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패전 현리전투와 조창호 소위

in #zzan5 years ago

1951년 5월 16일 최악의 패전 현리 전투와 조창호 소위

승패란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고 이야기된다. 하지만 그건 병법서에서나 하는 얘기지 이기고 지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더구나 축구나 야구 경기가 아니고 전쟁에서라면야 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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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를 겪은 한국군 역시 무수한 승패를 겪었다. 백마고지나 파로호 전투같은 대첩도 있었지만 생각하기조차 싫고, 그로 인해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가거나 인생이 뒤바뀌고, 나아가 한국군의 역사를 좌우한 패전도 존재한다. 그 가운데 1951년 5월 16일 시작된 현리 전투는 그 패전의 흑역사 가운데 단연 으뜸이다. 어떤 사람들은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조선 수군이 전멸된 칠천량 전투, 병자호란 때의 쌍령 전투와 더불어 우리 역사의 3대 패전이라 표현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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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의 개입으로 1.4 후퇴를 경험하고 37도선까지 패퇴했던 국군과 UN군은 맥아더의 뒤를 이은 무뚝뚝한 강골 리지웨이의 지휘 하에 중공군의 파도 같은 공세를 막아내고 다시 전선을 밀어올렸다. 중공군 역시 적잖은 피해를 입고 서울을 포기한 후 38도선 일대로 물러났다. 쌍방이 한 번씩 큰 펀치를 교환한 후 새로운 라운드의 공이 울린 셈이었다.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는 저항이 강력한 서부전선과 영국군과 미군 등이 튼튼하게 지키던 중서부 전선을 포기하고 다른 구멍을 찾았다. 이때 팽덕회가 찾은 먹잇감은 화력에서는 미군에 비교가 되지 않고 기타 전력도 부실한 한국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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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골부대라 불리우는 3사단, 후일 백마고지의 승전 부대가 되는 9사단은 한국군 3군단 소속이었다. 이들은 미군 10군단에 배속된 5사단과 7사단과 함께 중동부전선, 즉 현리 북방을 지키고 있었다. 중공군은 위장 공격으로 미군을 묶어 두면서 북한군과 합세하여 한국군 네 개 사단과 동부전선의 수도사단, 11사단까지 깡그리 분쇄할 계획을 세웠다. 작전대로만 된다면 전선의 한쪽에 구멍이 크게 나는 것이고 서부전선의 한국군과 UN군을 자루에 넣어버릴 수 있었다. 1951년 5월 16일 오후 4시 중공군은 격렬한 포격과 함께 작전을 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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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한국군 7사단이 박살이 났다. 포성과 아우성 총성과 비명과 절규가 뒤범벅이 된 전쟁터에서 중공군은 과감하게 돌격해 왔다. 현리 전투가 시작된 지 12시간이 지났을까 그야말로 큰일이 벌어진다. 오늘날의 31번 국도상에 위치한 오마치 고개, 인제군 기린면과 상남면 사이에 자리잡은 이 고갯길에 중공군이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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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개는 국군 3군단의 유일한 보급로이자 작전상 가능한 퇴로였다. 지금도 이 고개는 홍천 횡성 등 지역과의 통로로 남아 있거니와 이 목숨같은 고개는 미군과 한국군 사이의 애매한 관할권 다툼 속에 방치돼 있었다. 그리고 오마치 고개는 5월 17일 오전 무시무시한 속도로 전방을 돌파해 온 중공군 1개 중대에 의해 점령됐다. 처음에는 1개 중대였지만 17일 밤이 되자 중공군 1개 사단이 오마치 고개를 완전히 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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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완전히 포위됐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는 말을 장난같이 하지만 이 말이 얼마나 공포스런 말인지를 실감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멀쩡히 잘 싸우던 한국군 3사단도 오마치 고개가 점령됐다는 소식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아비규환이 쏟아지는 모래성처럼 전선을 뒤덮던 무렵, 한 대의 경비행기가 날아올랐다. “작전회의에 참석한다.”는 핑계로 전선을 떠나는 3군단장 유재흥의 비행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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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말은 유창하고 한국말은 서툴렀다는 이 일본군 출신의 군단장이 참석한 ‘회의’는 없었다고 하거니와 (그것도 한국군 원로 백선엽의 말로) 군단장이 탈출한 군단이 남아날 리 없었다. 사단장들도 계급장을 떼고 도망쳤고 병사들은 산중을 헤매다가 중공군과 인민군에 맞아죽거나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 군단 병력의 60퍼센트가 녹아 없어졌고 빼앗긴 무기며 장비는 헤아릴 것이 없었다. 심지어 중공군과 인민군들은 포로들을 즉석에서 ‘해방’시켜 총알받이로 내세우기도 했다.

글자 그대로 한국군 최악의 패전이었다. 격노한 밴플리트는 한국군 3군단을 아예 해체해 버린다. 밴플리트가 “당신 부대는 어디 있는가?”라고 펄펄 뛸 때 “몰르겠는데요.” 하고 영구 흉내를 냈던 유재흥은 밴플리트의 박력(?)이 멋있어 보였던 모양이다. 노무현 정권 때 “작전권 환수 반대”를 노구를 이끌고 부르짖은 것이 그였으니까. 그때는 우리 말에 서툴진 않았겠지.

이때 한 관측 장교가 통신병과 함께 강원도 산골을 헤매다가 중공군의 포로가 된다. 원래 태어난 곳이 평양이었지만 남쪽에서 자라 대학 재학 중 군인이 됐던 그는 전향하라는 회유를 받았지만 거부하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13년 동안 수형 생활을 한다. 포로 교환 대상이 되지 못한 그는 북한에 정착하여 살아야 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아 길렀지만 사고로 한쪽 눈을 잃었고 한쪽 다리도 절게 됐다. 거의 삶을 정리할 나이가 됐을 때 그는 남쪽의 가족들과 기적적인 연락을 주고 받게 되고 탈출을 결행한다. 목선을 타고 표류하던 중 군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이 국군 노(老) 포로의 이름은 조창호였다. 탈출 전 그는 자녀들에게도 동행할 것을 권했으나 자녀들은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 그 이별 장면은 어떠했을까.

“나는 어찌 됐건 남쪽으로 가야겠다.”는 아버지에게 자식들은 무슨 말을 했을까. “우리가 고생은 되갔지만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고향 가갔다는데 어찌 말리갔시오.” 라고 눈가를 훔쳤을까. “에이 반동분자. 하여간 한 번 반동이문 영원한 반동!”하면서 성장하는 내내 그들을 괴롭혔을 아버지의 출신 성분을 들먹였을까. 그 어느 쪽이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원하지 않는 곳에 떨어져 뜻하지 않은 평생을 보낸 조창호 소위이든 하필이면 그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들이든 그 마음은 편치 않았으리라. 도대체 이게 무슨 팔자란 말인가 하며 주먹으로 허공도 갈랐으리라.

한국에 돌아온 조창호 소위는 전사자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웠고 자신이 소속했던 3사단 백골 부대도 방문했다. 위풍당당하게 그를 맞는 젊은 군인들 틈에서 그는 처절하게 1951년 5월 16일을 곱씹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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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뿔피리와 꽹과리 소리, 고막이 터져나갈 것 같던 폭음과 지리멸렬의 후퇴와 방황. 그날 산중에서 죽어간 사람들과 희한하게 꼬여버린 자신의 운명을 마치 술 먹은 뒤 토해 내듯 울컥거리면서 곱씹었을 것이다, 조창호 소위는 2006년도에 죽었고 군단장이었던 유재흥은 2013년에 죽었다. 현리 전투의 악몽을 겪은 이들은 이제 그렇게 세상에 남지 않았다.

조창호 소위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에 남은 국군 포로 가운데 김동규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3사단 백골부대 소속이었던 그의 몸에는 백골 문신이 선연했다고 한다. (서북청년단들이 대거 입대했던 3사단 부대원들은 백골이 될 때까지 싸우겠다고 철모에 백골을 그려넣었고 그로부터 백골부대 명이 나왔다고 한다) 그는 지금 살아 있을까. 전쟁사를 들추면 들출수록 참 전쟁은 할 게 못된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전쟁은 참으로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못할 짓과 몹쓸 짓을 해도 해도 너어어어어무 많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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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잘쓰여진 전쟁사의 다큐를 보는 느낌 이었습니다.
이 땅에 다시는 6.25와 같은 비극이 일어 나서는 안돼겠죠..
개인적으로 저는 9사단 백마부대 출신 입니다.

아 백마부대..... 한국 전쟁사에 잊을 수 없는 백마고지 전투의 영웅 부대죠

조창호 소위의 귀환
저도 뉴스에서 본 생각이납니다.
그 치열한 전투에서 백골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아픈 역사의 한 토막, 전율이 옵니다.

3사단은 북한이 제일 무서워하는(?!) 사단이라죠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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