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금지된 날’ 낯선 카페에서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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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피아니스트>

낙방을 피해 보름 정도 여행을 다니고 돌아와 보니 나는 금지되어있었다. 비록 공휴일에 한해서였긴 했지만, 수 년 동안 다녔던 카페의 출입금지 공지를 보고나니 그 카페의 문을 열 이유가 없어졌다.

“평일을 제외한 때에 공부를 목적으로 카페에 오시는 분들은 출입을 금합니다”

용기라고 해야 할까, 오랜 갈등의 끝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커피 한 잔을 시켜두고 그 가게에 민폐를 끼치지 않는 시간을 생각해봤다. 식사 시간 전후를 피한 3시간. 나는 그 3시간 정도는 아무도 앉지 않는 한적한 자리, 특히 1인석을 골라 글을 쓰는 건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나 보다.

나는 커피 맛보다는 카페의 경치를 중요시 한다. 내가 즐겨 찾는 그곳은, 적어도 이 지역에서는 가장 절경이 보이는 위치에 있다고 확신한다. 애석하게도 그 빼어난 공원을 사람들 역시 사랑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지금은 국가공원지정을 앞두고 연일 축제가 벌어지고 있다. 주말마다 멀리서 온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이 카페 앞은 이제 영혼의 정화와는 거리가 먼 곳이 되었다. 카페 앞에 주차되는 벤츠, BMW, 이따금 벤틀리 같은, 이름 대면 알만한 슈퍼카들을 보면 주인의 생각이 바뀌리라는 것쯤은 쉬이 예상해야만 했다.

어쨌든 나는 금지되었다. 그리고 나 스스로도 그 카페에 가는 걸 금지한다. 돈이 몰리는 주말에는 비켜줬다가 한적한 평일에나 와서 싸구려 커피를 팔아달라는 지저분한 발상에 동참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도 몇 년 동안 거의 매일 방문하며 커피 수천 잔을 시켜온 사람에게 말이다. 다만 그 멋진 경치를 보면서 글을 쓸 수 없다는 게 조금 아쉬울 뿐.

이제 시작일 뿐이다. 앞으로 나를 향한 금지는 더더욱 늘어날 것이다. 낡은 노트북과 끈 떨어진 가방을 보이면서 나는 무수한 금지를 겪었지만 앞으로는 어쩌면 숨 쉬는 것조차도 금지될지 모른다. 나를 향한 세상의 태도를 보면 볼수록 나는 희망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게 되지만, (그 잃어버림이란 내가 희망을 달성했을 때 이런 세상을 위해 노래해야하는가 하는 문제다) 그 반발력 또한 대단해서 마음속 깊은 곳에 어떤 강한 힘이 꿈틀거리게 만든다.

오늘은 이방인처럼 낯선 카페에 앉아 글을 쓴다. 경치는 예전만 못하지만 공원은 보이는 곳에서. 아무도 앉지 않는 자리가 하나쯤은 있는 곳에서. 3시간이 지나면 칼같이 일어나는 남자를 대수롭게 쳐다보지 않는 점원이 있는 곳에서.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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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드 플로르로 가는 길은 내게 있어 자유에 이르는 길이었다. - 장 폴 사르트르.

유사한 경험 이후 저는 프랜차이저만 갑니다. 알바생이 아리따운 프랜차이저. ^^

사르트르가 그런 말도 남겼군요

저 같은 경우는 프렌차이즈에서 쫓겨난지라 비밥님과는 반대의 상황이네요 :(

헉.... -,.- 보통 프렌차이즈는 그렇게 안할텐데... 희안한 가게군요. 점주가 별난건가? ㅋ

카페든 음식점이든 가게가 흥함에 따라 주인의 그릇이 점점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대다수의 곳들은 경민님이 가신 카페처럼 이런 저런 규제가 생기면서 주인장의 욕심과 작은 그릇이 보이는 반면, 일부 소수의 장소들은 여전히 인간미 넘치는 모습을 보이더구요.

경민님의 '낯선 카페' 가 또다른 아지트가 되길 :)

어감의 차이인 것 같아요. 이익을 추구하는 이에게 이익을 추구하지 말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요. 다만 가게의 사정을 충분히 설명하는 '양해의 글'이었거나, 차라리 깔끔하게 일주일내내 출입을 금지했다면 가게의 전략적 승부수라 여기고 겸허히 떠났겠지요. 그러나 이 카페의 경우는 손님에게 부당한 대우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이익은 실현해주길 원한다는 점에서 질적으로 매우 수준 낮은 경영을 보여주고 있군요.

셀레님이 말씀해주신 것처럼 인간미가 넘치는 곳도 분명히 있어요. 대학 시절 후배들을 이끌고 단편 영화를 촬영 하던 중에 단골 카페의 사장님이 스텝 전원에게 무상으로 커피를 준 일은 아직도 잊지 않고 있죠.(그래서 저는 촬영이 끝나고도 내가 아는 사람 모두에게 그 카페를 이용할 수 있도록 권했지요!)

어쨌든 저는 세상은 불신해야하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고 믿습니다. 새로운 아지트가 제 영혼을 기르는 요람이 될 수 있으면 좋겠군요 :)

Your post is golden s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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