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기억 #1. 만주 마적단

in #kr5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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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서로서로 조금씩 나누고 싶은 파치아모입니다~^^

두 달 전 할아버지를 호국원에 모셔드렸었습니다. 예전에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평소에 좋아하시던 김진명 작가의 책들을 같이 보내드렸었는데, 할아버지는 평소 무엇을 좋아하셨는지 알지못해 아무 것도 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대신 할아버지를 오랫동안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고민의 끝에 다다랐을 때 볼품 없는 글 쓰기 능력이지만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단편으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끔 할아버지께서 해주셨던 이야기를 토대로 작성한 글이라 재미는 없을 거에요. 사실 제가 글을 잘 쓰지 못한 탓이에요ㅠㅠ 하지만 이런 삶을 사신 분이 계셨다는 사실 하나만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6월 호국의 달을 맞이하여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조국을 위해 제 한 몸 돌보지않고 희생하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할아비는 말(馬)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

끊으신 줄 알았던 담배를 입에 무시며 할아버지는 나지막히 이야기하셨다. 순간 꽤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민망함에 도라지라는 낯선 상표에 잠시 눈길을 주었다가 붉게 타들어가는 담배의 가장자리로 다시 초점을 옮겨왔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 재주는 없으시지만 가끔씩 들려주시는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좋았다. 종종 이전에 하셨던 이야기를 반복해서 하실 때가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새로운 이야기를 하실 게 분명해 보였다. 담배꽁초가 재털이 가장자리에 비벼지기를 기다리다 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

"에이~ 할아버지. 말이 왜 무서워요? 전쟁 때 바로 옆에서 포탄이 터졌을 때나 끝도 없이 인민군은 밀려오는데 소총이 고장났을 때, 아니면 죽은 척하고 누워있는데 두더지(확인 사실을 하는 적군을 가르키는 은어)가 나타났을 때가 더 무섭지 않으셨어요?"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드리기 위해 조금 과장스럽게 질문했다. 짐짓 무표정으로 나를 한 번 스윽 훑어보시고는 느긋하게 담배 한 모금을 빨아들이신다. 이내 담배보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게 낫다고 판단하셨는지 붉게 타오르던 장초를 손가락으로 눌러 끄셨다. 내 손가락이 뜨거워지는 것 같은 느낌에 얼굴이 찌푸러졌다. 일그러진 내 표정과는 상반되게 아무 일 없다는 듯 덤덤한 표정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은 할아버지는 천천히 입은 떼셨다.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칠흙 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하지만 더이상 어두워지지 않는 어둠을 사무치게 원망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나이가 7살 즈음이었다. 80년하고도 몇 년을 더한 아주 오래 전 일이라 내 기억이 잘못되었을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니 기억할 수 밖에 없다...

부모님과 형님, 그리고 나는 만주에서 마적단에 쫓기고 있었다. 그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을 척살하기 위해 왜놈들은 종종 만주의 마적단과 결탁하곤 했었다. 또한 내부에서 같은 조선인을 밀고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피난 길은 더러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날 만큼은 달랐다. 우리의 피난 길은 결코 안전하지 못했다.

사실 만주벌판에서 승마술의 정점을 찍고 있는 마적단을 피해가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 한 일이였다. 그들은 기동성뿐만 아니라 추격술 또한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상대가 지칠 때까지 달라붙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것이 마치 하이에나와 같은 족속들이었다. 그나마 지리에 밝고 은폐에 숙달하신 아버지의 주도로 버텨왔지만 더이상 방도가 없어 보였다. 함께 떠나 온 피난민들이 벌써 반 이상이나 이탈되고 있었다. 잠시 수풀 속에서 숨을 고르던 아버지가 찬찬히 가족을 둘러보고는 나지막히 이야기했다.

"대하야. 조금만 더가면 강이 나올거다. 물살 때문에 마적단이 더 쫓기는 힘들끼라. 이제부터 니가 가장이니까...... 어머니랑 동생 잘 보살펴야한다."

바로 코앞에서도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운 어둠이였지만 아버지의 눈에 고인 물방울이 순간 빛나는 것을 보았다. 입술 위로 흩어지는 짭쪼름한 물방울에 입술을 꼬옥 깨무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는 이 말을 남기고 마적단 대열의 옆구리 쪽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 어둠을 깨뜨리는 총격 소리와 뒤이어 마적단의 고함소리가 고막을 뚫고 지나갔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대부분의 마적단들은 아버지 쪽으로 방향을 틀었는지 말 발굽소리가 멀어져 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소수의 마적단은 끈질기게 우리를 추격했다. 잠시 후 눈앞에 나타난 강줄기는 반가웠지만 지척까지 접근한 마적단은 우리를 더 절망스럽게 만들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새어나올 것 같았다. 그때 헝크러진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형이 말했다.

"소하야. 여기 수풀 속에 꼼짝말고 있어라. 어머니 손 꼭 잡고 있어야된다."

어린 나이였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형도 아버지의 뒤를 따라 가려는 것을...

정수리에서 느껴지는 형의 온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형은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첨벙이는 물소리가 마치 ‘나 여기있다 빌어먹을 마적단새끼들아!! 어머니와 동생을 내비둬라’라는 저항의 소리처럼 들렸다. 한참 동안 물소리와 총소리가 뒤척이더니 이내 고요해졌다. 참고있던 눈물이 잠기다만 수도꼭지처럼 자꾸만 새어나왔다. 지척에서 가뿐 숨을 몰아쉬는 호흡소리와 나를 향해 달려들 것 같은 말발굽 소리의 공포에 눌려 소리내어 울지 못하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던 걸까? 나라를 수탈한 왜놈일까? 아니면 사람 목숨을 주머니에서 물건 꺼내듯 쉽게 거두어가는 마적단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가족의 안위보다 나라의 안위를 먼저 생각한 아버지를 비롯한 독립군들일까?

이런. 내가 미쳤나보다. 그 분들을 욕되이다니 단단히 미친게 틀림없다. 나라 잃은 백성이라면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는 것 뿐이다. 다만 우리 조국이 병들고 힘이 없어 그런 것일 뿐 그분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

그들은 우리의 사랑스러운 가족이다. 우리의 친절한 이웃이고, 나라의 위대한 영웅임을 잊지 말아야한다...


“내가 먼저 가야했는데... 우리 대하 대신 내가 가야했는데....”
심하게 앓다가 겨우 기력을 회복하신 어머님은 그날을 두고두고 가슴에 담아 두셨다. 남편과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한 미안함과 자식을 먼저 보낸 죄책감으로 남은 여생을 보냈다. 며칠 후 할아비라도 지켜야한다면 남으로 방향을 틀었다. 한참을 내려온 후 우리는 강원도 홍천에 자리를 잡았다.


증조할아버지와 큰할아버지, 그리고 증조할머니를 모시는 묘가 없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는 화장을 하여 바다에 모셔드렸기 때문에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시신을 수급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였습니다. 마적단에게 쫓기다 헤어진 날을 기일로 정하여 증조할아버지와 큰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낸다느 사실을 알고나서 내가 그동안 얼마나 가족들에게 무관심하게 살아왔는지 퍼뜩 깨달았습니다. 그 후로 할아버지댁에 자주 찾아뵙고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나누어보려 노력했습니다.

다음에는 할아버지께서 홍천에서 자리 잡으신 이야기부터 625전쟁에 참여하셨던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써볼까합니다. 필력이 워낙 딸리다보니 글 쓰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네요. ^^;; 천천히 포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 ㅎㅎ

내일이 벌써 현충일이네요. 호국 정령들께 깊은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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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오늘을 잘 살아야겠습니다.

오늘 더 뜻 깊게 보내세요~^^

잘 읽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편하게 사는 것도 팥쥐님 할아버지 같은 분들이 계셔서 입니다. 더러운 입을 놀리는 것들도 있지만 아직 우리 같이 그 분들을 마음 속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역사를 모르는 나라는 존재의 가치 가 없습니다.
리스팀 하고 jcar 토큰 보팅 요청 하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 사과님~^^
남들이 뭐라든 저희들 가슴에는 영원히 기억에 남겠죠~!! 오늘이 더 의미 있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주1권 독서하고 서평쓰기 챌린지 #46 성공보팅입니다. (4/4)

땡큐베리 감사~!!

안녕하세요. @banguri님의 jcar 보팅 선물입니다.

할아버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기록으로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기억 나는대로 기록을 해두는 게 중요하니까요

평소에 더 써둘걸 그랬나봅니다ㅠㅠ
틈 나는데로 적어서 올려야겠어요~!!

울보 호돌형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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