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의 '명령불복종'

1976년 6월 5일 우리가 살았던 이상한 나라 .

1976년 6월 5일 한 30대 초반의 남자가 영등포경찰서에 잡혀온다. 살인 강간을 저지른 흉악범도 아니고 절도나 사기범도 아니었다. 그는 원주시청 식산계에서 임시직원으로 일하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그의 구속 사유는 기이하게도 ‘명령불복종’이었다. 군대를 늦게 가서 적응을 못하고 나이 어린 상관에게 항명한 것이라면 헌병대로 가야지 왜 영등포 경찰서일까. 그것은 그가 예비군이었기 때문이다. 즉 군인이 아니었다.

예비군훈련을 상습적으로 회피해 고발됐을까 싶지만 그것은 향토예비군법 위반이지 군법상의 명령불복종이 아니다. 민간인에게 내려진 ‘명령’은 대관절 무엇이며 그는 왜 명령을 불복했는가. 황망하게도 그 명령이란 예비군 지휘관의 단발령이었다. 화곡동에 있던 예비군 훈련장에서 00부대 대령이 머리가 길다고 깎으라고 하자 “하루 훈련 받자고 머리를 자르냐?”고 거부하다가 귀가조치 됐고 부대가 그를 명령불복종으로 고발한 것이다.

유신시절 흔했던 두발단속 장면

여기에 경찰은 사전구속영장까지 발부받아 구속했다. 당시 향군법 6조 2항은 “훈련을 위하여 소집된 때에는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고 이를 어기면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명기돼 있었는데 머리 깎지 않는다고 예비군이 구속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군인도 아닌 예비군이 머리를 깎지 않는다고 구속되는 희한한 나라. 아무리 총화단결에 반공제일주의에 유신의 깃발 시퍼런 시기라 해도 이 사건은 꽤 파란을 일으켰다. 야당인 신민당은 “신체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며 예비군의 인권 침해”라고 목청을 돋우면서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를 늘어놓는다. “하루 소집돼 훈련받는 예비군에 대해 예비군 중대장이 뭐든지 명령할 수 있다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다!”

이 사건에 관한 ‘각계의 의견’ 또한 재미있다. 이때 신문에 실린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우리나라는 참 엄청난 격변을 거쳐왔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이마를 짚게 된다. “지난 달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갈 때 미리 집에서 머리를 깎고 갔으나 그것도 길다고 해 부근 이발소에서 다시 깎았다. 이제는 됐겠지 하고 훈련을 받으려니 다짜고짜 군인들이 달려들어 또 깎는 것이 아닌가. 좀 심하다고 느껴졌다”(김영호, 24 회사원). 요즘 같은 시대에 예비군들에게 이랬다가는 폭동이 나도 대단한 폭동이 날 것이다. 군인도 아닌 민간인의 머리를 기간병들이 달려들어 싹둑싹둑 잘라버리다니.

그러나 예비군 중대장의 말은 단호하다. “예비군도 소집되면 일반 군인과 같다. …… 퇴폐풍조 일소를 범국민적으로 벌이고 있는 이때 장발을 하는 등의 정신 상태로 어찌 훈련을 받을 수 있겠는가”(김정현 대위 30세). 이 사람의 눈에는 경찰의 장발 단속 기준인 “옆머리가 귀를 덮고 뒷머리가 옷깃에 닿거나 남녀 구분 불가능한 긴 머리, 파마나 여자 단발 모양 머리”등을 한 사람은 정신 상태가 삼복더위에 썩어가는 고등어보다도 더 썩어 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비군 두발 단속 기준은 뭘까? “모자를 눌러 썼을 때 뒷머리와 옆머리가 손에 잡히지 않고 단정해야 함.” 그러니까 구속된 예비군은 이 머리를 거부했다고 철창으로 간 것이다.

1976년 6월 19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독자 투고는 30년 뒤의 독자를 깔깔 웃게 만들었다가 치오르는 서글픔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장발에 대한 당국의 단발 조치에 대해 나는 환영해 왔고 찬사를 보내 왔다....... 요즘 젊은이들의 머리칼을 보노라면 남보다 지나치게 혐오감을 느끼는 나였기에 동생들에게 머리를 깎으라고 권해 동생들로부터 시대감각에 뒤떨어진 누나라는 소리를 종종 들어오기도 했다."

아, 박정희 대통령 보시기에 심히 건전한 생각을 가진 자랑스러운 중진국 대한민국 여성이었으리라. 그런데 이 여인의 가정에 묘한 일이 벌어진다.

"남편이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갔다가 머리를 깎인 채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생각해도 길게 느껴지지 않던 아빠의 머리였기에 머리가 깎인 게 이상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우스꽝스러운 아빠의 머리를 보고 웃음부터 먼저 터뜨렸더니 아빠는 “당신은 뭐가 우습다고 웃는 거요. 이 머리로 내일 어떻게 사람들을 만나지?” 하면서 내 웃음을 막아 버렸다."

참 눈치 없는 여성이었다. 그러나 이 여성은 ‘눈앞에 떠오는 아빠의 모습’을 통해 점차 현실에 접근해간다. 저 우스꽝스러운 머리란 한 개인의 머리칼뿐 아니라 한 인간의 권리와 존엄에 대한 폭거의 결과였던 것이다.

"급작스런 말투에 나는 입을 가린 채 아빠의 머리를 살펴보았다. 긴 머리보다 흉할 정도로 깎아 올린 아빠의 머리가 미관상 좋지 않았고 여러 사람을 상대하는 아빠의 직업도 고려할 때 아빠의 신경질에 수긍이 갔다. 예비군이라고 해서 무조건 군대식의 스포츠형 머리를 강요하는 건 사회생활이 군대 생활의 연장이라는 느낌마저 든다고 하면 지나친 생각일까."

이 아주머니는 남편의 참담함과 분노를 이해하게 되고 이런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지만 결국 투고의 끝은 이렇게 난다. “당국의 적절하고 현실적인 예비군 조발 기준을 정했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람이다.” 문제는 ‘조발’ 기준이 엄하고 느슨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기준 자체의 유무가 문제가 되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우리는 참 이상한 나라에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