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일을 버린 지 오래이려니

in #kr-writing6 years ago (edited)

어쩌면 이 글은 일종의 투병기이다. 낭만이라는 기이한 것에 유달리 베이고 다쳐 병들어 왔다.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사람들아, 이것은 기형(畸形)에 관한 얘기다."(김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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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an Chuong, "외딴 들판에서", 베트남 시골마을에서의 어린시절 기억을 묘사

꿈꾸는 일에는 무언가 낭만적인 면이 있다. 꿈의 미로 속을 헤매다 마주치는 아릿하거나 황홀한 지점들은 자주 낭만이라 불린다. 스탠드 불빛 아래 커피 홀짝이며 시집을 뒤적이는 새벽처럼, 존재의 가장 연한 부분이 감정과 충돌해 잔물결을 일으키며 퍼져나갈 때 우리는 거기서 낭만을 마주한다.

하지만 낭만을 꿈꾸는 특권이 모두에게 허락되지는 않은 것 같다. 선뜻 꿈꾸지 못하거나 일부러 꿈꾸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거부반응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나는 낭만을 두려워해 도주하는 쪽이다. 초연하거나 무심하지는 않다. 오히려 낭만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주위를 맴돌다 반대 방향으로 뛰쳐나간다. 낭만의 부드러움을 열망하는 만큼 생채기가 나는 까닭이다. 그러나 또 슬그머니 돌아와 바위 뒤에 숨어 꿈꾸는 이들을 흘겨보는 것이다.

꿈의 무리들 가운데서도 내가 제일 갈구하는 낭만은 '평화로운 가족 및 친지 관계'에 대한 것이다. 뻔한 이미지다. 명절 때면 모이고, 대소사도 자주 챙기고, 두루 친근하고, 누구에게도 큰 비극은 없는 가족 관계가 꿈의 저편에 있다.

경험하지 못한 것은 제대로 희망할 수도 없기에, 꿈의 본령은 본래 과거의 영토에서 움터나온다. 낭만의 이미지도 그렇다. 나의 가족 로망스에도 거기 현실성을 불어넣는 원초적인 경험이 있다. 열 살 쯤이었던가. 조부모님이라는 구심점이 있었고 일가 친척들이 멀지 않은 곳에 살아서,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명절을 비롯한 대소사 때마다 모여 즐거웠다. 사촌들과 자주 만나 놀았고 어른들께도 종종 안부전화 드렸다. 가장 생생한 장면은 마당에서 함께 고기를 구워먹던 기억이다.

그때의 기억은 온갖 감각들로 넘쳐난다. 청량한 연보라빛의 여름밤, 고기 익는 소리에 섞여드는 모기향 냄새, 타닥타닥 숯불 검게 타는 소리, 어른들의 허허 대화소리, 아이들의 하하 웃음소리, 귓가를 맴도는 모기 날개짓 간지러워, 발을 뗄 때마다 아래서는 조약돌이 구르고, 멀리 보이는 것은 녹슨 초록빛 대문, 휘감는 빨간 장미넝쿨, 강 흐르는 소리, 달빛의 감촉, 개구리 우는 소리, 이따금씩 매미 우는 소리..

이제 기억 속에서 낡아가는 것들의 이름이다. 점점 회색빛이다. 어른들은 날로 쇠약해졌고, 아이들은 너무 커버렸다. 사고가 병마를 타고 휩쓸어 지나갔다. 조부모님과 몇몇은 이름 석자로 남았다. 중심도 잃고 먹고 살기 팍팍한 우리는 전화로 생존만 확인한다. 그마저 부담스럽다. 하지만 어린시절의 감각들이 생생해, 혹시나 싶어 잠자리에서 손을 뻗지만, 꿈은 그 언저리에도 닿지도 않는다. 그때마다 나는 조금씩, 조급한 속도로 부스러진다.

어중간한 지식과 어중간한 감각 사이에서, 나는 어떤 열망의 성취든 스러져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회의 섞인 확신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꿈꾸는 일은 드는 품에 비해 얻어지는 것이 덧없어 멀리 해야 한다 결론짓는다. 그러나 꿈꾸는 일은 폐기하지도 못해 혼란 속에서 헤매인다- 랑 반데룽, 랑 반데룽.

불완전한 도주의 반복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손에 넣은 적 없기에 아득한 꿈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져 달아나고 빈 자리엔 촌스러운 진지함만 애통하다. 나는 도주의 궤적에 '낭만'이라 이름표 붙인다. 실현되길 바라는 그리움과 불가능하다는 비웃음을 함께 반죽한다. 이름이라기보단 주소에 가깝다. 이 낭만이란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나중을 기약해 거처를 기록해두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주구검일 뿐이다.

낭만 앞에 불능이다. 낭만이라 불리는 것들에서 반사적으로 그림자를 먼저 보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낭만은 무지개처럼 손에 잡히지 않은 채로 아름다운 무엇이고, 거꾸로 이 성취의 어려움이 아름다움의 근거이고, 이것은 순간을 즐기는 일로는 낙관하기 어려운 어두움이라고 굳게 믿는다.

허나 나이를 먹을수록 과거가 길어져서 불길하다. 과거의 무게가 늘어날수록 추억거리도 많아져 낭만은 세를 불릴 것이다. 그때도 병든 상태로 견딜 수 있을까? 언제까지 모른척 할 수 있을까? 낭만과 마주하는 다른 방법을 익혀야 하는 것은 아닌가? 아, 꿈꾸는 일을 버린 지 오래이려니 더 많은 꿈을 꾸게만 된다.

(가든팍님의 글쓰기 공모전에 출품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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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주는 @kittypunk님 안녕하세요! 모찌 입니다. 알흠다운 @ab7b13님이 너무너무 고마워 하셔서 저도 같이 감사드리려고 이렇게 왔어요!! 분위기있는 하루 보내시라고 0.4 SBD를 보내드립니다 ^^

(jjangjjangman 태그 사용시 댓글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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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차에 도전하세요

그리고 즐거운 스티밋하세요!

항상 감사합니다~

낭만에 대한 체험적 재정의. '낭만'을 끈질기게 붙들고 씨름하는 글이네요. 신선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타인이 낭만을 말할 때도 거기서 자꾸 그림자를 보려 하게 됩니다. 제 몸이 글보다 먼저 낭만을 '체험적 재정의'하고 있습니다ㅋㅋ 감사합니다

참으로 섬세한 글입니다.
잔잔한 마음이 되어 저도 옛기억을
둘춰보게 되네요.

과거를 보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큰 용기가 됩니다!

어린시절 조부모님을 구심점으로 모여 한껏 낭만을 만끽했던 기억으로, 자꾸만 달아나려는, 실현되기를 원하는 그러한 낭만으로 돌진해가실 날이 곧 오기를 희망합니다. 솔직함으로 끝까지 달려가는 아주 매력적인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돌이켜보니 비로소 낭만이 되는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당시엔 몰랐구요. 사람 일이 돌아가는 게 늘 그렇듯이 깨달음은 언제나 몇 걸음은 늦네요 ㅎㅎㅎ 그 간격 사이의 현기증을 능력껏 묘사해 보았는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도망가고 싶지만 한편으로 낭만의 한 가운데를 점령하고 싶어하는 솔직한 감정이 잘 보입니다. 과거의 꼬리가 점점 길어지는 건 불가항력이니까 조만간 낭만의 추억을 감당하시려면 마주보셔야겠는데요..ㅎㅎ

으으 정확한 진단에 몹시 부끄러워지네요...ㅋㅋㅋ 그 마주보는 방법을 아직 잘 모르겠어서 불안할 따름입니다. 연륜이 생기면 더 나아질까요.

아름다운 추억만 커졌으면

순진하게 말해서, 좋은 기억만 남아 취급하기 편하게 된다면 수월할텐데 말이죠..

다시금 읽어보게 되는 글이네요... 너무 좋아요. 좋은 글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저것 써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섬세한 표현에 깊은 따스함을 느꼈어요. 글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 아주 먼 친척의 장례식에 갔던 기억이 꿈처럼 떠올랐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돌아보니 온갖 감각으로만 기억된 시절이네요.

긴 여운에 글을 여러 번 읽었어요. 오늘은 홍보해 대신 @감사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역시 가끔은, 사실은 그보다 훨씬 자주, 지금 이 순간보다 과거가 더 생생한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ㅎㅎ

저도요. 하루하루가 흔적 없이 바스라지는 기분이 드네요. 근데 왜... 가이드독 안 찾아오는 거죠? ㅠㅠ

포인트가 없나본데요.ㅋㅋ

@kittypunk님! 왕래가 빨랐는데 어쩐지 피드에 안 뜨더라니...팔로우가 안 되어 있었네요. 분명 했는데 이상하네...

@ab7b13 제이미님 말씀대로 포인트 문제일까요ㅋㅋ 신경써주신 마음만 해도 감격을..
@jamieinthedark 더..많은..관심을..부탁드리옵니다..ㅎㅎ

혹시 몰라 찾아보니 포인트는 있는데... 이상하네요. 나중에 올려주실 다른 글에 다시 한번 시도해볼게요. ㅋㅋㅋ

@jamieinthedark 저도 가끔 팔로우가 이유없이 끊겨있는 적이 많아요. 제 실수겠거니 생각하고 늘 넘기는데 스팀잇 문제일까요?? 엉엉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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