를 헤아려 도읍을 세운다. 토질에 따라 성의 규모를 고려하고, 그 규모에 따라 사람의 수를 결정하고, 사람의 수에 따라 식량의 정도를 판단한다. 이 3가지가 잘 조화되면 안으로 견고히 지킬 수 있고, 밖으로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다.”

충분한 준비가 있어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이는 국내 정사가 안정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식량’을 언급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경제가 튼튼한 것을 전제로 한다. 여타 병서와 마찬가지로 ‘경제 → 정치 → 군사’의 도식을 제시한 셈이다. 〈병담〉의 한 대목이다.

“무릇 경작지가 넓어지고 소출이 많아지면 나라가 부유해지고, 백성이 늘어나고 법도가 잘 지켜지면 나라가 안정된다. 나라가 부유해지고 안정되면 백성이 전차를 이끌고 출정할 일이 없고, 병사가 갑옷을 입고 출전할 일이 없다. 위세만으로도 천하를 능히 제압할 수 있는 이유다.

그래서 말하기를, ‘전쟁의 승패는 조정의 결책(決策)에서 판가름이 난다’고 하는 것이다. 굳이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도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군주의 승리인 이른바 주승(主勝)이고, 부득불 군사를 움직여 결정짓는 것은 장수의 승리인 이른바 장승(將勝)이다.”

주승은 조조가 《손자약해》를 펴내면서 서문에서 부득이용병(不得已用兵)을 언급한 것과 취지를 같이하는 것이다. 장승은 《손자병법》 〈모공〉에서 말하는 “상대방을 온전히 하여 굴복시키는” 전승(全勝)에 해당한다. 〈병령〉 상에서는 주승과 장승의 이치를 문무겸전의 이치로 풀이해놓았다.

“병기는 흉기고, 전쟁은 덕정에 반하는 행위다. 모든 일은 반드시 근본이 있어야 한다. 옛날 왕도를 행한 군왕은 폭란을 토벌할 때 인의를 근본으로 삼았다. 그러나 지금 군왕은 위엄을 세우며 적에 대항할 의도로 서로 다투는 까닭에 전쟁을 그칠 도리가 없다. 전쟁은 무력을 줄기, 문략을 뿌리로 삼는다. 무력이 겉이라면, 문략은 속에 해당한다. 문무의 관계를 꿰면 승부의 큰 줄기를 장악할 수 있다.

문략은 이해득실을 살피며 나라의 안위를 판별하는 기준이고, 무력은 강적에 맞서 분투하며 공수를 펼치는 수단이다.”

둘째, 장수 리더십 차원이다. 전장에서 군사를 지휘하는 장수의 리더십은 병사의 생명은 물론 국가존망과 직결되어 있다. 군주의 리더십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21세기의 경제전쟁은 난세를 타개할 수 있는 최고통치권자의 탁월한 리더십을 요구한다. 《울료자》는 이를 한마디로 요약해놓고 있다.바로 인사다. 〈전위〉의 해당 대목이다.

“왕도를 행하는 왕국은 백성을 부유하게 만들고, 패도를 행하는 패국은 병사와 선비를 부유하게 만들고, 현상유지에 애쓰는 존국은 관원인 대부를 부유하게 만들고, 패망의 길로 치닫는 망국은 군주와 주변 사람의 창고만 부유하게 만든다. 위로 군주와 관원의 부고만 풍족하고 아래로 백성의 곳간이 씻은 듯이 비어 있는 이른바 상만하루(上滿下漏)의 상황이 빚어지면 내란과 외침 등의 병란이 빚어질 경우 구제할 길이 없다.

그래서 말하기를, ‘현명하고 능력 있는 인재를 임용하면 굳이 날을 가려 길일을 택하지 않을지라도 매사가 순조롭고, 법령을 잘 정비하면 굳이 점복을 치지 않을지라도 매사가 좋은 조짐을 보이고, 공을 세운 자와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표창하면 굳이 사당에 제사를 올리며 기도를 드리지 않을지라도 하늘의 도움과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천시는 지리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만 못하다’고 말하는 것도 이런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성인이 오직 사람이 스스로 노력하며 도모하고 행하는 인사만을 중시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승패는 결국 인재의 활용 여부에 따라 갈릴 수밖에 없다. 인재의 요체는 천하의 인재를 곁으로 불러 모아 그들의 지략을 활용하는 데 있다. 왕도와 패도, 강도(强道), 망도(亡道)는 최고통치권자의 리더십에 따른 것이다. 왕도와 패도의 분류는 순자의 입장과 일치한다. 《순자》 〈왕제〉의 해당 대목이다.

“예로써 다스리는 자는 왕자, 바른 정사를 행하는 자는 패자, 민심을 얻는 자는 안자(安者), 백성을 착취하는 자는 망자(亡者)가 된다. 왕자는 백성을 부유하게 만들고, 패자는 선비를 부유하게 만들고, 안자는 대부를 부유하게 만들고, 망자는 군주 개인의 창고를 부유하게 만든다.”

《울료자》 〈전위〉가 《순자》를 인용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울료자》는 왕도와 패도를 장수의 리더십과 연관시켜 다양한 수준의 전승(戰勝)에서 병도(兵道)의 의미를 찾고 있다. 계략을 통해 승리하는 도승(道勝), 위세를 통해 승리하는 위승(威勝), 무력을 통해 승리하는 역승(力勝)으로 구분한 것이다. 〈전위(戰威)〉의 해당 대목이다.

“무릇 용병에는 계략을 통해 승리하는 도승, 위세를 통해 승리하는 위승, 무력을 통해 승리하는 역승이 있다. 무력을 튼튼히 하면서 적정을 면밀히 살펴 적의 사기를 꺾고, 적진을 흩뜨리고, 설령 적이 진형을 유지할지라도 전투력을 상실하게 만든다. 이것이 도승이다. 법제를 잘 정비하고, 상벌을 분명히 하고, 무기와 장비를 완비하고, 백성으로 하여금 필승의 신념을 갖게 한다. 이것이 위승이다. 강력한 무력을 배경으로 적진을 격파해 적장의 목을 베고, 적의 성루 위로 올라가 쇠뇌를 쏘고, 적을 격멸해 그 땅을 차지하고, 대승을 거둔 뒤 개선한다. 이것이 역승이다. 군왕이 이런 이치를 알면 이 3가지 유형의 승리를 모두 취할 수 있다.”

전쟁의 승리를 크게 도승과 위승, 역승으로 구분한 것은 여타 병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울료자》만의 특이한 면모이기도 하다. 치도론(治道論)의 관점에서 볼 때 도승은 왕도 리더십, 위승은 패도 리더십, 역승은 강도 리더십에 해당한다. 최고통치권자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치도를 구사하듯이 장수도 상황에 따라 도승이나 위승 또는 역승을 취해야 한다는 주문이나 다름없다. 상황이 험악해질수록 도승 대신 위승이나 역승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난세의 심도가 깊어질수록 왕도가 아닌 패도나 강도를 구사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셋째, 조직관리 차원이다. 《울료자》는 군대관리의 요체를 신상필벌에서 찾고 있다. 신상필법은 병가사상과 법가사상이 접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제담〉의 해당 대목이다.

“군대는 모름지기 제도부터 완비해야 한다. 제도가 완비되면 병사들이 문란하지 않고, 병사들이 문란하지 않으면 부대의 기강이 바로잡힌다. 병사 가운데 죽기를 좋아하고 살기를 싫어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군령이 지엄하고 군법이 세밀하기 때문에 능히 그들을 돌진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싸움에 임하기 전에 포상을 분명히 약속하고, 싸움이 끝난 후 잘잘못을 가려 반드시 처결해야 한다. 그래야 적과 싸워 이길 수 있고, 용병을 하여 공을 세울 수 있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국가공동체는 물론 작은 규모의 사회공동체에 이르기까지 조직의 기율이 엄정하지 못하면 생사를 건 치열한 싸움에서 승리할 길이 없다. 관건은 공을 세운 자에게는 반드시 상을 내리고,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는 반드시 벌을 내리는 데 있다. 신상(信賞)의 ‘신’은 필벌의 ‘필’과 마찬가지로 ‘반드시’의 뜻을 지닌 부사어다. ‘반드시’를 지키지 않으면 그 어떤 조직이든 이내 와해되고 만다. 장수를 포함한 모든 지도자의 무사공평한 법집행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병가가 군대조직 및 군사운용에서 신상필벌을 역설한 것은 법가가 신상필벌을 치국의 요체로 든 것과 맥을 같이한다.

넷째 훈련 차원이다. 《울료자》는 군사훈련을 극도로 중시하면서 훈련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여타 병서 역시 장병에 대한 군사훈련을 중시하고 있지만 《울료자》의 경우는 단연 발군이다. 군사훈련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병교 상〉과 〈병교 하〉는 말할 것도 없고 〈오제령〉 〈분색령〉 〈동무령〉 〈경졸령〉 〈늑졸령〉 모두 군사훈련과 관련된 내용으로 꾸며 있다. 이에 관한 〈병교 상〉의 대목이다.

“선봉대가 적진을 돌파하고 적의 견고한 진지를 격파할 때 마치 홍수가 나 제방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거침이 없는 것은 이유가 있다. 평소 훈련을 철저히 했기 때문이다. 장병에 대한 교육훈련은 영토를 넓히고, 사직을 지키고, 우환을 미연에 제거하고, 무덕을 이루는 근원에 해당한다.”

철저한 훈련이 뒷받침되었기에 용맹무쌍한 정예병을 만들 수 있었고, 정예명이 있었기에 적의 견고한 진지를 일거에 격파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울료자》가 병사에 대한 군사훈련을 중요시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영토를 넓히고, 사직을 지키고, 우환을 미연에 제거하고, 무덕을 이루는 근원에 해당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울료자의 특징 (무경십서, 2012. 9. 28., 역사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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