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가장 따뜻한 색 블루, 2013>

in #kr6 years ago (edited)

<본 리뷰는 영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장 폴 사르트르)



이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이다.
영화에서는 실존의 속성이 어떻게 변화하는가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진다.

미술과 철학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이루고 있는
사상적 배경이 무엇인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영화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했던
'아델'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다니는
이야기이다.

그녀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남자와 사랑을
나누기도 하지만 왠지 모를 슬픔에 잠겨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고한다.

자신이 지금 사랑을 나누고 있는 남자보다
꿈 속에서 만난 이름모를 동성에게
더욱 성적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델은 자신의 성적 정체성
확인하고, 자신이 진정으로 만족 할 수 있는
사랑을 찾아 나선다.


카메라

영화에서는 화면 가득 얼굴을 비추는 기법을 사용한다.
풍경이나, 다른 사건들에 대해서 보여주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앵글은 아델과 다른 인물들의
얼굴을 가득 채워 보여준다.

이러한 앵글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점인
인물들의 감정변화를 뚜렷하게 보여준다는
특징이 있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거나, 남몰래 눈물을
흘리는 아델의 심경변화를 관객들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감독이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아델이 어떤 상황에
처하느냐가 아니라
세밀한 부분에서 아델이 느끼는 감정이
어떻게 변화되느냐인 것이다.

아델은 섬세한 성격을 가진 미성숙한
자아로 표현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녀가
느끼는 미묘한 감정변화를 그녀의
눈과 입술을 통해 충분히 관찰할 수 있다.


마리안의 일생

극 중에서 아델은 '마리안의 일생'
좋아하는 책이라고 소개한다.

무심코 지나가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마리안의 일생과 아델은 닮은 점이 있다.

<마리안의 일생>에서 마리안처럼 결국
아델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려지게 된다.

아델이 '엠마'를 진정으로 사랑할 준비가
되었을 때는 엠마에게 다른 사람이 생기고 난 이후였다.

마리안이 자신이 겨우 탈출할 수 있었던 수녀원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처럼
아델 역시 엠마의 전시회에서 빠져나와
자신을 받아줄 곳이 있을 만한 어디론가로 떠나가며
영화는 끝이 난다.

이성애자냐, 동성애자냐와는 전혀 관계없이
비극적인 사랑의 결말이 내놓는 슬픔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마리안과 아델은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사랑이 낳은 슬픔을 몸소 체감하며
쓸쓸한 마지막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사르트르와 순수미술

영화는 철학과 미술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등장인물들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아델의 여자친구였던 엠마는 순수미술을
하는 미술학도이고, 철학에 관심이 있다.

그녀가 하는 순수미술은 실용성보다는
'절대적인 미의 추구', 미술 존재의 '실존적 개념의
추구와 표현'
을 특징으로 한다.

마찬가지로 엠마가 좋아하는 사르트르는
존재는 본질에 우선한다는 생각을 가진 철학자이다.

그녀가 추구하는 순수미술과 실존주의는
'본질'로 정의되는 사회의 원칙을 깨뜨리는 것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우리가 어떤 중요한 원칙이 없이도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한 사르트르의 말처럼
엠마는 사랑에 대한 통념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녀는 동성애자이면서, 자신의 사랑하는 여자의
아이까지도 사랑할 정도로 자유분방한 사고를 지녔다.

흔히들 사랑이라 정의내린 이성 간의 사랑에 대해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순수미술과 같은 모습의 사랑을 추구하는
엠마에게 아델이 끌리는 것은 당연하다.

문학을 좋아하지만 책에 대해 지나치게 분석할 때
책이 재미가 없어진다고 말했던 아델 역시
내면의 자유분방함을 종속하는 사회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아델은 본질에 얽매이지 않는 엠마의 모습에 끌려
실존으로써의 사랑을 추구하게 된다.

엠마와 사랑을 지속하면서 아델은 많은 변화를 겪는다.
꿈보다 직업이나 현실을 중요시하는 자신의 부모님과는
대조적으로 엠마의 부모님은 하고 싶은게 무엇인지를
아델에게 묻는다.

엠마가 본질에 얽매이지 않게 된 것에는 부모님의
영향력이 큰 것처럼 보인다.

아델은 엠마와 지내는 시간이 깊어질수록
자신이 싫어하던 굴을 먹게되고, 예술가들을 만나며
자신이 하고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에곤쉴레와 클림트

엠마와 아델이 행복한 연인관계를 지속하는 도중에
문제가 발생한다.

엠마의 친구들을 불러놓은 파티에서 나누는
대화에서 그들이 비극적 관계로 결말을 맺을 것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엠마는 에곤쉴레보다 클림트의 작품을 더욱 좋아한다고 말한다.
쉴레의 작품은 난해하고, 어둡고, 병적인 작품을 주로 그린다는
이유에서다.

클림트의 작품이 화려하고, 장식적이라는 동료의 말에
그녀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아마 엠마의 인생은 쉴레보다는 클림트와 가까운 삶을
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머리를 파랗게 물들이고, 화려한 옷을 입고 사는 그녀는
평범한 옷을 입고, 눈물이 많은 아델과는 다른 미적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결국 쉴레의 작품과 같은 아델의 모습은, 엠마에게는
병적이고, 나약하고, 어두운 삶으로 보여질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결국 서로 다른 형태의 '미'를 추구하게
될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델은 엠마에게서
처음 사랑에 빠질 때의 '순수미술'과 같은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음에 외로워한다.

그녀는 엠마가 자신의 부모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녀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게 된다.


입술과 실존

카메라 앵글이 주로 인물들의
얼굴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말했다.

또 영상에서는 그들의 입술을 주로 조명하고 있다.
무엇인가를 먹거나, 햝거나, 키스를 하는 등
그들은 입술을 통해 자신들의 감정을 표현한다.

프로이트가 리비도를 설명할 때
구강기를 통해 리비도가 발현된다는 것을
예시로 들었듯 입술이 보여주는
그들의 마음은 관객에게 야릇하게 다가온다.

그저 가만히 스파게티를 먹거나,
맥주를 마시는 것에 사랑을 표현하는
눈빛이 더해져 그것 자체가 하나의
애정행위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프로이트는 리비도가 충족되지 않을 경우
'불안'으로 변한다고 설명한다.
이 불안은 사르트르의 자유와도 관련이 있다.

엠마의 사랑을 못 받고 있음을 알게 된
아델은 불안을 느끼게 된다.
그 불안은 곧 자기정립의 필연성을 낳게 되고
이것은 자신이 동성애자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한다.

그녀가 남자가 외도를 하는 것도
실존이 본질에 앞서기 때문이다.

엠마가 자신보다 다른 여자를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
아델 역시 더 이상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틀에 박혀있지 않고, 남자를 만나며
자신의 실존을 검증해보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리비도가 구강기를 시작으로
계속 변화하듯, 사르트르의 실존 역시
변화를 지속한다.

엠마와 아델이 한 때 연인이었다는 것은
더 이상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것은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의 한계는 누군가 특정할 수 없고,
누구에게나,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열려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자신에게 막말을 하는
친구에게 아델은 화를 낼 수 있고,
레즈비언이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에 대해
검열을 하는 전시회 관계자에게 엠마는
소리지를수 있다.

그들의 사랑의 형태, 사랑의 한계를 정하는 것은
오로지 그들 자신 뿐이다.

사르트르가 한 세대의 지적혁명을 가져왔듯이
''미적 추(醜)'가 미술사에서 많은 영향력을 미치듯
그들의 사랑의 모습은 통념에
어떤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 영화는 동성애를 외설적이거나, 저속하게 담지 않았다.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표현되지만,
그것은 가벼운 육체적 쾌락이라기보다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서로의 존재에 대한
애정을 담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섹스'를 하고 있다기보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이라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그들이 행하는 육체적 행위뿐만아니라
그들의 눈에서 우러나오는, 입술에서 느껴지는
애틋함이 있기 때문이다.

감독은 이 영화가 외설적이고, 자극적이게
소비되기보다 '아름답게' 표현되었으면
하는 것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순수미술과 사르트르가 세상의 인식에
변화를 가져온 것처럼 엠마와 아델의 사랑은
사랑이라 정의 내려진 모든 형태의
욕망에 다양성을 부여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사회적인 굴레를 만들어
정해진 길 대로 가야할 것처럼 만든다.

아델은 결국 다른 남자친구 혹은 여자 친구를 찾아
사랑을 하게 될 것이다.

그녀에게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한 일이다.

엠마의 전시회에서 그림의 주인공이
다른 여자로 바뀌었던 것처럼
그녀는 항상 주인공 일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순수예술'이고, 사르트르의 '실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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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0회 짱짱맨배 42일장]4주차 보상글추천, 1,2,3주차 보상지급을 발표합니다.(계속 리스팅 할 예정)
https://steemit.com/kr/@virus707/0-42-4-1-2-3

4주차에 도전하세요

그리고 즐거운 스티밋하세요!

짱짱맨 감사해요 ㅎㅎ

잘보고 갑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너무 잘 읽었어요. 영화의 모든 요소들이 억지스럽지않게 개연성을 넘어 깊게 스며들어있었다는 게 리뷰를 통해 느껴지네요. 리스팀할께요 :)

반갑습니다 ㅎㅎㅎ 잘읽어주셨다니 기분이 좋네요
앞으로도 자주 뵈요! ㅎㅎ

정말 좋은 리뷰네요 잘봣습니다.
실존주의, 분석심리학,에곤실레,성.
모두 개인,실존에 집중했던 동시대의 주제들이죠

외설적이고, 자극적이게
소비되기보다 '아름답게' 표현되었으면
하는 것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는 평이 이 영화를 잘 대변해 주는 것 같습니다.
영화의전반적 흐름을 본 듯해요
@tak님 첨 뵙고 팔로해요..ㅎㅎ 또 뵈어요

감사합니다 ㅎㅎㅎ저도 맞팔할게요
자주 소통해요!!

이 영화를 보고 이 리뷰를 꼭 다시 읽고 싶어지네요 :)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ㅎㅎㅎㅎ자주뵈요

평론가들의 영화리뷰 ||| ... 이 포스팅은 @li-li의 프로젝트, [Link & List] 에 선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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