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보단 감상이 좋은 이유 - '좋았다'의 의미

in #kr-daily5 years ago (edited)

‘좋았다.’라는 건 그 세계에 의심없이 몰입해 빠져들었단 말이다. 실재하지 않는 허구의 세계가 내 안으로 거부감없이 밀려들어와 개인의 언어와 감정으로 재해석된다. 실제처럼 그 세계를 경험한다. 찬찬히 누군가가 공들여 설정한 값에 주파수를 맞추고 흐름에 말려든다. 대강의 역사 빈약함 의문을 남기는 가공인물에 마음을 쏟고 감정을 나눈다. 상상력이 빈약한 사람에게도 세계를 재창조할 힘을 준다. 모든 이야기와 모든 예술은

자각하기 위해 현재에 살기위해 깨어 있기 위한 훈련이 필요하단 걸 알면서도 늘 이야기를 찾게 된다. 현실에서 멀리 의식을 띄어 놓고 강렬한 흡입력으로 자아가 흐려지는 이야기에 매력을 느낀다. 책이 좋다. 영화가 좋다. 만화가 좋다. 웹툰이 좋다. 음악이 좋다.


20대 초반에 내 주위 가장 친밀하게 지내는 사람들은 모두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나 사계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예술가 Y는 영화관에 가는 거만큼 바보스러운 건 없다고 했다.

“왜?”

의례 묻는 질문이 아니다. 알고 싶어서 물었다. 그 답이 정말로 듣고 싶었다. 몇 분 간 고민하던 Y는 조용하고 단호하지만 상대가 다치지 않도록 배려를 담아 대답했다.

“깜깜한 공간에 갇혀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는 그 느낌이 끔찍해.”

이제와 생각해보니 당연하다. Y는 허구의 이야기가 필요한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삶이면 충분… 아니 본인의 현실이 훨씬 흥미로울 것이다. 깨어 있는 자에게 거리를 둔 채 장시간 객체로서 감흥없이 모니터를 바라봐야 하는 그 긴 시간은 고문과 다름없겠지. (Y는 음악을 참 좋아했지만, 듣는 것 만큼 부르는 걸 좋아했다. Y 덕분에 자미로콰이 노래를 들었다. 우리는 언젠간 ‘G-Dragon은 예술가야. 뭘 좀 아는 것 같아’란 실없는 말을 진지하게 나눴다)


에쿠니 가오리의 다른 소설에는 관심 없지만, 고교시절 처음 읽었던 ‘반짝반짝 빛나는’이란 소설을 참으로 좋아했다. 책장을 넘기면 변형되지 않고 영원한 한 세계의 시절이 박제되어 있다. 그들은 늘 그대로다. 쇼코, 무츠키, 곤. 시간이 지나 그들을 잊고 무심결에 다시 찾아도 언제나 그 자리에서 같은 이야기를 같은 방식으로 들려준다. 그게 위안이 된다. 독립적으로 실재하고 있는 듯한 착각.

고등학교 시절에는 비정상적인 설정에서 정상과 균형을 찾아가는 그들의 삶이 좋았다. 쇼코가 조울증을 겪고 별 거 아닌 일에도 예민하고 자주 울면서 강단 있게 자신의 주장을 펼쳐가는 삶이 나와 조금 닮은 것 같아서 좋았을 지도. 지금에 와서는 늘 자신과 애처롭게 싸우는 쇼코가 안스럽지만 곧 괜찮아질 걸 알기에 마음이 아프진 않다. 그때도 쇼코는 무츠키를 사랑하는구나 생각했는데 지금도 같다. 참 많이 사랑하는구나.

그들은 그저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을 만들어나갈 따름이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처럼. 누군가에게는 자연과 음식, 엄마와의 추억이. 쇼코에겐 은사자 공동체와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별이 자신의 안식처이다.


도망가지 않는 동시에 집착을 버리고 감정과 분리해 명료하고 평온한 자아의 해방을 원하지만, 마음 속 동요를 잔뜩 일으키는 이야기 속에 빠지는 법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적당히 그 세계를 감상하는 건 원하지 않는다. 역시 바보처럼 몰입해서 그 세계가 끝나면 현실도 끝나리만큼 미련하게 동일시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순간이 포기할 수 없이 짜릿하다. 이야기 중독자. 이 쾌감을 끊기란 역시 쉽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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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해서 그 세계가 끝나면 현실도 끝나리만큼 미련하게 동일시하는 그 순간이 포기할 수 없이 짜릿하다.

이런 작품을 만나면 너무 행복하고 감사하죠.
20대때 이런일기를 쓴적이 있는데
30대가 훌쩍 넘고 아이를 낳고 무언가에 빠져들 수가 없네요. ^^

맞아요! 장르불문 짜릿한 작품은 언제나 환영이자 사랑이죠

미미님 현실에 충실히 살아가시는군요 현명하세요 ㅋ전 영원히 철들지 못할 것 같아요;;

지금도 늦지 않았어~ 나도 아이들 덕분에 무언가에 빠져들고 있는데~^^

도망가지 않는 동시에 집착을 버리고 감정과 분리해 명료하고 평온한 자아의 해방을 원하지만, 마음 속 동요를 잔뜩 일으키는 이야기 속에 빠지는 법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적당히 그 세계를 감상하는 건 원하지 않는다. 역시 바보처럼 몰입해서 그 세계가 끝나면 현실도 끝나리만큼 미련하게 동일시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순간이 포기할 수 없이 짜릿하다. 이야기 중독자. 이 쾌감을 끊기란 역시 쉽지 않을 거다.

마지막 구절이 바로 탄트라의 기본 접근 방식이죠. 수행자들이 대상에 끄달리지 않기 위해 조용한 곳을 찾아갈 필요가 없다는 거죠. 매순간 일어나는 경험의 감정feeling/受 자체가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것인데 말이죠. 그런데 어려운 것이 그 에너지에 매몰되지 않아야한다는 것이죠. 완벽한 동일시는 100%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왜냐하면 완벽한 동일시는 무생물, 그런데 그 무생물도 무너지고 사라집니다.

일상에서의 수련 아니 삶 자체가 수련이란거겠죠 어디서나.
피터님 덕분에 언제나 많이 배워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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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님은 작가가 분명함.

으어 스팀잇에선 누구나 작가이니 저도 작가죠 :D 히힛 도잠님도 작가!

글을 읽고나니 저도 엄습하는 그런 쾌감들이 살면서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데 오랫동안 너무 혼자 지냈는가 누가 관심좀 가져 좋으면 하는 맘이 배꼽 밑에까지 차있는듯 하네용.ㅋㅋㅋ
고물상님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요.ㅋㅋ

여행을 가게되면 삶이 너무 흥미로워져서 가공의 이야기와는 멀어지지 않나요? 현실의 쾌감이 더 커지니깐요. freegon님 외로우시군요 ㅠ 친구가 늘 많아보이셨는데 외롭죠 인생
저도 freegon님 글 읽으면서 만나면 참 재미진 분이겠다 싶었어요 :D ㅋ

고물님의 글도 반짝 반짝 빛나는 거 아세요? ^^

으엇 엄청난 칭찬! 파치님 고마워요 ! ㅋ

저도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마음의 고향 하나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

누구나 필요해요 마음의 고향 ! 언제든 찾아올 수 있으니 꼭 찾으시길 :)

오늘은 글이 어렵게 읽히는 것을 보니... 제 마음이 산란한 것 같네요. Y는 지금도 영화관에 가지 않을까요? 아니면 혼자 어두운 방안에서 영화를 즐길까요? ^^

리스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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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븐님 댓글 보니 반갑네요! 리스팀 감사합니다.

글이 잘 안들어왔군요- 어흑 이때 좀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글을 쓴 경향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제 생각엔 아마 Y는 여전히 영화관 가는 걸 좋아하지 않을거에요. 분명 하루하루 재밌게 Y답게 라이브로 살고 있을테니깐요 ㅎㅎ

你好鸭,fgomul!

@ravenkim给您叫了一份外卖!

@robertyan 阿盐 迎着暴雨 开着UFO 念着软哥金句:"没见过你这种脸皮比城墙还厚的人啊,离你八丈远脸皮都弹我这了!" 给您送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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吃饱了吗?跟我猜拳吧! 石头,剪刀,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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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pagex

이 글은, 감상이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끔 하네요. 이런 글이라면 창작보다 감상이 좋지요.ㅎㅎ
에쿠니가오리를 읽은 적은 없지만, '반짝반짝 빛나는'은 꼭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가벼운 책이라서 2~3시간이면 금새 술술 읽으실듯

어느날은 창작의 매력에 빠질 때도 생길지 모르겠지만 전 아직 감상이 좋아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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