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일기 18.6.27

in #secret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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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처음 일기를 쓰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와 같다. 내 속을 꺼내놓기 위해 원래 내가 끄적이던 곳으로 돌아가자니 영영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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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도 나름 단단한 마음을 먹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지만, 그것을 읽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결국 간과할 수 없었다. 내 속을 쏟아내면 그만이던 혼잣말은 점점 부연설명이 생기는 일(러바치)기가 되어갔고, 꾸미는 것이라곤 외모든 방구석이든 영 소질이 없는 내가 숨구멍인 일기를 다듬고 있자니 제풀에 지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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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글쓰기 기능을 염원하던 입장에서, 사실 글을 읽는 사람이 줄어드는 것이 싫지만은 않다. 볼 때마다 떨어져있는 보상액에 도대체 누가 보팅을 취소한건지 신경 썼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쓰다보니 3번은 읽는 사람을 염두한 글이 되었다. 이왕 그렇게 된 것, 이 일기는 ‘비밀일기’ 라서 나만 아는 내용을 두서없이 늘어놓게 될 것이다. 수수께끼냐, 스무고개냐 어려워하지 마시고 몰래 읽고 가셔도 된다. 나 역시 누군가 읽었다는 사실에 부끄러워 댓글을 못본 척하게될 지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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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알 남지 않은 렌즈를 끼고 총총 걸어 스벅까지 왔다. 요즘 날씨가 어떤지 통 몰랐는데, 습하긴 해도 아직은 선선하구나. 어디든 나가야해서 집 밖으로 나왔던 적이, 전에도 있었지. 나만 뺀 모두가 나를 걱정하던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나는 그렇게 빈둥대는 것에 아무런 불안함도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유로를 마저 쓰고, 다음달 방세를 친구에게 빌리고 나서야 나의 위태로운 아늑함을 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있던 차림 그대로 슬리퍼를 질질 끌고 집 밖을 나와 쏟아지는 햇살에 주눅들지 않으려 애써 고개를 꼿꼿이 들고선 cadet 역을 향해 걸어갔다. 사람들이 더 많고 더 분주한 쪽으로. 목적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쉼없는 발걸음 속에서 나 혼자 한참을 우두커니 서있었다. 집이 어딘지 기억을 잃은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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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웃는 사람들도 다 뻥같아. 다들 사는 게 얼마나 지겹고 힘이 들까.

그 말에 나는 얼마나 행복을 전파했던가. 세상이 얼마나 살만한지,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린 거라고 설득하고 싶었다. 그때의 내가 지금 내 앞에서 그러고 있다면 그래, 너 밝고 긍정적이야. 평생 온실 속에서 행복한 채 살아라. 하고 쏘아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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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어떻게든 살고 있다는 걸 느끼고 싶었다. 집 앞의 작고 조용한 카페를 지나 굳이 여기까지 온 것은. 앉은뱅이처럼 주저 앉아 있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걷다 지치면 앉아서 쉬기도 하는 거라고. 모래 늪에 서서히 빠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눈치챌 줄 알았더니, 발이 불에 활활 타오르는 것을 보며 이 불길이 얼마나 진실되며 아름다운지를 찬미하고 있다니. 내 발이 타들어가는 아픔같은 건 외면한 채.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인지, 겁이 나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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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가고 싶은데, 이렇게 떠날 수는 없다. 하나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 한 방울이 이미 마음 속에 번지고 있고, 살면서 지금처럼 여행이 필요했던 순간이 있었나도 싶다. 어, 있었을 거야. 잊었다고 해서 그렇지 않았던 게 아니니까. 삶에 지칠만큼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아니 지치고 말고 할 일상조차 없는데. 여행에 정당한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지만, 왜 이토록 떠나고 싶은가. 모든 것이 허락되고 용서되는 특별한 시공간에 피해있고 싶은 거겠지. 됐고, 그냥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 제주도에 왜 혼자 가려느냐는 엄마에게, 혼자가고 싶으니까! 마음이 급해 소리치고 말았다. 같이 가자고 하실까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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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만 해도 감사한 마음으로 기꺼이 나의 시간을 가족을 위해 썼다. 그러려고 한국에 돌아왔던 거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 떠날 거니까. 다시 나의 삶을 살거니까. 그런데 지금은 타의 반, 자의 반으로 투명인간이 되어 쓸모있는 흉내만 낼 뿐이다. 진저리 나는 죄책감이나 덜어 내려고. ‘할 것이다’ 의 뽀송뽀송한 솜털같은 마음은 ‘해야 한다’ 의 무겁고 축축한 이불 빨랫감이 되었다. 방향을 잃고 말았구나. 다음 여정을 알지 못한다는 게 마냥 낭만적일 때가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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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에서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어. 한국에 오기 싫었다. 그래서 그때 올린 글도 다 그 모양이다. 그런데 왜 돌아 왔을까. 왜 다시 돌아가지 않았을까. 돌아가기도 싫었다. 아무래도 8,9 번은 페이아웃 전 삭제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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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 누가 가장 부러운가, 로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고자 했던 때가 있다. 아무도 부럽지 않은 지금은 전혀 소용이 없다 (생각해보니, 꿈이 있는 사람이 부러운데 이것도 소용없지 않은가). 이제는 나의 결핍을 찾는다. 사람은 누구나 과거의 결핍을 채우려고 살아가는 것 같아서. 외로웠던 사람은 사랑을 찾고, 가난했던 사람은 돈을 찾고, 속박당했던 사람은 자유를 찾아 떠나는 게 아닐까. 아.... 속박을 당한 적은 없는데. 살아야 한다는 것 자체가 속박인지도 모르겠다. 죽을 때까진 살아야한다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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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쓰고 나니 또 염려가 든다. 축 늘어진 마음 뚝뚝 흘리고 있는 것 같아도 실은 별 일 없다. 별 일이 없으니 이러는 거다. 힘내라는 댓글이 달릴까봐 덧붙이는 말이다. 결국 그저 힘없는 사람으로만 보이기는 싫지 않은가. 힘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나를 직접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런데 이렇게 써놓고도 의문이다. 원래의 나는 어떻더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가면 갈수록 모르겠다. 스팀잇을 하고, 여기서 알게 된 사람들을 직접 대면한 이후 더 그렇다. 글과 말에서 드러내는 나의 성격이 이렇게 달랐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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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것도 좀 보고, 별 일도 좀 만들어 볼까 했지만, 선물받은 음료수를 마시고도 싶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아이스 카라멜 마끼아또. 그런데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이수점인가 사당점에서 이미 누가 썼다고. 그래도 그 당시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마음만으로도 배불리 잘 먹었소. 그리고 카라멜 마끼아또. 평소에 마시던 건 아니지만 다른 음료로 바꾸시겠냐는 말에 아니라고 했다. 달달한 거 먹고 기운내라고 했으니까. 기타소리도 나는 너무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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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있던 차림 그대로 슬리퍼를 질질 끌고 집 밖을 나와 쏟아지는 햇살에 주눅들지 않으려 애써 고개를 꼿꼿이 들고선 cadet 역을 향해 걸어갔다.

솰아있네!ㅎ 영화에서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감수성 풍부한 여자 주인공이 등장하는 장면 같네요^^

스프링 솰아있네! You are zzang...

<영화에서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감수성 풍부한 여자 주인공이 등장하는 장면 같네요>

온라인 상에선 그렇지만 과연 오프라인에선...
Yes You are..

메가님은 그 영화에서 주인공 옆에 늘 꼭 붙어 있는 동네 언니!?ㅋㅋ 밤마다 동네 계단에 앉아 캔맥주 마시며 같이 웃고 우는~~!
메가님이 주인공인 영화에선 봄님이 주연급 조연ㅎㅎ

ㅋㅋㅋㅋ 솰아있었군요! 그놈의 삶을 진지하게 고민만 하다가 세월 다 갈 것 같아서 말이죠. 그래도 파리에선 사람들이 쳐다만 봤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선 적선을 받은 적도 있었군요! ㅋㅋㅋ

여행이 다니고 싶은건 꿈이 있는게 아닌가요 ^^ 절대로 위로하고 싶지 않습니다 ^^

절대로 위로하고 싶지 않은 일인 여기 또 있습니다 ㅎㅎ

와아. 첫문장에도 정신이 번쩍 났는데, 두번째 문장에서도...

‘할 것이다’ 의 뽀송뽀송한 솜털같은 마음은 ‘해야 한다’ 의 무겁고 축축한 이불 빨랫감이 되었다. 방향을 잃고 말았구나. 다음 여정을 알지 못한다는 게 마냥 낭만적일 때가 있었는데.

2주 후면 퇴사한지 2년째 되는 날이예요. 그 당시 사진을 보니 지금보다 어리고, 당당하고, 예쁘게 꾸미고 있어 마음이..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당시엔 일에 지쳤고, 외로웠더라구요. 그래서 후회는 없습니다. 다만 방향은 빨리 찾고 싶어요.

저는 요즘 그냥 그대로를 보고 싶습니다. 좋은게 있으니 나쁜게 있고 천국이 있으니 지옥이 생기듯이 행복을 갈구하다 보니 불행도 있는게 아닌가 싶어 저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냥 있는 그대로를 온전히 느끼고자 합니다.

이번엔 또 몇 번의 수정을...내일 다시 올게요. ㅎㅎㅎ
저도 빨랫감 많은데 너무 많이 쌓여서 엄두가 안나 고개를 못 돌리겠다는...

어? 내가 분명 pc로 댓글 달았는데 핸폰에는 왜 안나옵니까. 핸드폰으로 타자 치기 어렵네요. 나도 집에 가서 다시 달아야지...

아직 8,9번이 살아있군요.
댓글 올라가는 거 끝까지 지켜봐야 한다구요. ㅎㅎㅎ
어제도 나오시고 오늘도 나오시고 그래서 별 일 좀 만드셨습니까.

알림기능 꺼버리는 악명높은 수정으로 알려져있던데...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ㅋㅋㅋ 빨아야할 것들이 많군요. 비누거품 잔뜩 내서 뜨거운 물로 빡빡 빨고 있는 힘껏 짠 뒤 탁탁 널어 햇빛에 바짝 말립시다.

라고 안올라간게 그대로 남아있군요 ㅋㅋㅋㅋ

장마를 핑계로 빨래는 잠시 미뤄두는 걸로 하겠습니다.

고래와난다요도 한모금 마시라고 빨대를.....ㅋㅋㅋ(주인 잘 만난 듯...?) 봄땅님은 이미 매력 만땅.......잇몸미소 또한...그러고보니 저팔계 웃음...또한....ㅋㅋㅋㅋㅋ그러니 무겁고 축축한 이불빨래감 무시하고...해맑게 하고픈거 눈치보지말고 하는걸로....!(카르페디엠...)

오 일부러 빨대 맞춘걸 알아봐주다니 역시 엉엉 ;ㅁ; 고래와난다요가 잘먹었다고 전해달래요 (소곤소곤) ㅎㅎㅎㅎ >ㅁ< 더럽고 축축하고 무거운 빨래는 빡빡 빱시다! 깨끗하고 맑고 자신있게! :D

ㅋㅋㅋㅋㅋㅋ.....클린앤클리어가 좋아하고있...이불 빨래는 같이해야 무릎 관절이 삐지지 않습니다:D

비밀에 제가 모르는 다른 뜻이 있나 잠깐 고민했어요..ㅋ
8.9번 삭제되기 전에 복붙을 해놓을까 하다가 참습니다.(악역은 하나로만.ㅋ)
제주도 한번 다녀오시길~~ 다른 것도 아닌 송도 아닌 바다에서의 기분전환이 제일 필요하신 거 같은데 ^^
송도가면 정말 고기 사줍니까? 송도에서 고기 먹고 술 먹고 택시타면 고기값보다 비쌀까요?ㅎ

복붙ㅋㅋㅋㅋ 이렇게 철저하게 나오실 겁니까. 제주도는 일단 미뤄두었어요. 마음같아서야 요르단과 이집트로 달려가고 싶지만... 부모님이 부산에 내려가신 덕분에 며칠 혼자 보냈더니 숨통은 좀 트이더라구요. 나이 먹고 얹혀 사는게 자랑이 아닌데 비밀일기니까요 :) 송도 오신다면야 드시고 싶은 거 사드리지요 ^_______^

저기압일땐 고기앞으로... 댓글 보다 생각난 문구 ^^

이것 또한 과거가.되면 그냥 웃을수 있는 일이 될 것임.

과거야 되면... 그땐 웃을 수 있는 건가요...
ㅋㅋㅋ 노랑 우비옷은 언제나 저를 웃게 합니다. 6개월 전에도 그랬어요.

봄님, 제가 아무에게도 직접적으로 초청한적은 없는데, 혹시 시간되시면 살롱에 와주실 수 있나요?ㅎ 봄님은 직접 만나보고 싶어서 혹시 하고 여쭤봐요..ㅎ

https://steemit.com/kr/@idea-list/-6-30-7-1

경아님! 초청해주셔서 정말 영광이예요 :) 게스트란 단어에 방송인 줄만 알았더니 아니었군요. 말주변은 없지만 경아님 (P님과 오쟁님도! 실은 라운디님과 스모모님도..) 과 살롱 모두 알고 싶은데... 이번 행사는 참여가 어렵게 되었답니다 :( 언젠가 만나뵐 날이 꼭 오겠지요?

봄님 답변주셔서 감사해요ㅎㅎ 아쉽지만 언젠가 만나게 되리라 기대하고 있을께요 :-) 오늘 좋은 하루 되시구여!!

고마워요, 경아님 :) 댓글 확인하셔서 내용을 조금 수정했어요. 오늘도 설레는 하루 되세요!

비밀일기라길래 몰래몰래 봐야할 것 같은 느낌입니다 ㅎㅎ
그래도 달달한 마끼아또드시고 기운내시길! :)

그래퍼님이 말씀하시니 마끼아또가 모히또로 들리는 이유가 뭘까요 ㅎㅎㅎ 비밀일기 읽은 것도 비밀로 해드리겠습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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