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

in #busy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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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게감과 고통은 상대적인 것이라 비교 우위를 논할 수 없지만, 고통이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지, 또한 일상생활에 미치는 파장이 어느 정도인지를 포괄적으로 고려하여 비교적 mild한 수준에서부터 severe한 수준까지 대략적인 고통의 깊이를 가늠해 볼 수는 있습니다.

mild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기준 중의 하나는 자해 시도가 나타나는 경우입니다. 자해는 자살 시도와는 다릅니다. 정말 죽으려고 시도하는 것은 자해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게 무 자르듯 딱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해로 시작했다 하더라도 의도치 않게 죽게 되는 경우도 있게 마련이니까요.

요즘엔 병원이나 상담소 모두에서 자해를 시도한 청소년을 간혹 만나게 됩니다. 학교 생활도 잘하고 또래관계에도 별 문제가 없었던 아이가 어느날 칼로 손목을 그어 놓습니다. 그냥 긁힌 거라고 하는데 누가 봐도 그냥 긁힌 게 아니고, 부모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죠. 그렇게 아이 손을 붙들고 정신과나 상담소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자해를 왜 할까요? 자해를 하는 동기는 저마다 각양각색이겠지만, 제가 만났던 환자나 내담자의 경우에는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는 것이 어렵고 그래서 육체적인 고통을 가함으로써 그 감정을 가시화하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감정은 인식되면 흘러갑니다. 자해할 때의 고통과 뒤따르는 쾌감은 마치 감정이 흘러가는 것과 같은 효과를 줍니다.(그것이 매우 역기능적인 방식이라 하더라도.) 제가 만났던 어떤 환자는 자해를 하고 나면 기분이 편안해진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살아 있다는 느낌도 들고, 무엇보다 공허했던 마음이 다시 채워지는 느낌이라고 했습니다. 힘든 감정에 대한 나름의 대처였던 것이죠.

그에 더해 부모에게 자신의 힘든 상황을 호소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자해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말로 표현하는 게 어려우니까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자해하는 청소년을 보면 주변에 자해를 하는 아이가 또 있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자신이 좋아하거나 혹은 동경하는 친구를 따라서 '호기심'에 자해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라 하더라도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한 게 사실입니다.

이유가 뭐가 됐든 간에 자해를 하는 것은 나 좀 도와달라는 일종의 signal입니다. 자해와 자살 시도 간의 연관성은 제가 알기로는 의외로 높지 않습니다(사견에 가깝고 논문을 좀 찾아봐야 하겠습니다). 더욱이 자살 시도에서 자살 성공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더 희박합니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죽는 것이지 한 번에 죽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감안한다면, 자녀나 가족 중의 누군가나 지인이 자해를 한다고 해서 크게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앞에서도 말씀 드렸다시피 도움을 구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정신과 전문의나 상담심리사 및 임상심리전문가, 정신건강임상심리사 등을 찾아갈 수 있게 지지적으로 안내해 주시는 것이 당사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강압적으로 끌고 가면 문제가 악화될 뿐입니다. 화를 내거나 매우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도 당사자를 위축되게 만들고 근본 문제를 수면 아래로 더 가라앉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자해를 삶의 어려움이 크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그 신호를 잘 수신하여 무엇이 당사자를 힘들게 하고 있는지 알아주는 것이 중요할 수 있습니다. 보통은 가족에게는 잘 얘기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중요할 수 있겠습니다.

뒤숭숭한 마음으로 점심을 먹고 폭염 속에 산책을 했네요. 일전에 지도교수님께서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 몰라서 늘 가슴 졸였던 내담자와의 관계에 대한 얘기를 하셨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지도교수님은 종교가 있으셨는데, 상담자로서 최선을 다하되 매일 기도를 했다고 하네요. 다른 이의 안위를 걱정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은 분명 알게 모르게 내담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내일은 성당에 가서 잠깐이라도 내담자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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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의 안위를 걱정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은 분명 알게 모르게 내담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옮아간다면 그만큼 내담자에게 힘이 되는 것도 없을 듯해요. 상담에 관해 잘 모르지만 그럴 것 같아요. 글을 거꾸로 읽었는데요. 문단이 자립적이면서도 긴밀하여 잘 읽혀요. 새삼, 제대로 된 상담은 귀중한 일임을 느낍니다.

거꾸로 읽으셨군요. ㅎ 내담자에 대한 관심과 내담자를 염려하고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떤 상담 이론이나 기법보다 우선인 것 같아요. 귀중한 상담을 하는 상담자가 되고자 공부도 수련도 게을리 하지 않아야겠고요~

우리 아이도 사춘기시절 많이 힘들어서 자해를 시도해본 적이 있다고 고백해와서 제가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불과 얼마전이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방치하고 있었는데 좀 고민을 해보아야겠군요.

놀라셨겠습니다. 고민이 많이 되실 것 같아요.

학생들이 일종의 과시같은 의미로 몸에 새기는 것들.

가령 담뱃불로 맨살을 지진다거나, 커터칼 따위로 글씨를 새겨
자신의 몸에 흉터를 남기는 그런 경우가 종종 있죠.

이런 것도 본문에 언급하신 그런 심리에서
나오는 자해로 해석할 수 있나요?

자살의도를 포함하지 않는 자해의 경우 크게 1. 감정조절을 위해 혹은 2. 부모나 기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어떤 '의도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자해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또래관계에서 세보이려고 하는 자해는 후자에 해당할 것 같습니다. 자신이 처한 사회적 상황을 자해라는 방법을 통해 변화시킴으로써 더 많은 이해, 인정, 관심을 받고자 하는 행동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런 경우라 하더라도 타인의 이해나 사회적 인정을 얻는 방법으로 자해를 택한다는 것은 그 청소년이 부모와의 관계나 선생님과의 관계나 또래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이 있고, 감정조절에서도 어려움이 있다는 증거일 수 있겠죠. 하지만 이건 가설일뿐 왜 자해를 하는 것인지 그 청소년 입으로 직접 들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아아..상세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얼마전 본 학생이 팔뚝이 영 이상해서 데려다 놓고 보니
저런 자국들이 있길래 좀 나무라듯이 타일럿던 기억이 있는데
좋은 대응이 아니었던 것 같네요...

저는 과시욕이나 위협의 의미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이야기했는데,
그러고 나서도 영 깨름직하고 기분이 먹먹한게 걸렸는데
역시..접근부터가 틀렸군요...

그만큼 관심이 있으니까 타이르셨던 것이겠죠. 어떻게 보면 화내거나 나무라는 게 보편적인 대응 방식일 수도 있겠습니다. 너무 자책하실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좋은 글입니다.
자해와 자살시도가 다르다는 것에 새삼 놀랐네요. 자해는 단순히 자살을 위한 행동으로 인식하고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학문적으로는 자살의도가 없는 자해와 자살시도를 구분짓고 있어요. 하지만 본인도 죽으려고 자해한 것인지 살려고 자해한 것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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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보팅을 했었는데 어째서 안 되어있지; 어차피 0.01이지만요ㅎㅎ

글이 무거워서 덧글은 달지 않았었습니다. 이런 주제는 뭐라고 운을 떼기 힘든 것 같아요. 상담도 중요하지만 기도를 해준다는 것도 확실히 좋은 영향을 미칠것 같네요.

스팀잇 로딩이 느릴 때, vote 안 찍힌 것 같아서 vote 다시 누르면, 이미 vote 찍힌 상태라서 오히려 vote 취소되는 경우가 있죠. 그런 경우 아닐지. 0.01이라도 누가 vote 눌렀나 전 유심히 봅니다. 매의 눈으로. ㅎ 감사합니다.

타인을 위해서 하는 기도는 종교적인 차원을 떠나서 다른 사람에게나 자신에게나 유익한 것 같아요.

'감정은 인식되면 흘러갑니다. 자해할 때의 고통과 뒤따르는 쾌감은 마치 감정이 흘러가는 것과 같은 효과를 줍니다.'

그렇군요. 그게 바로 물꼬였군요. 좀 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자애로운 따뜻한 마음은 지혜를 주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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