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때리러 떠난 여행 : 여수 향일암 2박3일

in #kr6 years ago (edited)

안녕하세요 10년차 레고인 브라이언입니다.

여행을 떠날 때 각자의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멍때리고 싶을 때 떠납니다. 올해 들어 회사에서 참 여러가지 일들이 벌어졌는데 견디다 견디다 임계치를 넘어서는 수준까지 와서 휴가를 내고 며칠 쉬기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는 분 소개로 암자에 들어가서 진짜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다 오려고 했는데, 요즘은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이 있다 보니 전부 그 걸 추천 하더라고요. 템플스테이도 좋지만 저는 그냥 혼자 있고 싶었던 거라 검색을 해봤습니다.

혼자 머물 수 있는 암자가 있는지. 그러다 우연찮게 여수 향일암이 기도하는 목적으로 방문하는 사람에게는 방을 내준다는 블로그 글을 보게 됐습니다. 당장 전화를 해서 예약을 했습니다.

여수 향일암 홈페이지가 있기는 하지만 예전에 만들어 놓은 그대로라서 하루 트래픽 한도가 다 차서 닫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게시판 관리도 전혀 안 되고 있어 온갖 스팸글이 가득하죠. 차라리 여수시청 관광과에 전화로 문의를 하는 게 나을 겁니다.

여수관광명소 : 여수 10경 향일암

다른 조건은 없었습니다. 기도하러 온 다른 분이 있을 경우 방을 같이 써야 하며 최대 10명이 한 방에 머물 수도 있다는 것과 절에서 정한 시간표를 지켜 예불에 참석하는 것. 가족끼리 와도 혼숙은 절대 안 된다는 정도였습니다.

어차피 저는 혼자 갈 거라서 모든 조건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여수 향일암은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속초 낙산사, 강화 보문사, 여수 향일암)로 유명한 곳인데 아직 가보지 못했던 터라 꼭 가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없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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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신역에서 여수엑스포역으로 가는 첫 KTX를 탔습니다. 여행이란 느긋하게 즐겨야 한다지만 복잡한 일상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여유는 목적지에 도착한 뒤에 누려도 되니까요.

여수엑스포역에 내려서 관광안내데스크를 찾아 향일암으로 가는 길을 물었습니다. 여수가 관광지라서 그런지 아주 친절하게 잘 알려 주시더군요. 천천히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서 향일암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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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이건 여행이건 항상 들고 다니는 빨간 배낭에 간단한 옷가지만 챙겨 넣고 나왔습니다. 저 빨간배낭은 정말 많은 나라를 유람했네요.

향일암은 여수 시내에서도 한참 더 바닷가 쪽으로 들어간 돌산도 끝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사실 일과가 끝나면 그 유명한 '여수 밤바다'를 보고 싶기도 했는데 섬 끝이라 캄캄한 망망대해 외에는 볼 수가 없었죠.

버스에서 내리면 경사가 상당히 가파른 길을 꾸준히 올라가야 합니다. 절 입구까지는 각종 상점이 관광객을 붙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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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올려다 보고 찍은 사진이 아닙니다. 향일암까지 이어진 길은 과장하지 않고 경사가 45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팍팍해진 다리가 부담스러울 때쯤 향일암 일주문을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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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을 지나 뒤돌아 보면 눈이 시리게 푸른 바다가 시야를 가득 채웁니다. 마침 동백꽃이 막 피기 시작하던 때여서 초록과 빨강의 선명한 대비가 아름다웠습니다.

돌산도라는 섬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향일암은 바위와 어우러진 신비로운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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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을 지나 한참을 또 걸어 올라가면 바위 틈을 통과하는 지점이 나옵니다. 조금 풍채가 좋은 분은 지나가기 힘들 수 있을 정도로 좁습니다. 우회해서 들어가는 길도 있으니 너무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바위 틈으로 나 있는 길은 마치 여기를 통과하면 다른 세상으로 가게 된다는 강력한 암시를 줍니다. 불교적으로 해석하면 '사바세계'에서 '불국토'로 접어든다는 은유를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좁은 바위 틈을 통과해서 지나면 아담한 원통보전(대웅전)과 전각이 지붕을 맞대고 있는 향일암에 당도하게 됩니다. 본존불이 누구냐에 따라 대웅전의 이름이 달라지는데 관세음보살이 본존불일 경우 원통보전이란 이름을 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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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일암 내부는 그 유명세에 비해 넓은 편이 아닙니다. 전각이 옹기종기 지붕을 맞대고 있고, 등산을 하듯 바위 틈 계단을 지나야 다른 전각으로 갈 수 있습니다. 절벽 끝에 지은 암자라서 그렇겠죠.

종무소에 들러 도착했음을 알렸더니 방을 배정해 줬습니다. 전각 뒤로 난 계단을 두 층 정도 내려간 곳에 제법 큰 규모의 요사채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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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틀 동안 머물게 될 방은 바다 쪽으로 창이 나 있고 화장실이 별도로 있는 제법 큰 방이었습니다. 창을 열면 바로 바다가 눈 앞에 펼쳐집니다. 방 입구에는 제가 향일암에서 머무는 동안 지켜야 할 시간표가 크게 붙어 있었습니다.

3월 중순이었는데도 해가 중천에 솟으면 뜨거운 열기가 방 안 가득 차올라서 가만히 앉아 있기 힘듭니다. 커텐이나 블라인드 같은 건 당연히 없고, 에어콘 같은 건 기대하면 안 되겠죠. 수행자는 무릇 부지런해야 하니까 이런 환경이 더 좋을 수도 있겠지만 일반인에게는 극한의 환경일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향일암에 머물 생각이 있는 분은 시기를 잘 골라서 방문하는 게 좋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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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예불과 사시예불, 저녁예불을 모두 참석해야 향일암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점심 공양을 한 뒤 낮 시간은 제 마음대로 쓸 수 있으니 힘들기는 해도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조금 애매한 시간에 도착한 터라 점심공양을 걸렀더니 배가 몹시 고팠지만 어쩔 도리 없이 저녁 공양 때까지는 경내를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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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님도 뵙고.... 바위를 기어오르는 거북석상도 구경하고.... 향일암 뒷산(금오산)을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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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잠시 스치듯 향일암에 오는 분은 금오산을 오를 생각은 못할 것 같습니다. 향일암까지 오는 길만 해도 가파른 경사 때문에 엄청난 체력을 요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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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산이라 등산로는 이렇게 계단으로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저 계단만 오르면 정상이겠거니 하고 오르면 또 계단이 있고, 계단이 있는 셀프 희망 고문을 하며 발걸음을 옮기면 이런 풍경이 발 아래에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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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두 시간 멍때리다 산을 내려와서 저녁 공양을 했습니다. 점심을 걸러서 배가 몹시 고팠습니다. 공기 맑은 산 속에 있으니 식욕이 폭발해서 엄청나게 많이 먹었습니다. 절밥은 배가 쉬 꺼지기 때문에 조금 과하게 먹어두는 게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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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만 해도 저녁 예불을 마치면 시내로 나가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녁 예불은 독경에 축원까지 해서 2시간 가까이 진행됐습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힘들었는데 몇 번 하고 나니 익숙해져서 시간이 금방 가더군요. 여튼 저녁 외출은 못 하고 다음 날 새벽 예불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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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새벽 예불을 마치고 아침 공양을 한 뒤 잠시 방에 있는데 그제서야 해가 뜹니다. 눈 앞에서 이렇게 여유롭게 해가 뜨는 걸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납니다. 황홀한 경험이었습니다.

공양주 보살님이 오늘은 날씨도 맑아서 해가 참 잘 보인다고 저더러 운이 좋다고 하십니다. 실제로 다음 날은 구름이 껴서 일출을 보지 못했습니다.

두번째 날 일정도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갑니다. 새벽 같이 일어나서 하루 일과를 시작해서 하루가 엄청 길 것 같은데 절에서의 하루 하루는 속세의 하루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산 속에 난 길을 따라 능선을 걷기도 하면서 원래 목적으로 삼았던 멍때리기도 마음껏 했습니다. 바람소리, 새소리, 멀리 배 지나가는 소리... 바닥까지 떨어졌던 에너지를 가득 채운 느낌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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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는 최악의 미세먼지가 한반도 전역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속세에서 지친 심신을 달래려고 떠난 여행. 거기서 멍때리며 많은 걸 얻었다 생각했는데 다시 속세의 혼돈 속으로 가야만 하다니... 현타가 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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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일암에 다녀온 지 벌써 두 달이 지났습니다. 아직은 그 때의 기운으로 잘 버티고 있으니 향일암 멍때리기 여행은 성공적인 셈이죠. 또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 붐비지 않는 시절에 다시 한 번 다녀올 수 있기를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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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이런 힐링 여행이 필요하지요. 절에서 몇주간 지낸 적은 있는데... 템플 스테이라고 부르기에도 좀 애매하게 지내다 와서 저는 저런 시간표면 견디기 다소 힘들었을 것 같아요. ㅎㅎㅎ 브릭마스터님 다음에는 또 어디로 가시려나요? ㅎㅎㅎ

담에는 진짜 탱자탱자 멍때릴 수 있는 곳으로 가렵니다 ㅎ

마라도 추천!

뱃멀미가 심해서요 ㅋㅋㅋㅋㅋ

15분인가? 20분만 참으면 될걸요?

절경들이 눈에 보이네요^^ 소소한 재미도 많을 것 같아요!

향일암을 찾는 분들은 대체로 가족 단위 여행객이거나 단체 관광객이 많습니다. 바위산 절벽에 있어 멋진 뷰를 볼 수 있기 때문이겠죠.

와.. 느낌있습니다...
정말 아무생각없이 이렇게 떠나고싶네요...

애들도 제가 힘들어 하는 걸 봐서 그런지 힐링하고 오라고 보내 주더라고요 ^^

ㅎㅎㅎ 다행이네요...^^ 그렇게해서 힐링이 되셔서
맘이 편해지셨다면 더 좋을 것같습니다.

향일암에 있을 때는 진짜 좋았는데 미세먼지 가득한 서울로 가야만 한다는 사실에 현타가 왔어요 ㅎㅎㅎ

ㅎㅎㅎ 너무 아쉬우셨을 것 같습니다..ㅎㅎㅎ

사찰밥 사진은 처음 보는 듯요. 어째 절에서 밥 나올 때 사진찍는 모양새가 좀 ㅋㅋㅋ 보는 사람은 특이해서 좋네요
좋은 경험하고 오셨네요. 부럽습니다.

공양간에서 밥을 먹을 때는 굉장히 조용히 해야 하는데 발우공양도 아니고 해서 눈치 보다가 슬쩍 찍었습니다. 저는 절밥이 맛있더라고요.

그리고 절밥은 밥알 하나도 남기면 안 됩니다. 발우공양을 할 경우에는 먹고난 그릇(발우)까지 깨끗하게 물로 헹궈서 다 마셔야 하죠. 어떤 분들에게는 그게 굉장히 고역일 수 있는데 저는 의미가 있는 행동이라 생각해서인지 아주 편하게 잘 하는 편입니다. ㅎㅎ

우와~브릭님 포스팅 보며 마음껏 힐링합니다!
제가 간 여수와는 전혀 다른 느낌...ㅎㅎ
템플스테이는 꼭 해보고 싶은데...발우공양이 자신없었거든요...
아이 둘 키우다 보니 이제 다 할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ㅎㅎ

향일암은 공식적인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이 있는 건 아녜요. 그리고 템플스테이도 세부 프로그램은 선택할 수도 있다고 들었는데 발우공양 안 하려면 안 해도 되지 않을까요?

한 번 확인해 보세요. 힐링하러 가는 건데 내키지 않는 걸 억지로 할 필요까지 없으니까요 ㅎ

제 마음까지 평온해지는 느낌입니다. 너무 좋네요. 때론 복잡한 도심을 떠나 이렇게 홀로 여행하며 생각을 정리하는것도 새로운 힘을 얻게 해주는 큰 요소 같습니다.

공기만 맑다면 동네 뒷산 그늘에서 부는 바람 느끼고만 앉았어도 힐링이 될텐데 아쉬워요

살짝 더운듯한 날씨에 조금 지쳐있었는데 낙옆 떨어진 나뭇가지보며 눈으로 살짝 더위를 식혔네요 벌써 두달전이라니 시간이 참 빨라요~ ㅎㅎ

그러니까요. 어느새 1년의 반이 지나가고 있어요 ㅠㅠ

오~ 멍때리기 좋아하시는 분이시군요. 저도 멍때리는건 좋아하지만 절생활은 엄두도 못 냅니다. 잔잔하게 글을 쭉 읽다보니 제 마음도 평온을 따라잡은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예불을 두 시간 가까이 하는 줄은 모르고 ㅋㅋㅋㅋㅋ
평온을 드렸다니 다행입니다.

바다를 바라보니 뻥뚫리는 기분이 정말 좋으셨겠어요 ㅎㅎ 앞으로 좋은글 자주 구경하러 오겠습니다 팔로하구가요~!!

바다 끝이라 바람도 엄청 시원해서 정말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죠. 또 가고 싶네요...

몸도 마음도 충분한 휴식이 되셨을것 같네요.
공양과 예불 시간이 만만치 않은 시간인 것 같습니다.
아직은 평안하시다니 다행입니다.^^

막상 할 때는 힘들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전체적으로 많은 영감을 받은 시간이었습니다. 몸도 마음도 푹 쉬었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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