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식장이 망한 자리에 들어온 식자재마트

in #busy5 years ago

주말, 다소 느슨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낸다. 느즈막히 일어나려고 따뜻한 빛을 느끼며 계속 눈을 감고 이불에 몸을 비빈다. 그러나 계속 누워있는 게 녹록찮다. 정해진 시각이 되면 틀림없이 새벽닭이 우는 것처럼 아이는 요일을 가리지 않고 오전 8시쯤이 되면 눈을 뜨는 까닭이다. 간혹 바깥 날씨가 너무나 흐린 날이면 시간은 다소 연장되는 일이 있지만 오늘은 맑은 날.

내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기척으로 알 수 있다. 아이는 누운 채로 눈을 뜨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꿈에서 벗어날 준비를 한다. 여기가 어딘지, 지금이 언제인지가 파악되면 고개를 돌린다. 아이의 시선은 내가 알 수 없는 기준에 의거하여 어떤 날은 좌측에서, 어떤 날은 우측에서 멈춘다. 발끝을 잠시 꿈틀거린 후 입을 연다. "엄마, 아빠. 오늘 출근하는 날이야? 나 어린이집 가는 날이야?"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침묵은 곧 '아무도 출근하지 않으며 아무도 어린이집에 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타겟을 정한다. "아빠, 놀자."

나는 눈을 감고 병원의 환자가 된다. 의사의 지시를 듣는둥 마는둥하며 응응거리다가 아이가 울음의 울음이 터질 때쯤 정신을 차리고 역할을 바꿔 혀꼬인 소리를 내는 의사가 된다. 병원놀이를 하다가, 책을 읽다가, 소풍놀이를 하다가 40여분을 그렇게 놀고나면 아내가 깬다. 나는 인상을 쓰며 '이 시끄러운데서 참 잘도 주무시는 그 능력이 부럽소'라는 말을 눈으로 전한다. 아내는 그 길로 부엌에 서서 무언가를 뚝딱거리며 만들어내고 아침식사 시간이 찾아오면 나는 식구들의 눈치를 보며 슬쩍 방으로 들어가 다시 침대에 눕는다. '여보, 어제 새벽에 내가 뭘 많이 먹어서 아침은 안 먹어도 될 것 같아'

아이는 끈질기게 방을 드나든다. '아침을 먹어야 키도 크고 건강해지는거야, 아빠가 안먹으면 나도 밥 안먹는다' 등등의 협박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누운지 3분만에 식탁에 앉는다. 적당히 시간을 보내면 벌써 정오, 아이의 의지에 따라 오후 일정의 장소가 밖이 될지 집이 될지 정해진다.


그럭저럭 오후와 저녁일정을 보내며 들어간 길 부근에 식자재마트가 보였다. 예식장이 있던 자리다. 전에 동료직원이 여기서 결혼식을 했었는데 청첩장을 받고도 무슨일이 있었던건지 축의금만 전해주고 가지 못했던 예식장이다. 그 직원도 아이를 기르느라 직장에서 보이지 않을 무렵에 그 자리에 식자재마트가 들어선 것 같다.

쓸데없이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건물을 보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가게 간판의 폰트가 전자제품 매장 느낌이 나기도 한다. 어쨌든 청첩장의 글자 몇 개로 기억되어 있던 장소이기에 있는 그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밤의 주차장이 더운 여름날 한낮의 주차장으로, 현관의 쇼핑카트 옆에 등산복을 입고 서있는 사람들이 정장을 입은 노인으로, 계산대의 직원들은 축의금 접수처의 혼주 가족으로 덧칠된 느낌이다.

41242 (5).jpg

오늘 지나가다 굳이 마트에 들른 이유는 대구의 대형마트 휴무일이라서, 오늘 저녁식사로 먹을 삼겹살과 내일 아침으로 먹을 카레 재료를 장만하기 위해서, 아이가 뜬금없이 용가리 돈까쓰를 먹고 싶다고 강력하게 어필했기 때문에.

41242 (4).jpg

신부대기실이었을 화장실을 지나면서.

41242 (3).jpg

웨딩홀 무대 측면의 벽이었을 동물사료 코너를 지나면서.

41242 (1).jpg

폐백실이었을 후리카케 코너를 지나면서.

41242 (2).jpg

신부가 입장할 때 걸었을 그 길을 지나면서 오늘의 목적을 모두 달성했다. 예전에 참석하지 못한 결혼식을 뒤늦게 참가하며, 예전에 먹지 못한 웨딩뷔페를 뒤늦게 집에서 삼겹살로 대체하며 주말밤을 보낸다.

마트는 7층짜리 건물의 1층과 2층에 입점해 있었는데 2개 층 양쪽으로 4개의 웨딩홀을 마트로 재개장 한 것 처럼 보인다. 4개의 신부 대기실 중 하나는 냉동창고로 쓰이고 있었다. 아, 거기서 대기하셨던 신부, 지금 춥지는 않을런지.

Sort:  

짱짱맨 호출에 응답하였습니다.

3.1 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북이오는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많은 문헌의 오류를 수정, 정성스럽게 다국어 버전의 디지털 문서로 출간하였습니다.

3·1 독립선언서 바로가기

널리 공유되기를 희망하며, 참여에 감사를 드립니다.

Congratulations @daegu! You have completed the following achievement on the Steem blockchain and have been rewarded with new badge(s) :

You made more than 3000 upvotes. Your next target is to reach 4000 upvotes.

Click here to view your Board
If you no longer want to receive notifications, reply to this comment with the word STOP

To support your work, I also upvoted your post!

Support SteemitBoard's project! Vote for its witness and get one more award!

웨딩홀이 마트로??

ㅎㅎㅎ나름 구경하는 맛이 있더라고요.

Coin Marketplace

STEEM 0.30
TRX 0.12
JST 0.033
BTC 64513.89
ETH 3155.04
USDT 1.00
SBD 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