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써보는 임신 일기 | 26th week.

in #zzan5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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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잘 써보자고 마음은 먹었었지만 일이 문제다.
정신없던 기간이 지나 서울로 휴가도 다녀오고 한숨 돌리니 벌써 몇 개월이 지났다. 와잎느님은 한국에 가 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출산 준비를 하는 건 아니지 싶었다. 잘 지내는 것을 보니 한국에 보내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들을 만나기까지 이제 백일도 남지 않았다. 설레고 기대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시간이 빨리 지나고 있는 게 슬프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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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들러 조카의 폭풍 성장에 깜짝 놀랐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아직 걷지도 못했던 조카가 이제는 모든 이동을 뜀박질로 해결하고 있었다. 행여나 다칠까 쫓아다니다 보니 며칠 새 내 몸무게가 훅 줄어들 정도였다. 아빠는 사업에 너무 바빠 평일에 함께 놀 수 없었던 조카였는데, 고모부의 등장에 난생처음으로 일주일 내내 남자 어른과 뛰놀았다. 그리고 그렇게 좋았나 보다. 처음에는 낯가리느라 근처에도 안 오더니 휴가 막바지에는 엄마보다 고모부에게 제일 먼저 딸기를 갖다 줬다. 와잎느님 설명에 따르면 딸기 귀신이라 좀처럼 남에게 나눠주는 적이 없는데, 가장 먼저 딸기를 받았으니 조카에게 인정받은 남자가 된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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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에게 인정받은 계기는 젤리다.
엄마의 확고한 방침으로 인해 당이 든 음식은 온 가족이 합심해 조카가 먹지 못하게 하고는 했다. 모두 모여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자리에서 조카가 아이스크림에 관심을 보이기라도 하면 이거 엄청나게 맵다는 표정과 우는소리를 내 지레 겁을 먹게 만드는 식으로 막아 왔는데, 고모부가 젤리를 사준 것이다. 당이라는 신세계를 만난 조카와 이게 마지막이야라고 연신 타이르는 엄마 사이에서 살짝 죄책감이 들기도 했으나, 뭐 그렇게 어른이 되는 거다 조카. 다음엔 아이스크림을 사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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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콩이의 성장도 놀라울 따름이다.
서울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에도 와잎느님의 배가 점점 커지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태동도 많아져서 발로 뻥뻥 차고 난리도 아니라, 가끔 와잎느님이 깜짝 놀라며 콩콩아. 거기서 뭐 하는 거야? 라고 물을 정도다. 서울에 들르기 전에는 항상 비슷한 시간에 와잎느님과 통화를 했다. 그러다 보니 아빠가 전화하는 시간을 아는 것 같다고 했다. 그 시간만 되면 안에서 뒤집고 발로 차고 한다고. 그런데 막상 서울에 와 보니 이놈이 낯을 가리나 보다. 태동이 있다 그래서 얼른 배에 손을 가져다 대면 잠잠하다. 말을 걸어도 고요하다. 한참을 불러보다 자나 보다 싶어 포기하면 또 뻥뻥 차고 손 가져다 대면 다시 잠잠하고. 여러 번 반복되나 보니, 아하. 이거 나랑 놀자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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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바꼭질은 계속됐다.
정밀 초음파 검사를 하게 되면 아기의 생김새를 상당히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을 여러 번 들은 차였다. 어떻게 생겼을라나 궁금해 한껏 기대를 하고 병원에 갔건만 좀처럼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귀재 of 밀당. 엄마, 아빠, 의사 선생님이 합심해 밖에서 어르고 달래보았지만 양 팔을 귀 옆에 붙이고 엎드린 채로 요지부동이다. 포기하지 않고 보채니 움직임을 보여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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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하고 그냥 기다리란다.
의사 선생님도 웃고, 엄마 아빠도 빵 터졌다.
알았다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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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아 용품이 필요해 백화점에 들렀다.
그렇게 많은 게 필요할지 예상을 못 했다. 기계처럼 착착 필요한 걸 꺼내 앞에 쌓아가는 점원 앞에서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배냇저고리와 베개, 이불들의 귀여운 디자인 때문에 더 정신이 없더라. 어찌나 그리 귀여운 돼지가 많은지. 색상이랑 소재만 정해놓고 띠에 따라 캐릭터 디자인 돌려가며 팔면 이 장사 참 쉽겠다 싶었던 찰나. 주변을 돌아보니 산모가 정말 별로 없더라. 올해 들어 그나마 조금 더 낳는 추세라던데 평소보다 나은 추세가 이 정도라면 말 다 했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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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많이 나온 와잎느님이 입을 옷이 필요했다.
특히 바지. 산모들이 입을 수 있게 허리와 라이즈 부분만 변형한 일상복 디자인의 옷들이 있는데, 와잎느님은 몇 벌 입어봐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그리고 이내 우울 모드를 탄다. 급격히 변한 체형 때문에 이쁘게 하고 다니지 못하는 상실감이 남자가 생각하는 수준보다 훨씬 심각한가 보다. 게다가 아이를 낳고 난 후에 체형이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도 커 많이 속상한 모양. 눈물도 찔끔하는 모습을 보니 난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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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산모 신체의 외형 변화만 문제가 아니다.
뱃속에서 아이가 점점 커지다 보니 몸 곳곳에 부담을 주기 시작한다. 하루는 꼬리뼈가 너무 아파 누운 채로 어쩌지도 못하고 와잎느님이 울고만 있었다. 장모님은 병원에 가보라고 보채시는데, 와잎느님은 가봤자 병원에서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한다. 그래도 설득해 병원에 갔더니 맞다. 어쩔 수 없댄다. 꼬리뼈뿐만이 아니라 갈비뼈도 아프고 자연스레 허리까지 통증이 오면서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여기저기가 아픈 거다. 엄마가 너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라는 어른들의 말씀에 이런 것도 포함이 되었던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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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지들을 만나면 자연스레 출산이 화제거리였다.
숙모들의 경험담을 들으면서 그간 무지했음에 더욱 민망했다랄까. 첫째가 힘들었던 숙모가 있으면 둘째가 더 힘들었던 숙모가 있고, 이건 정말 사바사 케바케다. 한 숙모는 첫째가 나오던 때의 경험 때문에 둘째 출산이 임박했을 때는 온몸이 부들 부들 떨렸더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만큼 무서웠다고. 근데 또 의외로 쉽게 나와서 감사했다고. 그 사촌 동생이 참 싹싹하고 숙모한테 잘 하는데,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어느 정도 성격이 반영되는 건가 싶다는 말에 다들 어느 정도 공감을 하시더라. 우리 엄마는 나 낳는 게 정말 너무너무 힘들었다고 하셨는데, 그날 식사 자리에서 태아의 성격과 출산 난이도 연관설의 신빙성이 가장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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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들의 조언은 짧고 명확했다.
아이 나오는 날 열과 성을 다하라. 그래야 후환이 없다. 고모부도 20여 년 전 스토리를 들려주셨다. 난 그날 골프 치고 있었어. 그래서 니 고모한테 지금도 꼼짝 못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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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삭 사진을 찍으러 갔었다.
산후조리원과 연계돼 무료라는 말에 가볍게 갔다. 사진 찍는 과정도 웨딩 사진과는 다르게 뭔가 공장에 온 느낌이었다. 철저하게 계산된 구도와 배경에서 기계적으로 촬영이 진행됐다. 웨딩 사진 찍을 때는 그래도 이런저런 대화도 하며 사진사분과 뭔가 교감이 있었는데, 여기는 다르더라. 거기 서시고, 여기 서시고, 웃으세요. 촤라라락. 이거 몇 번 하니 후딱 끝났다. 멀뚱 거리며 뭐 얼마나 잘 나올까 싶었는데, 오. 사진이 죄다 너무 잘 나왔다.

원본 구매하시면 얼마구요, 구매 안 하시면 랜덤으로 2장만 앨범에 넣어드려요.

랜덤만 아니었으면 그냥 무료로 할까 하겠는데, 랜덤이라고 하니 이거 은근 신경 쓰이더라. 역시 상술의 세계는 심오하다. 게다가 만삭 사진 다 찍고 나서 와잎느님 몰래 남자만 남겨두고 동영상을 찍게 하는데, 이게 상술의 핵심이요 본체며 마케팅의 위대한 승리다.

동영상은 생각지도 않았던 터라 안 하겠다 버텼으나 꼭 하셔야 된다고, 고생하는 아내분에게 한마디 하시라고 보채길래 마지못해 동영상을 찍었다. 힘든데 고생한다 잘할게의 스토리 라인으로 말씀해주시는 게 좋다고 해서 생각 없이 따라서 동영상을 찍었다. 보정이 끝난 사진들을 확인하며 상담하는 자리에서 이 동영상을 틀어 줬는데, 오글 거린다며 놀릴 줄 알았던 와잎느님 울음이 터지네.

아이를 갖고 나서 이런저런 변화 때문에 생기는 불안, 초조와 스트레스의 감정선을 힘들지, 고생하네, 잘할게라는 단어들이 건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단어들에 격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진관에서는 최종 선택의 자리에서 동영상을 보여준 것.

여튼 사진이 잘 나와서 원본을 구매하기로 했고, 돈을 벌게 되어 싱글벙글하는 상담사가 들려준 얘기에 따르면, 우리뿐만이 아니라 정말 여러 커플의 반응이 비슷하다고 한다. 어어어 하다가 돈을 써버리고 나니 마케팅의 무서움에 새삼 놀랐던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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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가기 전 날이 되니 콩콩이가 시도 때도 없이 움직이며 맘껏 태동을 보여주더라. 한 번은 발인지 손인지를 쭉 뻗은 상태로 1분가량 있어줬다. 하이파이브인지 얼른 가라는 건지. 애만 태우다 마지막 날에 막 움직여 주는 걸 보면 밀당 잘 하는 녀석이 나올 것 같다.

남편이 써보는 임신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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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신기하게 제 주위에도 출산 예정인 친구들이 꽤 있어요. 나이가 적은 것도 아닌데.. 돼지해의 힘일까요?
콩콩이 만날 날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네요. 첫 일기를 읽은지 오래되지 않은 것만 같은데 말이죠. 다음 일기엔 콩콩이 얼굴도 볼 수 있기를!!

아이를 기다리는 100일... 엄마, 아빠는 어떤 마음일지 상상이 안가네요! 아직 혼자라...
미리 보여주기 싫었나봐요^^ 엄마, 아빠에게 깜짝 선물을 준비 중이려나요^^

아직 혼자라...

....ㅠ
일부러 혼자이신 거 아닌가요..? 한 사람에게만 종속되지 않겠다는 뭐 그런... -0-;
아들 얼굴이 너무너무 궁금했는데 안 보여주네요.ㅎㅎ 궁금한 거 잘 못 참는 성격이라 환장하겠습니다.ㅎㅎㅎㅎ

저도 아직 100일전 아빠에 마음이 어떨지 상상이 않가네요... 뭔가 구래도 무지 행복하시겠죠^^

복잡 복잡합니다. 뭔가 엄청 복잡하기는 한데, 즐겁네요. x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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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봇으로도 부족하네요ㅠㅠ
감동적인 일기 감사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내님의 건강한 출산을 기원하겠습니다.
기다리는 시간이 참 설레이지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마냥 설레이는데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 거 같아서 아쉽기도 하고 그렇네요. ^^a

마첼린님 벌써 시간이 이리 흘렀나요 ~~
꼬리뼈가 아파서 울고만 계시다니 ㅠㅠ 저도 미래가 두렵네요~

그쵸 시간 너무 빠르네요. 조언 구한다고 도와달라고 글 올렸던 게 며칠 안 된 거 같은데 그게 벌써 4-5개월 전이에요... -.- 출산 전 증상은 정말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라고 하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결혼 얼마 남지 않으셔서 한참 바쁘시고 설레시겠습니다. 부러워요. 결혼 준비할 때 저희는 참 재밌었던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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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읽었어요^.^ 그리고 참고로 저는 아기물품도 죄다 쿠팡으로 시켰다며(...) 저 같이 인터넷 주문을 하는 젊은 줌마들이 꽤 있어서 백화점이 한산했던건 아닐련지 ㅋㅋㅋㅋ

곧 출산이네요 두근두근! 행복하다못해 잠도 못자고 매일 바라보게 될꺼예요 ^.^ 호호호

아하라..
온라인으로 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왜 못했을까요.ㅎㅎㅎㅎ 아 베트남에 너무 오래 있었나봐요. 트렌드를 모르는구나 싶네요.ㅠ

행복하다못해 잠도 못자고 매일 바라보게 될꺼예요 ^.^ 호호호

여사님 C스러운 캐릭터를 잠깐 떠 올려보자면... 행복하겠지만 밤에 애 다시 재우느라 잠도 못자고 고생 좀 할 거야... 라고도 들려요.ㅋㅋㅋ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렇게 눈치가 빠르시니ㅋㅋㅋㅋ와잎분이 편하실꺼 같아요 ^^

다음일기 어서 쓰세요 ㅋㅋㅋㅋㅋ

주간입니다!ㅋ
근데 그마저도 남편은 할 일이 별로 없어 참 쓰기 힘드네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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