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90년대 모습, 교동시장

in #tripsteem5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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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금붙이를 사려면 교동시장에 가는 게 제일 낫다고 한다. 가격이나 품질이 어떤지는 모르겠고 귀금속을 취급하는 가게가 대구에서는 가장 밀집되어 있다. 가족행사로 황금열쇠(부루마블 아님)가 필요해서 주문을 넣었다가 찾으러 들른 교동시장.


대구역과 붙은 롯데백화점을 내려와 길을 건넌다. 우선 주문했던 금붙이를 찾으러 간다. 다섯돈 황금열쇠가 120만원 가량. 선금 20만원을 제하고 나머지 백만원을 지불하려는데 현금으로 하면 5만원을 깎아준단다. 단, 현금영수증 불가, 계좌이체 불가. 월급쟁이 입장에서 이런 가게는 밉다. 할인해줘서 고마운 게 아니라 내게 이런 선택의 입장에서 고민하게 만드는 게 싫고 소득신고를 누락하여 세금을 포탈하는 느낌이라 더 싫다. 왠지 그 탓에 월급쟁이 세금이 갈수록 늘어나지는 않을까 하는 묘한 피해의식 때문이다.

나는 심보가 뒤틀려 그냥 신용카드를 꺼낸다. 아내가 옆에서 기겁하며 입을 벙긋거린다. 아마도 '5만원 차이인데 이걸 그냥 카드로 한다고?'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아, 그럼 내겐 선택권이 없다.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아이 손을 붙잡고 밖으로 나와 현금인출기를 찾는다. 아내는 이 말을 잊지 않는다. '싸장님, 저희 멀리서 왔는데 현금까지 뽑아오느라 힘들 것 같은데 쪼매만 더 깎아주세용' 상가 모퉁이를 두어번 꺾어 나가니 나도 쓰지 않고 아내도 쓰지 않는 SC은행이 보인다. 거기서 현금카드를 집어놓고 비밀번호를 누르던 아내가 말을 꺼낸다. '여보, 이 근처에 다른 은행 없을까? 여긴 수수료가 너무 비싼데?'

대충 찾아보니 나와 아내가 쓰는 다른 은행도 근처에 있다. 걸어서 3분거리쯤. '다른 은행들은 여기서 많이 멀다. 여기서 그냥 뽑자. 차이 나 봤자 1~2천원이잖아'라고 입이 저절로 움직인다. 금붙이 가게 주인과 아내 그리고 나, 3명 사이의 협상에서 내 의견이 묵살당한 것에 대한 보복이나 보상심리였나보다. 그러니까, 그냥 카드로 결제하려는 내 의지가 타의에 꺾였으므로 다른 은행을 찾아가고 싶은 아내의 의지도 꺾여야 한다는 비뚤어진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구시가지 중심가라고 할 수 있는 동넨데, 다른 은행이 없을리가 없다. 아내는 섬세하게 그녀의 귀까지 닿은 내 말의 진폭을 읽어낸다. '알았어요 여봉'이라는 그녀의 대답은 아이가 칭얼댈 떄의 대답과 유사한 억양이다.

다시 가게로 찾아가 현금봉투를 건네고 약간의 아부성 멘트로 가게 주인과 다툰 후에 '아내는 7만원 할인'을, 가게 주인은 '전액 무자료 현금'이라는 전리품을 얻어내고 둘은 모두 승리했다.


내가 시장 입구에 아내와 아이를 내려주고 주차와 씨름하는 동안, 아내는 시장의 물건들을 지나는 동안 아이와 씨름하며 약속을 했다. 아이가 얻어낸 것은 '시장을 샅샅이 구경하는 하다가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두말없이 사주기'였다.


구경을 시작하며 지나간 분식점. 아이는 협상카드를 경솔하게 사용하지 않았다.양념오뎅은 아이 눈에는 너무 매운 음식이었고 납작만두는 그리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나보다. 대구에 처음와서 저 납작만두를 보고 놀랐던 적이 있다. '이게 만두라고?' 얇은 밀가루떡안에 당면을 새끼손톱만큼 넣은 음식을 만두라고 부르는 것도, 저걸 맛있다고 사먹는 지인들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이젠 대구에서의 삶이 내 전체 인생의 절반쯤 되어서 그런지 저게 제법 맛있다. 철판에 구워낸 기름맛과 간장맛으로 먹는, 인도카레에 찍어먹는 '난'과 같은 성질의 음식으로 이해한 뒤부터다.


길거리 횟집은 내 취향은 아니지만 횟집에서 먹는 회덮밥 맛을 떠올리면 어느정도 이해가 간다. 그런데 저 소라는 한 번도 길에서 먹어보지 않았다. 지금껏 살면서 시장에서 저런걸 파는 건 다른 지역에서는 보지 못했다. 대구 어른들의 추억의 맛 정도일까. 두 가지 모두 '내륙지방 사람이 궁금해하는 신선한 바다의 맛'을 해소시키던 음식이 아닐까 싶다.

대구 어르신들은 교동시장을 도깨비시장이니 양키시장이니 하는말로도 종종 부르곤한다. 6.25전쟁을 전후하여 대구역 앞에서 팔기시작한 미군 군용물품과 외국산 밀수제품들을 팔면서 커진 교동시장을 잘 설명하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지금도 군에서 쓰일법한 물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아이는 본격적으로 물건들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협상으로 따낸 '물품 자유구매권'을 행사하기 위해 찬찬히, 신중하게 고민하는 모습이던데 그게 참 귀엽다. 아버지의 특별 주문도 있어서, 우리 내외는 일본제 동전파스와 사론파스의 가격을 유심히 살폈다. 예전에 내가 일본여행에서 몇 개 사 온 손바닥 절반 사이즈의 파스가 너무 마음에 들었던지 은근히 '야 그거 참 좋더라. 이제 다 써 가는데...'라는 말씀을 세 번쯤 하셨는데 아버지가 같은 말씀을 세 번 했다는 건 '꼭 해라'는 뜻이다.

일본산 향도 판다. 주 수요층이 어떤 사람들일지 궁금하다. 중학교 때 자습시간에 만화를 보다가 선생님께 걸려서 허벅지가 시커매지도록 맞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선생님은 '공부 안 하고 만화를 봤다'는 사실보다는 '일본 만화를 봤다'는 사실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분노의 몽둥이질을 했다. '어, 임마! 나라 경제가 임마! 부모들은 코끼리 밥솥 산다고 왜놈들 좋은 일 시키고! 너는 일본 책쪼가리 본다고 피 같은 외화를! 어! 임마!' 그 분이 교동시장을 다녀갔더라면 중간에 한 문장이 더 끼여있었을 것이다. '조부모들은 일본 향 산다고 외화를! 어!'

시장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들고나서야 알았다. 이 시장은 넓은 2층 건물이고 나는 건물 바깥쪽을 돌고 있었음을. 내부로 들어간다.




건물내부는 본격적인 할매할배 취향이다. 오래된 상가건물답게 통로는 두 사람이 비켜가기 힘들정도로 좁다. 상인들은 젊은사람이 여기를 들어오는 일은 거의 없을 것 같다. 젊을 때 시내 중심 상가를 다니던 분들이 상가와 함께 늙어 찾게 되는 곳이 아닐까 싶다. 길 건너편 동성로가 여기만큼 늙어질 때쯤 교동시장은 새로운 젊은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을까.


아이가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곳은 '빤쓰' 판매점이었다.



던전입구 느낌의 2층계단.

여전히 CDP와 워크맨을 수리할 곳은 필요하다. 오랜만에 보는 껌전지.




2층은 문을 연 가게가 거의 없었다. 내려가려는데 벽의 글씨를 보고 피식 웃었다. '이리로 나가는고얌'


빈대떡 두 장에 천원!





30m만 걸으면 갑자기 40년은 뛰어넘은 것 같은 느낌의 가게가 있다.
'아빠, 지금 뭐 봐?'
'어, 여기 로보트가 멋있네'
라고 대답하며 피규어를 구경했다.



예전에 대구를 주름잡던 백화점 2대장, 대구백화점과 동아백화점. 그 중 대구백화점은 현대, 신세계, 롯데의 공격을 맞으면서도 꿋꿋이, 근근히 살아남아있고 동아백화점은 모기업의 부도로 이랜드그룹에 넘어갔지만 아직 '동아'라는 이름은 지키고 있다. 대구 친구들이 말하던 동백과 동핑을 알아듣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교동시장에 위치한 동아쇼핑은 동핑, 반월당에 위치한 동아백화점은 동백이었다.

시장을 찾는 사람들의 연령대가 높아서 그런지 주변 가게와 동핑의 물건들에 눈이 잘 가지 않는다.

귀금속을 리폼해주는 가게 느낌이 드는 곳을 지나서

대구역 앞 '순종황제 대구행차 미니어처 디오라마'를 지나서

롯데백화점으로 들어왔다. 잠깐 사이에 시간여행을 몇 차례 거친 느낌이다. 사론파스와 아이 과자를 사긴했는데 그 가게에서도 카드는 받지 않았다. 현금영수증도 불가하다고 했다. 가게 구경을 하다가 사진을 찍으려하니 '저기에 영양제하고 약 쌓여있는 게 사진에 찍히면 안 되기 때문에 촬영은 하지말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냥 폰을 집어넣었다.

무자료 현금만이 취급되는 범죄도시, 이 곳은 교동시장...이라는 느낌보다는 어릴적 엄마 손을 잡고 따라가던 동네 시장을 다시 찾은 느낌이었다. 해질녘, 시장 구경을 끝냈는데 집에 가서 TV를 켜면 은하철도999가 나오고 창 밖예서 누군가 '대구야! 놀자!'라고 외칠 것만 같은 느낌에 잠시 빠져들었다.

이 날, 아이의 선택은 '카프리코 미니', 아이스크림 모양의 과자인데 칼슘이 들었느니 어쩌고 하는 설명이 붙어있었다. 사론파스 140매입이 1만3천원, 아이 과자가 4천원.

오늘 여행 끝.


여행지 정보
●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중구 교동 교동시장



여전히 90년대 모습, 교동시장

이 글은 스팀 기반 여행정보 서비스

trips.teem 으로 작성된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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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짱맨 호출에 응답하였습니다.

3.1 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북이오는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많은 문헌의 오류를 수정, 정성스럽게 다국어 버전의 디지털 문서로 출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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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공유되기를 희망하며, 참여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런곳은 아침에 들어가서 점심 시간 지날때 쯤에 막걸리 몇잔 하고 어슬렁 거리며 나와야 하는데요. 가고파요.

코스 좋네요ㅎㅎ서문시장 코스로 가시면 수제비와 잔치국수, 묵국을 그렇게 즐길 수 있습니다. 나중에 친구들과 한번 그렇게 다녀봐야겠습니다.

대구 교동시장, 구경 한 번 잘했네요~^^

변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곳입니다. 가끔 가면 구경하는 재미가 있어요.

저 마이마이 수리가 가능하군요.
대학 다닐 때에 참 많이도 누비고 다닌 곳인데...

삼성껄 쓰셨군요. 다 달리 말해도 다 알아듣던 시절이었습니다. 금성 아하프리, 삼성 마이마이, 소니 워크맨, aiwa나 panasonic껀 제품명을 잊어서 생각이 안 나네요.

교동시장 구경 잘 했습니다. 요즘은 치과에서도 현금하면 얼마 할인해준다고 무자료거래를 만들더군요.

치과도 치료 견적이 제법 크게 나오면 그럴 수 있겠네요. 무자료 거래를 전제로 하는 할인을 만날 때마다 깊은 고민에 빠지곤 합니다ㅎㅎㅎ

역시 글 좋습니다.
대구가 고향은 아니시군요.
저도 오빠가 대구에 살고 있어서 육지 살때 가끔 놀러가곤 했었는데, 교동시장은 못가봤네요.
서문시장 구경은 몇번 갔었구요.
동핑, 동백이 그런 뜻이었네요.
그럼, 대백은 뭐죠? 그것도 백화점이던데?
저도 글을 따라서 시간여행을 한 듯합니다.^^

대백은 대구백화점입니다. 그 이름을 따서 대백마트, 대백건설(현 SD건설) 등의 계열사가 있기도 하고요. 대구와 인연이 있으시다니 반갑네요ㅎㅎㅎㅎ댓글 감사합니다. 즐거운 한 주 되세요!

대구 토박이가 아니셨군요. 교동시장은 서울 느낌이라 즐거웠습니다. 서울 느낌이라는 말이 일견 어색하겠지만. 서울의 삐까삐까한 빌딩숲과 말끔한 시설들은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기 때문에, 충무로 산수갑산이나 청계천의 저 멀리 빌딩이 보이는 부숴진 AKIRA 동네들이 저는 서울이라고 느낍니다.

저는 단골 노포들에 무조건 현금을 내는 버릇이 있습니다. 언제나 현금을 뽑아서 다닙니다. 어차피 제가 아니라도 누군가 현금을 주겠죠. 그냥 그들에게 좀 더 나의 '성의표시' 를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저 피규어들은..선생님..혹시 지 덕 체 피규어 모델을 갖춘 오덕 군자는 아니시겠죠?

AKIRA동네ㅋㅋㅋ전에 출장길에 시간이 남아서 서울역에서 종각역까지 걸어간 적이 있는데 그 때 남대문시장 언저리에서 그런 느낌을 본 것 같네요.

가게도 가게 나름이라 단골 '미장원'이나 어물전, 과일가게에서는 당연스레 현금을 즐겁게 꺼내는 편인데 주인이 풍기는 분위기에 이끌려 본의아니게 현금을 내야하는 상황이 되면 기분이 별로더라고요.

저는 피규어와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흠흠. 지나가는 길에 들렀을 뿐. 흠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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