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y 100] 믿을 수 없이 기묘하고, 고통스럽고, 아름다운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last year (edited)

"날이 맑을수록 판공초는 더 아름답다 했다."

<한 달쯤, 라다크>에서 내가 쓴 판공초 에피소드의 제목이다. 처음으로 마주한 판공초는 흐린 날씨에 호수빛은 탁했고 오후가 되어서야 조금 개어 제법 맑은 모습을 보여줬다. 눈부시게 파란 판공초를 만난 건 그로부터 7년 뒤이다. 날이 맑은 날의 판공초는 보정 프로그램에서 채도를 끝까지 올린 듯 쨍했다. 그 때까지도 이 제목은 유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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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떠날 피터님과 막 도착한 스텔라 사이의 날짜를 저울질하다 판공초로 떠난 날은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하늘이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잿빛 하늘에 조바심이 났지만 짐짓 아닌체 하며 하늘이 맑아지기를 속으로 기도했다. 유난히도 변덕스러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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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충했던 하늘은 밥을 먹기 위해 탕체Tangtse에 섰을 때 숨겨놓은 파란색을 마음껏 드러내며 환히 웃었고, 반짝 맑던 하늘은 탕체 곰빠Tangtse Gompa를 둘러볼 때에 다시 먹구름이 드리워져 부슬부슬 비를 몰고왔다. 흐렸다 맑았다 흐렸다 맑았다 어느 장단에 춤춰야 할지 모를 때 우리는 길이 평소와 다른 것을 알아차렸다. 판공초까지는 대략 4~5시간이면 갈 수 있고 길 역시도 잘 포장되어 있어서 당일치기를 한적이 있을 정도로 난이도가 낮은 여행이다. 하지만 다시 찾은 판공은 길을 넓히기 위해 판판한 아스팔트를 전부 깨트리고 양 옆으로 흩뿌려놔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로 가야만 했다. 몸이 허공에 떴다 착지하기를 수차례 반복하면 고통의 보상이라도 되는 냥 아주 짧게 아스팔트 길이 나타났다. 흔들림 없이 부드러운 그 길은 너무도 달콤했지만 찰나에 불과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스팔트 길이 인간의 편안한 여행을 보장하는 건 극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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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먹구름 잔뜩 낀 판공초를 본 적이 있기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희뿌옇고 흐린 그 때의 그 모습을 생각하며 심드렁하게 바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호수의 모습이 드러나면서 반전은 시작된다. 하늘은 흐렸지만 호수는 흐리지 않았다. 맑은 하늘을 담아내느라 미처 보여주지 못했던 오묘하고도 다채로운 진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결코 작지 않은 호수는 세계였다. 그 안에는 군청색의 동해바다도, 옥빛의 카리브해도 푸른 빛의 남태평양도 내가 알지 못하는 무수한 바다의 빛깔이 담겨있었다. 큰 붓으로 휘휘저어 하나의 쨍한 색으로 통일된 맑은 날과 달리 섞이지 않아 더 매혹적이었다. "날이 맑을수록 판공초는 더 아름답다." 는 가설은 이 날 깨졌다. 날이 맑지 않아 더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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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락 마을에서 하룻밤자고 아침에 일어나니 설국이 펼쳐져 있었다. 새벽에 내린 눈은 산과 대지를 뒤덮었고 어제 보았던 그 풍경은 하얀 옷을 뒤짚어 썼다는 이유로 다른 낯을 하고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그 풍경은 사진으로만 보던 알래스카와 닮아있기도 했고 북극 같기도 했다. 밤새 기침을 하고 근육통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음에도 의자를 밖으로 빼 그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책을 읽었다. 책의 제목은 <방랑자들>, 방랑을 하는 사람만이 길 끝에서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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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영화 <세얼간이>의 촬영 장소를 들렸다. 세얼간이의 영화 장면을 따라하며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만든 엉덩이 의자, 오토바이, 드럼통 등등의 알록달록하고 조악한 조형물이 복사 붙여넣기라도 한듯 쭈욱 이어져 있었다. 인도인들은 신나서 행복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었지만 조형물들은 아름다운 천혜의 자연 판공의 얼굴에 길게 난 흉터 같았다. 흉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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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도인들이 없는 낡은 룽따 쪽으로 가서 조용히 호수를 들여다 봤다. 그때까지도 하늘은 흐렸는데 우리가 자리를 옮긴 곳에만 빛이 들고 하늘이 열려있었다. 태초에 세계가 열린 것 처럼. 그 아래 맑은 날에만 볼 수 있는 쨍한 파란빛의 호수가 펼쳐졌다. 1박 2일간 판공은 시시각각 달라지는 자신의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줬다. 1박 2일의 여정은 경이로울 뿐 아니라 신묘하기까지 했다.

돌아오는 길에 사츄쿨 곰빠shachukul gompa에 들렸을 때는 돌풍과 눈보라가 치고 있었다. 옷을 굳게 여미고 곰빠 안으로 들어갔다. 큰 곰빠를 홀로 지키고 있는 승려는 우리에게 법당을 열어 보여주고 자신의 방에서 차를 대접했다. 그는 사진을 한 장 보여주며 물었다.

"혹시 이 분을 아나요?"
"톡딴 린포체 Togdan Rinpoche 아닌가요?"
"어제 저녁에 돌아가셨어요."

승려는 슬픔이 가시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톡딴 린포체를 3년간 보좌한 적 있다는 그는 사진 앨범을 열어 우리에게 보여줬다.

"작년 사츄쿨 곰빠에서 있었던 축제에서 린포체가 참댄스를 추시던 모습이에요. "

여든이 넘은 고령의 린포체는 참댄스를 연습하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승려는 린포체와의 추억을 곱씹듯 사진을 한장 한장 보여줬고 나는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애써 슬픔을 참으며 그리움 가득한 눈빛으로 사진을 바라보는 승려의 모습이 너무도 애달팠기 때문이다. 주책맞게 쏟아지는 눈물은 승려의 방을 나와서도 멈추지 않았다. 눈보라가 치던 하늘은 다시 잠잠하게 개어 있었다. 우리가 전날 방문한 탕체 곰빠와 당일에 방문한 사추쿨 곰빠는 디꿍 까규파였고 그들의 수장은 톡딴 린포체였다. 도저히 종잡을 수 없었던 1박 2일 간의 날씨는 라다크의 큰 스승이었던 톡딴 린포체 서거의 예견이자 추모였던 셈이다. 그러니 그 변덕스러웠던 날씨가 이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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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추모를 이어가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도로인 창라에서 거센 눈보라를 몰고왔고 우리는 해발고도 5,000m 이상의 도로에 네시간을 갇혀있었다. 고산병으로 인한 각기 다른 증상으로 고통받던 우리 중 스텔라는 가장 심각했던 상태였다. 손톱이 퍼래지고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던 스텔라는 두차례 산소를 마시고 혼절한 상태로 가까스로 레에 도착했다. 나중에 정말 위험할 수도 있던 상황이란 친구들의 말에 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창라에 갇혀있었던 순간은 괴로웠지만 이상하게도 꼭 거쳐야만 할 하나의 과정인 것 처럼 느껴졌다. 아니, 하나의 과정이었다. 믿을 수 없이 기묘했고, 믿을 수 없이 고통스러웠고, 믿을 수 없이 아름다웠던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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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라님 괜찮으신 거죠?

 last year 

네 이제 건강하십니다!!!!

오오.... 얼마나 고단하면서도 아름다운 여행인지!

 last year 

믿을 수 없는 장면과 사건의 연속으로 꽉 짜여진 여행이었어요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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