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리뷰 (스포주의)

in #movie7 years ago (edited)

1.히든카드를 너무 빨리 꺼내든 것 아닌가? 하지만 진짜 히든카드는 따로 있었다.

[러브레터], [지금 만나러 갑니다], [초속 5센티미터] 등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일본 로맨스는 항상 특유의 향기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역시 문학산업이 발달한 나라여서인지 로맨스에도 문학적, 판타지적 요소가 많이 묻어나온다는 것이고, 둘째는 남녀간의 순애보가 굉장히 순수하게 그려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본 로맨스의 특성상 연출이 잘 이루어지면 폭넓은 매니아층을 확보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현실과 다른 이질감이 확 올라와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는 관객들이 일본 로맨스 특유의 이질감을 느끼는 순간 연출자 스스로 실마리를 제공함으로써, 극의 단점이 될 수 있는 요소를 한 층 더 깊은 장점으로 승화하는 영화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는 세계관부터 서로 다른 시공간을 공유하는 두 남녀를 전제로 하고 있다. 특히 눈에 띄었던 건 그동안의 로맨스 영화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평행세계를 배경으로 했다는 것이다. 보통 평행세계를 다루는 로맨스물은 극의 결말에 풍부함을 더하기 위한 용도로 마지막에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 영화 속 두 남녀는 상상력에 의한 추상적인 평행세계가 아니라 실제로 평행세계에 살아가고 있으며, 아예 극의 중반부터 이 세계관의 정체를 관객들에게 드러내놓는다.

이런 흐름은 히든카드를 너무 빨리 공개해버린 꼴이 되어서 자칫하면 극 후반의 힘이 빠져버릴 수 있는 위험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히든카드는 평행세계가 아니다. 시간의 엇갈림을 통한 두 주인공의 운명적 인연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 영화의 진짜 히든카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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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스쳐 지나가는 게 아니야. 끝과 끝을 이은 원이 되어 하나로 이어지는 거야’

스무살의 30일, 그 중에서도 거의 중간에 이르는 시점에 에미는 타카토시에게 진실을 이야기한다. 자신과 타카토시의 시간은 반대로 흐르고 5년에 1번씩만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진정한 히든카드는 다른 요소에 있음이 밝혀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불편한 느낌을 지울 순 없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둘의 사랑은 완전히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이며, 그녀 자신은 미래의 타카토시가 건내 준 일기장대로 30일을 보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운명의 장난으로 한 여자가 자신 때문에 삶을 버리고 대본대로 살아가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2. 꼭 일기장대로만 해야 하는 거야?

이에 대해 감독은 관객들의 의중을 파악이라도 했다는 듯, 남주인공을 통해 그 심리를 그대로 표출한다.

‘꼭 일기장대로만 해야 하는 거야? 그럴 필요 없이 죽을 위기에 닥쳤을 때만 서로 구해주면 안 되는 걸까?’

타카토시는 자신이 믿었던 사랑이 대본에 의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견딜 수 없었고, 급기야 에미에게 관계의 청산을 암시하는 말까지 한다. 그저 서로의 존재가 없어지지만 않게끔 생사에만 관여하면 안 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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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장 중요한 장면은 타카토시가 저 발언을 했던 다음날 새벽에 벌어진다. 뒤늦게 에미의 진심을 깨닫고 타카토시는 새벽에 전화를 건다.

‘너의 기준으로 내일, 나는 너에게 심한 말을 할 거야. 그렇지만 이제 확실히 극복했어. 단순한 일이었는데. 네가 그렇게나 좋을 수가 없어서였어.’

이 말은 즉, 타카토시가 에미에게 ‘꼭 일기장대로만 해야 하는 거야?’라고 물어보았을 시점에 에미는 타카토시가 새벽에 말했던 진심을 알고 있었다는 소리가 된다. 물론 타카토시는 새벽에 자신이 그런 말을 할지 모르는 상태다. 이런 지점에서 이 장면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보면 아마 색다른 감정이 느껴질 것이다.

무엇보다 새벽에 타카토시가 진심을 말하는 장면이 중요한 이유는, 이 장면 이후로 두 인물의 입장이 바뀌게 되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타카토시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하나씩 알아나갔다면, 이제부턴 에미를 위해 타카토시가 진실을 말해줘야 하는 입장이 된다. 30일이라는 시간의 끝을 알면서도 말이다. 관객들이 하나 둘씩 훌쩍이기 시작하는 시간도 이 무렵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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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의 곁으로, 끝내 다다랐다

가장 젊은 물리학의 분야 중 하나인 양자역학에서는 ‘얽힘’이라는 현상을 말하곤 한다. 이 현상에 따르면 어떤 두 존재는 동떨어진 시공간에 있더라도 특정 물리값에 의해 확률적으로 서로 영향을 줄 수 있다. 처음 양자역학의 이러한 현상이 세상에 공개됐을 때, 대부분의 학자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 했다. 떨어져있는 물체가 서로 영향을 준다는 것은 물론이고 특정 물체의 확정적인 운동법칙이 확률적으로 일어난다는 것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아인슈타인도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며 양자역학을 부정했다. 하지만 최근에 이르러 양자 얽힘은 과학실험으로 대부분 사실임이 증명되었다.

이렇게 영화 이야기를 하는데 양자역학 이야기를 갑자기 하는 것은, 이 영화에서 말하는 사랑이 정말 그런 점에서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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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살의 에미가 25살의 타카토시를 만났을 때 공간은 같은 공간이었지만 그 시간은 분명 동떨어진 시간이었고, 20살의 에미가 동갑의 타카토시를 만나러 가는 것은 사실 확률적인 이야기다. 에미는 굳이 타카토시를 보러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35살, 25살의 타카토시가 줬던 사랑에 의해 에미는 타카토시를 운명적으로 만나러 가게 된다. 타카토시 역시 마찬가지다. 35살, 30살의 에미가 주는 사랑에 얽혔기 때문에 전철 안에서 타카토시가 첫 눈에 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게 타카토시에게 데자뷰였든 뭐든 말이다.

그렇게 다른 시간 속에서 서로를 위한 사랑으로 얽히고 또 얽혀서 끝과 동시에 시작을 다시 만드는 게 이 영화다.

‘그의 곁으로, 끝내 다다랐다.’

‘매일 등교하는 전철 안에서 난 당돌하게도,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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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er Up! 음~? 흥미로운 포스팅이군요.

  • from Clean STEEM activity supporter

와 영화 평론가 하셔도 되겠습니다
분석과 설명이 참 친절하네요
자세한 설명 잘 보았습니다

과찬이십니다 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이 영화 재밌게 봤어서,
shyuk님 리뷰 꼭 보고싶었어요 ㅎㅎ

아이고 감사합니다 ㅎㅎ

사진만 보아도 눈물이 납니다. 잘 읽었습니다.
저는 소설의 이 원문이 좋았습니다.
마지막 장면입니다.

에미는 문을 넘어가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흐름을 잘 타야 한다. 목표로 하는 곳에 가야만 한다.
파도를 타고, 에미는 정장이나 교복을 입은 사람들에게 가로막힐 뻔하면서도 힘을 내서 차량 안쪽으로 나아갔다.
가는 방향의 틈 사이로, 손잡이를 쥐고서 혼자 의욕에 넘치는 눈빛을 한 남자아이가 보였다.
그리고

ㅡ 타카토시 .
그의 곁에 도달했다.

역시 추상적인 표현은 소설이 훨씬 입체적이네요. 좋은 구절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가끔 일본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사람이라 글 남기고 갑니다~첫문장에 언급하신 영화와 애니를 봤던터라 더 반가운 맘이들어요. ㅎㅎ 기회되면 위 영화도 한번 보고싶네요.

첫문장에 나온 영화들을 좋게 보셨다면, 이 영화도 좋게 보실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시간 있으시면 한 번 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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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시간소재 영화가 너무 많아서 큰 관심이 가지 않았는데,
포스팅을 보니 이 영화, 봐야겠네요. ^^

팔로잉하고 가요~ ^^/

팔로잉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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