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도 인정한 항일운동, 조국은 인정하지 않았다

in #steemzzang2 months ago (edited)

국가보훈부가 독립유공자로 지정한 이들은 현재 1만 8018명이다. 이번 3·1절
에 포상을 받은 103명이 포함된 숫자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분들
이 15만 명이 넘는다면, 1만 8018명은 너무 적은 숫자다.

독립운동가들을 찾아내지 못하는 게 아니다. 대한민국은 국가의 책임을 방기
하고 있다. 항일운동가 이제국의 사례가 말해주고 있다. 조선총독부 작성으로
추정되는 신상카드가 존재한다. 그는 1916년 5월 1일 지금의 서울 종로구에서
출생한 인물이다. 신상카드에는 25세 때인 1941년 3월 1일에 찍은 사진이 실
려 있다.

신상카드에 따르면, 키가 154cm이고 그의 죄명은 항일운동의 결과물인 보안
법 및 육군형법 위반죄 외에도 전과가 더 있었다. 절도죄 전과 2범과 공무집
행방해죄 1범이 있었다. 이제국은 보통학교 5학년이자 15세 때 생계곤란으로
학교를 중퇴했다. 그로부터 2년 뒤 1933년 8월 22일, 17세 나이로 경성지방법
원에서 절도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절도 전과 2범이 된 그가 공무집행방해죄까지 추가해 전과 3범이 된다. 경성감
옥에 수감 중이던 그는 우연히 항일투사 오동진(吳東振)을 만난다. 절도죄와 같
은 파렴치한 죄로 처형되기보다는 오히려 조선 독립운동과 같은 범죄를 하여 처형됨을 숙원으로 해야 한다고 타일렀다.

출소한 이제국은 같은 동네에 사는 중학생들에게 접근했다. 오동진과의 인연을 설명해주면서 그들을 탄복시켰다. 형무소에서 배운 운동권 노래부터 가르쳤다. 일본이 패망할 것이며 조선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라고 웅변했다. 학생 대중을 동참시켜 조직 확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일본 유학 중에 이제국과 비슷한 방식으로 항일운동을 한 윤동주도 징역 2년을 받았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형량 중에서 가장 높은 것이 징역 3년인 점을 감안하면 이제국과 윤동주가 받은 형량은 무거운 편이다.

국가보훈부는 2022년에 조남권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하면서 항일 그룹을 조직하고 지도한 이제국을 빼놓은 것이다. 일제 재판부는 조남권보다 무거운 형량을 이제국에게 선고했다. 일제도 인정한 이제국의 항일운동이 대한민국에서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한때의 비행 청소년이 항일운동에 뛰어든 것은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이 그만큼 널리 확산돼 있었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한국 독립운동의 품이 넓었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본문 이미지: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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