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더스비 교수의 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 1948, post 34.steemCreated with Sketch.

웨더스비 교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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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포스팅의 주요 내용은 미국이 미소공동위원회의 한계를 인식하게 되는 과정에 관한 것이다. 결국 한반도는 소련이 북한을 미국이 남한을 점령하면서 분할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소련은 자신의 한반도에 자신에게 완전하게 복종하는 완충국가의 수립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미국은 이를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가능한 옵션은 소련의 통제를 받는 통일국가거나 아니면 북한은 소련의 통제를 받고 남한은 자신의 갈길을 가는 국가가 되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1947년 6월이 되자, 이승만과 김구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더욱 강화했다. 그들은 철도와 발전소 노동자들의 파업을 조직했으며, 미소공동위에 협의회 참가가 배제되는 질의서 제출도 거부했다. 대규모의 폭동을 우려했으나, 하지 장군에게 그들의 전술에 대해 말도 대응하는 것 이외의 방법은 없었다.

동시에, 공동위원회가 갈 수 밖에 없는 불가피한 결론이 정치적 전장이 되었다. 6월 25일 미소 공동위원회는 한국지도자들의 예비 협의체를 개최했으며, 그 구성은 통상적이지 않았다. 정치적 활동이 소련의 당국과 지역 공산주의자들로 부터 완전하게 통제를 받고 있었던 북부지역에서, 단지 3개의 정당과 35개의 사회조직만이 참가했다. 그러나 인구가 더 많은 남쪽지역에서, 회의 참가는 가속화된 정치적 소란을 야기했다. 400개 이상의 정당들이 위원회에 등록을 했으며, 이들은 6200만명의 당원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고, 이는 남부 지역 전체인구의 3배가 넘는 숫자였다.

소련 대표단은 예상대로 협의체가 좌파가 장악할 수 있도록 보장할 수 있는 숫자 이상의 우파들을 수용하기를 거부했다. 슈티코프 장군은 “반탁 위원회”에 속해있는 8개의 정당이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들이 소련 대표단에 대한 폭력적인 공격에 책임이 있다고 근거를 제시했다. 미국 국무부는 반대로 미국 대표단이 소련의 요구를 거부하여 모스크바라 지원하는 좌파정부가 한국에 수립되지 못하도록 확고하게 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미국 관리들은 소련이 한국에서 그들이 동유럽에서 했던 것과 같은 위성국가를 만들려고 한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미국 대표단이 7월초 평양을 방문하고 나서, 최근 알바니아에서 근무했던 하지 장군의 새로운 정무보좌관 조셉 E. 야콥스는 북한지역의 체제가 그가 동유럽에서 보았던 괴뢰정부와 유사하다고 보고했다. 게다가 그는 소련은 이미 북한지역에 강력한 경찰과 군대를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결과적으로 미소공동위원회가 임시정부를 어떻게 만들더라도, 공산주의자들은 서울에서 통제권을 장악하기 위해 남한에서의 정치적 분열을 확대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냉전이 종식된 이후, 여러 학자들이 제2차세계대전이후 소련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소련이 어떻게 통제를 수립했는가를 조사하기 위해 새로 개방된 과거 공산주의 국가들의 문서고를 조사해왔다. 그들은 각 지역마다 그 방식이 달랐다는 것을 밝혔고, 이는 소련의 기관들이 지역의 환경에 따라 자신들의 정책과 전술을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각각의 경우 모스크바와 목적은 일관되었다. 스탈은 소련을 미래의 공격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변방에 완충국가를 수립하고자 했으며 이국가들은 소련의 요구에 철저하게 복종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전후 한국에 있어서, 이러한 비극적 현실은 두개의 결과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소련의 통제하에 통일된 국가든가 아니면 반쪽은 소련에 의해서 통제받고 다른 반쪽은 다른 운명을 가는 국가로 분단되는 것이었다. 7월초 평양여행이후 미국이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고나서, 미국은 협의회에서 소련의 입장을 확고하게 거부했다. 하지 장군은 슈티코프의 주장했던 반탁위원회의 멤버들을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은 임시정부에서 모든 우파의 참석을 방지하기 위한 단순한 책략적 계획이라고 선언했다. 하지장군은 대신 미소공동위원회의 정회를 초래하는 한이 있더라도 모든 단체의 완전한 언론의 자유를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입장을 확인하기 위해서, 신탁통치에 대한 공개적인 시위 금지를 해제했다.

다음에는 7월 19일 여운형 암살의 여파와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워싱턴의 점진적인 계획의 구성을 알아 보겠다.

[참고문헌]

소련의 전후 점령에 관한 연구는 Norman Naimark, Jordan Baev, Laszlo Borhi, Mark Kramer, Vladislav Zubok의 연구를 참고했으며, 또한 북한의 소련 점령에 관한 본인의 저서를 참고했다.

또한 James I.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를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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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redible your work sir,i support and agree your works sir @wisdomandjustice

잘 보고 갑니다!

정말 풍운의 시대였지요.
돌이켜보면 이후 수십년간의 우리나라 정치 사회 경제 전반이 결정되는 시기나 다름없었던것 같습니다

참 소련은...

게다가 소련의 지원을 받아 독재의 야심을 품은 김일성도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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