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 1948, post # 10

캐더린 위더스비 교수 씀

스탈린 루즈벨트.jpg

우리는 1945년가을까지 소련이 미국의 일본점령정책에 대한 소련의 비토권한을 인정하도록 설득하는 동안 한국문제를 보류시켰다는 것을 알아 보았다. 중요한 문제에 대한 긴 협상이 마침내 12월 초에 이루어졌으며, 모스크바는 일본에 대한 미국의 완전한 통제를 받아 들여야 했다. 동시에 미국무장관 번즈(Byrnes)는 몰로토프에게 갑자기 2주후에 모스크바에서 제2차 연합국 외무장관 회담을 제안했으며, 그리하여 영국, 소련 그리고 미국 외교관들은 1월 UN 총회에 앞서 그들에게 어려움을 야기시키는 문제에 대한 토의를 할 수 있었다. 몰로토프는 자신의 관심을 한국을 포함한 다른 지역으로 돌릴 수 있었기에 즉각 동의했다.

미국 대사 해리먼이 모스크바로 가기 몇주전에 국무장관 번즈는 그에게 소련이 일본 점령 정책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합리적으로 행사하는데 만족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우리의 정책과 이익에 반하는 다른 수단을 통해 극동지역에서 자신들의 안보를 구축하기 위한 시도”를 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영국 외무장관 어네스트 베빈 또한 모스크바 회담을 우려했다. 그는 영국과 미국이 회담을 준비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이 없고 크리스마스 이전에 합의에 도달하라는 압력을 받음으로 인해,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는 해결책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즈는 밀고나갔으며, 소련과 지속적인 협력을 보여주기로 결정했고 이는 미국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반대자들의 비판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번즈의 한국문제에 대한 5개 전략은 미국과 소련의 목표와 인식에 엄청난 괴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국무장관은 만일 소련으로부터 한국의 독립과 통일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루즈벨트의 신탁통치 구상을 폐기하려고 모스크바에 갔다. 소련이 독립한국의 수립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 워싱턴은 제한된 기간동안 유엔에 의한 신탁통치를 수립하려고 있으며 이는 이탈리아의 식민지에 대해 미국이 제시했던 안과 유사했다. 미국 외교관들과 군사지도자들은 한국에서의 자신들의 위치가 “군사적 그리고 정치적인 관점에서 노출되어 있고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최소한 한반도의 북쪽부분이라도 자신들의 안보 완충지로 통제하고자 하는 모스크바의 결정을 잘 알지 못한채, 그들은 신탁통치를 소련이 한국을 석권할 가능성을 줄여주는 방법이라고 비현실적으로 보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신탁통치가 점령국간의 긴장을 낮추어줌으로써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소련 외교관들은 모스크바 회담에서 미국의 외교관들보다 보다 분명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유용한 해결책을 만드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들은 독일과 여타지역의 점령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미국과 협조를 지속해야할 필요가 있었고 그리하여 한국에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간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바람을 수용하는 것은 소련의 안보에 위험했다. 소련외무부가 모스크바 회의를 위해 마련한 간단한 보고서는 “만일 소련의 정책이 일본 침략자들의 군사적 능력의 파괴, 한국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 한국 인민의 민주주의(사회주의를 의미) 운동의 확대와 그들의 독립을 준비하는 데 있는지, 그런데 한국에서 미국의 활동을 판단해 보건데, 미국의 정책은 정확하게 정반대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미국은 일본거류민들과 한국인 협조들이 지도적 위치를 떠났지만 구 식민지 행정기구들을 유지하고 있으며, 일본거류민들은 정치적 권리와 경제적 권리를 누리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한국에서 일본을 배제해야하는 “하나의 점령정책을 만들어내고 실현하는 것이 한국의 통일을 회복하는데 주요한 장애물이다”

소련 외교부가 본 두번째의 문제는,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한 서울의 비공산주의 정부는 한반도가 소련의 공격을 위한 교두보로 이용될 수 있는 위험을 만들어 내는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이 극동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우려의 근거가 될수도 있는가의 문제는 한국의 미래정부의 성격에” 달려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남한에서의 “다양한 정당과 단체들의 난립, 그들간 통합의 결여 그리고 미국의 교사”는 모스크바가 요구하는 성격을 지닌 한국정부를 만드는데 심각한 장애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 회담의 소련 대표들은 한국의 정부를 만들기 위한 어떤 메카니즘을 제안하였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소련 외무부가 이런 중요한 임무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한 복잡하게 얽힌 방안들을 알아보겠다.

[근거자료]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Volumes II and VI;

Jacob Malik, “On the Question of a Single Government for Korea,” 10 December 1945, Archive of the Foreign Policy of the Russian Federation (AVPRF) Fond 0102, Opis 1, Delo 15, Papka 1, Listy 18-21;

Petukhov, Adviser to the Second Far Eastern Department, “Soviet-American Occupation of Korea and the Question of Economic and Political Ties Between North and South Korea,” December 1945, AVPRF, Fond 0102, Opis 1, Delo 15, Papka 1, Listy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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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is really fascinating as always. Won't you agree?

of course. why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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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소련 외교부의 입장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연이어 설명되고 있네요..소련 대표들이 제안한 것, 그 방안들에 대한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저는 또 번역을 기다려야 겠습니다^_^;

신탁통치를 주장했던 쪽이 누구인가에 대한 이견도 있긴 하더군요.
정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해방후 한국사를 보면서 많이 절감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일본거류민들은 저시점에선 거의 일본으로 돌아갔지 않았나요?

fantastic..and thank you for support..you are on my auto-upvote...see my latest..tha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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