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희의 5.18

in #zzan5 years ago

1980년 5월 18일 박찬희의 5.18

요즘이야 시들시들을 넘어 잠잠하기까지 하지만 한때 프로복싱은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고 최근의 스포츠 스타들이 무색할이만큼의 인기몰이를 하던 복싱 스타들도 즐비했다. 세계 챔피언만 해도 수십 명이고 아쉽게 챔피언 벨트는 못 둘러 봤지만 챔피언 부럽지 않은 인기와 기량을 지녔던 이들도 많다. 그 가운데 테크닉면에서 가장 뛰어난 챔피언이 누구였는가 하는 질문에 빠지지 않고 이름이 오르내리는 이가 있다. 그가 박찬희다.

박찬희는 프로 전적보다 아마튜어 전적이 열 배 정도 많다. 그의 아마튜어 전적은 화려하다 못해 눈부실 정도. 127전 125승 2패. 테헤란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땄고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결승 직전에서 쿠바의 에르난데스에게 진다. 당시 다섯 명의 심판이 판정을 내리던 시스템에서 3대2로 아깝게 패하긴 했지만 사실상은 이긴 경기라는 후문이었다. 이왕 금메달과 인연이 없었다면 차라리 에르난데스에게 지는 것이 나았을 수도 있다. 에르난데스의 상대로 결승에 오른 건 북한 선수였기 때문이다. 1976년쯤이라면 무슨 스포츠건 북한과의 승부에서 진다는 건 한일전 패배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악몽이었다.

박찬희는 다시 올림픽을 기다리지 않고 프로로 돈다. 아마튜어에서 다져진 기본기와 테크닉은 프로에서도 빛을 발한다. 연전연승했고 검은 별 (패) 하나 없이 10전을 갓 넘긴 상태에서 세계 챔피언에 도전한다. 상대는 멕시코의 미겔 칸토. 그때가 15차 방어전이었다. 박찬희가 챔피언이 된 다음 해에 겨우 김성준이 3차 방어를 성공했을 뿐 3차 방어를 통과한 챔프가 없었던 한국에서 14차 방어전을 치른 챔피언이란 그야말로 레전드였고 칸토는 그 자격이 있었다. 오죽하면 별명이 ‘링의 대학교수’였을까.

그런데 나이 스물을 돌파한지 얼마 안되고 15라운드를 처음 뛰는 풋내기 복서 박찬희는 이 링의 대학교수를 능수능란하게 농락했다. 특히 체력을 비축해 놨다가 30초 남았을 때 아낌없이 몰아붙이는 전술은 칸토를 당혹감에 빠뜨렸다. 판정승으로 세계 챔피언에 오른 박찬희에게 마의 3차 방어 벽이 다가왔다. 상대는 역시 멕시코의 강타자 구티 에스파다스. 이 작달막한 멕시칸의 얼굴은 지금도 생생하다. 플라이급이면서도 KO율이 80퍼센트가 넘는 돌주먹이었고 챔피언 박찬희보다 전적은 세 배 정도 많은 전 챔피언이었다. 미겔 칸토가 그 펀치를 두려워하여 대결을 피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의 강적이었다. 전문가들도 거의 에스파다스의 우세를 점쳤다.

그러나 박찬희는 이 경기를 세기의 명승부로 장식한다. 경기 시작하자마자 다운을 허용하지만 그야말로 전광석화같은 주먹과 치고 빠지는 경쾌한 푸트웍으로 에스파다스를 압도하더니 1라운드에 두 번 다운을 다시 시키면서 분위기를 바꿔 놓았고 2라운드에서는 완전히 눕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역전 KO승. 이 경기는 부산 구덕체육관에서 벌어졌는데 그때 부산 시민들 다방마다 전파상 앞마다 난리가 아니었다. 만화 같은 승리 드라마가 펼쳐졌으니 그럴 밖에.

김태식과도 붙어 그 턱뼈를 분쇄한 바 있는 필리핀의 아르넬 아로살을 꺾고 또 다른 멕시칸 모랄레스를 이겨 5차방어에 성공한 박찬희는 그야말로 한국 프로복싱의 역사를 쌓아가고 있었다. 장정구 이전 5차 방어전을 끝낸 선수는 박찬희와 김철호 정도 밖에 없다. 박찬희는 또 다른 강타자와의 흥행 대전(大戰)을 준비 중이었고 그 이전에 가벼운 마음으로 퇴물 복서라 할 일본의 오쿠마 쇼지와 일전을 벌인다. 그게 1980년 5월 18일이었다.

미겔 칸토나 에스파다스같은 세기의 전설들을 낙엽으로 만들어 버린 박찬희였지만 왼손잡이에 좀 ‘지저분한’ 권투를 하는 오꾸마 쇼지에게 박찬희의 테크닉은 이상하게 빛을 잃었다. 14차 방어의 금자탑에 빛나는 미겔 칸토와 그 칸토가 겁냈던 에스파다스를 곤죽으로 만들어 버린 테크니션은 도무지 그답지 않았다. 오꾸마와 맞붙기 3일 전, 서울역 앞을 4.19 이후 최대의 인파로 뒤덮은 학생 시위가 ‘서울역 회군’ 뒤 비상 계엄이 확대되자 비로 쓸어버린 듯이 온데간데 없었던 것처럼, 박찬희는 전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미겔 칸토에게 세 번이나 패했던 오꾸마 쇼지는 그 미겔 칸토를 가지고 놀다시피 했던 박찬희를 또 가지고 놀았다.

특히 악몽같았던 것은 보디 블로우였다. 오꾸마 쇼지는 박찬희의 빠른 발을 봉쇄하기 위해 클린치나 접근전 때마다 박찬희의 복부를 노렸고 가랑비에 속옷 젖듯 박찬희는 다리가 풀려 버렸다. 박찬희는 몸이 안좋아다고 회고하지만 내 기억에 박찬희는, 칸토를 누르고 에스파다스를 무찔러 ‘롱런 챔피언’을 학수고대하던 한국 복싱에 짧은 봄을 가져다 준 박찬희는 오꾸마 쇼지에서 완연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속시원하게 캔버스에 누워 버린 것도 아니고 그는 주저앉아 버렸다. 침울하게 고개를 숙인 채 한쪽 코너에 기댄 채 앉아 있던 그 불쌍한 사진은 기억에 선연하다. 그 사진이 특히 기억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바로 그 옆면에 “광주 시위 확산”이라는 시커먼 제목의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었던 것이다.

철권 독재자를 몰아부친 끝에 궁정동의 총소리로 끝장을 내고 서울의 봄을 만끽하던 한국의 민주주의가 또 다른 지저분한 독재자의 군홧발에 유린되던 1980년 5월 18일, 박찬희는 그렇게 패했다.

그 뒤 박찬희는 두 번이나 더 오꾸마 쇼지와 맞붙는다. 한 번은 다운까지 빼앗는 등 선전하지만 편파판정으로 패했고 또 한 번은 역시 그의 약점인 뒷심 부족으로 패한다. 다른 경기에서도 10라운드를 넘기면 체력이 떨어지는 것이 여실히 보였던 박찬희였지만 그 약점은 끝내 보강되지 못했고 결국은 글러브를 벗게 된다. 그런데 사실 오꾸마 쇼지는 미겔 칸토나 에스파다스에 비할 선수는 아니었다. 박찬희도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도무지 오꾸마 쇼지와 맞붙으면 힘을 쓰지 못했다. “나는 강자에게 강했지만 별거 아닌 선수에게는 약했다.”는 투로 말한 바 있는데 그것은 과연 징크스였을지 아니면 일종의 자만심의 소산이었을지.

화려한 전적과 그에 걸맞는 역량을 가졌고 세기의 강타자들이 그의 주먹 앞에 나뒹굴었지만 뒷심 부족이라는 고질적 약점을 고치지 못했고, 그 강타자들을 무찌른 결기를 ‘지저분한’ 상대에게는 도무지 발휘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무너지거나 열나게 쫓아다니다가 ‘분루만 삼킨’ 박찬희. 그가 1980년 5월 18일 무너졌다. 그런데 얘기를 하다 보니 왜 박찬희 얘기만은 아닌 것 같을까.'

Coin Marketplace

STEEM 0.30
TRX 0.12
JST 0.033
BTC 64513.89
ETH 3155.04
USDT 1.00
SBD 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