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너의 결혼식›, 그리고 나의 이야기

in #kr6 years ago

잘 만든 첫사랑 영화를 보고 나면 자신의 첫사랑 얘기를 하고 싶어진다지요. 제가 지금 그렇습니다. 막 설레요. 그래서 영화 얘기를 하면서 제 얘기를 함께 해볼까 합니다. 옛날얘기를 하려니까 제가 나이 든 것 같아서, 나이 든 게 맞지만, 조금 슬프기도 하네요.

이 글에는 영화의 일부 내용과 설정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스포일러까지는 아닙니다. 영화 예고편 영상보다 약해요.

그 시절, 그놈이 좋아했던 소녀

환승희는 예쁘고 공부 잘하는 여학생입니다. 황우연은 공부에는 관심 없고 말썽이나 피우는 남학생입니다. 이런 남녀 캐릭터 설정은 커징텅(구파도) 감독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와 닮은꼴입니다. 사실은 어디서 많이 보던 캐릭터 구도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예쁘고 공부 잘하는 여학생이라는 점을 빼고 나면, 환승희는 션자이와 전혀 다른 캐릭터예요. 무엇보다 마음에 상처가 있는 아이죠. 승희는 션자이와 달리 거리낌 없이 '땡땡이'를 치기도 합니다. 그리고 승희가 두 번째로 학교 담을 넘는 장면에서는 짜릿한 해방감이 느껴집니다. 승희의 환한 표정이 압권.

커징텅은 여교사를 끔찍한 방식으로 성희롱하고, 션자이는 그 꼴을 보고도 결국 커징텅과 사랑에 빠집니다. 참아 주기 짜증 나는 설정이에요. 션자이 역을 맡은 배우 천옌시의 아름다움이 이걸 대충 넘겨 버리죠. 황우연은 그런 점에서 커징텅과 달라요. 오히려 환승희가 황우연을 색드립으로 놀리지요. 이때 배우 김영광 님의 연기가 압권입니다.

배우 박보영에 관해

저는 이 영화의 주연 배우 박보영 님의 팬입니다. 2년쯤 전에 우연히 박보영이라는 배우를 알게 되었고, 그래서 이 나이 먹고 난생처음으로 연예인 팬질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녀가 출연한 모든 작품을 감상하고 났더니 ‹늑대소년› 이후 작품부터 연기했던 다양한 배역에서 한 가지 공통점이 보였습니다.

배우 박보영은 정신적인 성장을 보여주는 캐릭터, 처음에는 자존감이 낮았다가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자존감을 회복해 나가는 캐릭터를 선호하는 듯하더군요. 이런 맥락에서 가장 이질적인 캐릭터는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의 도라희라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처음부터 자존감이 그다지 낮지 않아 보이는 도라희는, 그러나 세대 전체의 낮아진 자존감을 대변하는 캐릭터라는 점에서 완전히 이질적이지도 않아요.

‹너의 결혼식›의 환승희도 그런 점에서 배우 박보영에게 매력 있는 캐릭터였을 겁니다. 그리고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그러나 스포일러가 되지 않으려면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는 바로 그 장면에서 승희가 내리는 결단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에게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그 시점의 승희가 정신적으로 성숙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해요. (남자인 저는 환승희보다는 황우연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되지만, 이 얘기를 하려면 정말로 스포일러가 되어버리니까 참을게요.)

박보영 님은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의 감정의 흐름에 관객의 감정을 동화시키는 능력이 탁월한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관객은 그녀가 연기하는 캐릭터가 정신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위안을 받는 것 같습니다. 참 멋진 배우예요. 다만, ‹너의 결혼식›은 기본적으로 황우연의 시선을 따라가는 영화인 까닭에 환승희의 정신적 성장이 겉으로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아쉬움이 있어요.

개인적으로 박보영 님에게 한 가지 바라는 게 있습니다. 언젠가는 처음부터 자존감이 높은 사람, 그래서 힘든 일을 겪고 잠시 흔들릴지라도 결국은 꿋꿋하게 현실을 이겨 나가는 캐릭터도 연기하셨으면 좋겠어요. '도라희'가 비슷한 인물이지만, 제가 이런 맥락에서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는 캐릭터는 ‹품위 있는 그녀›에서 김희선 님이 분하신 '우아진'입니다. 중요한 순간마다 우아진이 내리는 선택이 얼마나 멋지던지요!

나의 이야기

‹너의 결혼식›은 장면 장면에 깨알 같은 재미가 대단한 작품입니다. 깨알 재미에 관해서라면 ‹너의 결혼식› 이전에 흥행했던 첫사랑 영화 ‹건축학 개론›보다 훨씬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해요. 이석근 감독님은 ‹너의 결혼식›을 만들면서 관객이 많이들 겪었을 법한 현실적인 이야기를 담으려 했다네요.

그런데 저는 사실 연애를 해본 일이 없어요. 직접 경험해 본 게 있다면 이 영화를 보면서 더 많이 공감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죠. 제 선택이었지만, 이럴 때는 좀 아쉽기도 합니다.

그 여자가 좋아했던 그 남자

A는 제 첫 번째 여자친구가 됐을 뻔했던 사람입니다. 어쩌다 친해졌고, 서로 조금씩 호감을 느끼게 됐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고 A가 생각할 때쯤 그녀가 저에게 전화를 걸어서 사귀자고 말했습니다. 저는 말뜻을 곧바로 알아듣지 못했어요. 그녀는 말을 조금 돌려서 했고, 그때의 저는 그런 말을 바로 알아들을 만큼 눈치가 빠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주 솔직하게 말해버리고 말았어요. 제 인생에 1순위는 (음악) 덕질이라고, 다른 모든 것은 그다음 순위라고요.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했습니다. 가만, 내가 지금 고백받은 건가? 헉,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전화 걸어서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나? …에라 모르겠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라고.

그때는 사람들이 핸드폰 대신 '삐삐'라는 걸 썼어요. 삐삐 번호로 전화를 걸어 음성 메시지를 남기고 단말기에는 숫자를 남기는 식이었죠. 어느 날 제 삐삐에 음성 메시지 없는 숫자 8개가 전해졌습니다. '1818'과 '4444'였지요. 누가 보냈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A에게 미안했지만, 이번에도 사과는 하지 않았습니다. 나란 남자, 나쁜 남자. 그녀는 그렇게 떠나갔습니다.

누군가와 연애를 한다는 건 그 사람과 함께 보내는 시간 만큼 내 인생의 시간을, 그 시간만큼의 '기회비용'을 투자한다는 얘기와 같습니다. 그 사람을 세상 무엇보다 사랑한다면 그 시간이 아깝지 않겠지만, 저는 그 기회비용을 기꺼이 포기할 만큼 누군가를 좋아해 본 일이 없어요. 그래서 저는 이 나이를 먹도록 연애 경험이 없습니다. 제가 노력하지 않는데 연인이 저절로 생기지는 않더라고요.

기억하나요? 당신에게 고백한 사람

‹너의 결혼식›에는 의사소통이 꼬이면서 황당한 일로 이어지는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자세한 얘기를 하거나 특정 '키워드'를 말해버리는 순간 스포일러가 되어버리니까, 이번에도 역시 제 얘기를 할게요.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평소에 TV를 거의 보지 않습니다. 요즘 어떤 노래가 인기 있는지, 연예인 누가 누구인지도 잘 모릅니다. 그때는 특히 유행어 같은 것에 둔감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눈에 밟힌다'라는 표현이 사랑을 고백하는 맥락에서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누가 저한테 그 말을 했던 적이 있다는 사실이 기억났습니다. 그런데, 언제 어디서 누구한테 그 말을 들었는지 도무지 모르겠더라고요. 그저 '밟힌다'라는 말의 어감 때문에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조금 나빴던 기억이 흐릿하게 날 뿐이었죠.

제 인생 두 번째로 고백받았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도 자세한 내용을 도무지 기억하지 못하니 좀 억울하더라고요. 누구였는지 아직도 몰라요. 그날 이후로 모르는 유행어를 알게 되면 무슨 뜻인지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곤 합니다. 때로는 일상에서 그 표현을 써먹기도 해요.

그때 이미 결혼을 해서 아이를 둘이나 낳았던 첫째 누나가 해준 얘기. 큰 조카 놈이 유치원에 갔더니, 여자아이들이 조카 앞에서 예쁜 척을 하면서 혀 짧은 소리로 '슈가'라는 걸그룹 흉내를 내더래요.

"안녕하세요? '쉬가' 아유미에요!"

그 말을 들은 조카도 평소에 TV를 볼 기회가 없었는지라 그게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다만, '쉬'라는 음소에 반응했다네요.

"엄마, 쟤들이 나한테 욕했쪄!"

사랑은 언제나 타이밍

B는 제 첫사랑이자 짝사랑이었던 여자입니다. 첫눈에 반하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그냥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느닷없이 제 마음을 깨닫게 됐죠. 아, 내가 B를 좋아하는구나.

그때쯤 제가 B를 쳐다볼 때와 비슷했을 듯한 눈빛을 또 다른 여자 C가 저에게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C가 저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저를 포함해 주위 사람 누구나 알았을 겁니다. 제가 B를 좋아한다는 사실도 다들 알면서 모른 척했을 거예요. 저는 C에게 조금은 호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B가 저를 좋아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B와 C는 절친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B가 저를 좋아하면서도 친구를 배신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정말 그랬는지는 알 수 없어요.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면 자신의 마음에 가려서 상대방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대요. 박보영 님이 출연했던 ‹힘쎈여자 도봉순›에서 인국두가 그러던데요.

앞서 말했던, 연인과 함께 보내는 시간 만큼의 '기회비용'을 처음으로 기꺼이 포기할 뻔했던 때가 이때였습니다. 그러나 하지 않았어요. B는 나중에 제 친구와 사귀는 듯한 눈치를 보이더군요. 혼자 조금 슬퍼하고 말았어요.

만약 시간을 되돌려 그 시절로 돌아가게 된다면, 어쩌면 저는 C와 연인이 될지도 모릅니다. B는 혼자서라도 좋아할 만큼 좋아해 봤으니까 괜찮아요. 그러나 C가 저를 쳐다보던 눈빛을 외면하기는 쉽지 않을 듯해요. 제 앞에서 비슷한 눈빛을 했던 여자는 그 뒤로도 몇 명 있었지만, 아직도 미안한 마음이 남을 만큼 애절한 눈빛을 했던 사람은 C뿐입니다.

C를 승희라고 부를게요. 승희야, 그때 내가 네 마음 받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 시절 추억을 소환하는 방법

‹너의 결혼식›에는 주연 배우 또래 관객이 공감할 법한 추억의 소품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이 빠진(또는 약한) 듯해요. 영화 ‹건축학 개론›의 중요한 성공 요인이라 할 수 있을 '추억의 그 노래'입니다. 음악이 추억을 소환하는 힘은 물성을 가진 소품과는 차원이 다르죠.

굳이 추억을 소환하지 않더라도, 이를테면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에서 허무맹랑한 장면을 얼렁뚱땅 넘어가게 만들고 관객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움직이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음악입니다. 영상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음악 앞에서 현실성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어 버려요.

‹너의 결혼식›에서도 음악이 나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승희가 짧게 흥얼거리는 노래, 승희를 위해 우연이 부르는 노래, 그리고 결정적인 장면에서 승희가 듣는 노래. 그러나 음악을 활용하는 방식이 여러모로 아쉬워요. 현실성을 잘 살렸을지는 몰라도 음악 자체의 강력한 힘을 연출에 충분히 활용하지는 못했죠. 제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가장 큰 단점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너의 결혼식›에서 가장 임팩트 있는 음악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나오는 음악입니다. 배우 박보영 님이 부른 노래예요. 이 음악이 영화 중간에 효과적으로 활용되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박보영 님이 자신의 노래 실력을 부끄러워하는 까닭에 OST 부르기를 여러 번 고사했었다고 하니 감독님으로서는 하고 싶어도 가능하지 않은 선택이었겠죠.

박보영 님의 노래에서 드러나는 발성의 기술적 한계는 뚜렷합니다. 본인이 그걸 잘 아는 모양이에요. 그러나 영화 OST 녹음 정도는 괜찮으니까 조금 더 용기를 가지셔도 됩니다. 사실 괜찮은 정도가 아닙니다. 목소리 자체의 매력이 기술적 한계를 메우고도 남아요.

스포일러 아닌 스포일러: 그녀가 부른 엔딩 OST

시사회를 보고 집에 와서 마음이 설레서, 뭐라도 써야지 싶어서 OST 얘기를 써서 그녀의 팬카페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뒤척였습니다. 그때 썼던 내용을 재활용할게요.

영화관에서 듣고 집에 와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첫 가사는 아마 '있잖아'였지 싶어요. 여기에 붙은 세 음이 곡 전체의 씨앗이 됩니다. 아마도 음이 '솔라시'였을 거예요. 제가 절대음감이 없어서 틀렸을 수도 있는데, 확실한 건 온음씩 상행하는 음형이었다는 것. 화음은 으뜸화음입니다. '솔라시'가 맞다면 곡의 조성이 G장조가 되는 셈이죠. 그러나 여기서는 그냥 C장조로 옮겨서 쉽게 생각해 보죠. 그러면 '도레미'가 됩니다.

으뜸음 '도'로 시작해 온음씩 상행하는 '있잖아' 음형은 영화 내용과 자연스럽게 공명합니다. 이 음형은 아우프탁트(못갖춘마디)에 위치하고, 그다음 박부터가 정박이 되죠. 노래가 정박으로 시작하면 안정적이고 계획적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게 그렇게 시작되는 게 아니겠죠.

또 만약 '도레미'가 아니라 '미파솔'이었다면, 그러니까 반음 올라갔다 다시 온음 올라가는 음형이었다면, 화음은 도미넌트(딸림화음)가 됐거나 도미넌트 화음을 향하는 강한 방향성을 가졌을 겁니다. 이건 사랑이 제법 진행됐을 때에 어울릴 법한 음형이에요. 그러나 '있잖아' 음형은 첫사랑을 시작하는 연인을 위한, 설레는 시작 느낌을 담은 음형입니다. '있잖아, 내 말 잘 들어봐. 너의 여자친구로서 내가 너에게 바라는 건 이런 거야.'

노래가 흐르면 '있잖아' 음형의 음정 관계에 온음이 아닌 반음이 섞이기도 하고, 으뜸화음이 아닌 다른 화음이 따르기도 합니다. 그러다 결국은 스포일러인 듯 스포일러 아닌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너의 결혼식› 참 재미있습니다. 꼭 보세요. 8월 22일 정식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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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영화소개해주는 프로그램을 보다가 우연히 알게되었는데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느낌이 물씬나지만 캐릭터는 확연히 달라보이더라고요. 은근히 끌리고 있었는데 이렇게 리뷰를 해주시니 꼭 보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반갑습니다. 영화 정말 재밌습니다. 글 맨 밑에 별 다섯 개 보이시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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