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스톤의 느끼는 산사 이야기) 대흥사 표충사를 거닐며steemCreated with Sketch.

in #oldstone6 years ago

여관에서 조금 올라가다 보면 바로 오른편에 사리탑전이 자리하고 있다. 통상 올라오는 길 한켠에 서 있는 것과 달리 대흥사 사리탑전은 절 입구 바로 앞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있다. 절에 오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사리탑전을 그냥 모른척 지나칠 수 없게 되다. 이 절에 오는 사람이라면 꼭 사리탑전을 들리라는 무언의 부탁같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대흥사의 사라탑전은 다른 절과 다르다. 보통의 절에 있는 사리탑전은 그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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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 누구인지를 굳이 밝히지 않는 것이 선가를 이어오는 정신일진데 대흥사 사리탑전은 그 주인이 누구인지를 하나 하나 밝혀 놓았다. 그 사리탑전의 중심에는 서산대사의 승탑이 자리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이었던 서산대사가 대흥사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정작 서산대사의 승탑은 그리 화려하지 않았으나 이후 세워진 승탑은 서산대사의 사리탑보다 훨씬 화려한 듯 했다.

이미 사리탑전에서 서산대사의 흔적을 느꼈던 지라 절에 들어가자 마자 바로 표충사로 들어갔다. 대흥사가 유네스코에 등록된 이유도 바로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일으켜 싸웠던 서산대사의 역사적 의미 때문이기도 하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표충사가 대흥사의 존재적 의미 한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찾아 오는 사람도 별로 많지 않아서 인지 땅이 푸석푸석해서 밟는대로 쑥쑥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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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에서 제일로 치는 규율이 불살생이다. 그런 승려들이 칼과 창을 들고 일어나 왜군과 생명을 다투는 전투에 참가했으니 스님들로서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 서산대사는 왜란이 끝난이후 조정에서 내려주는 벼슬을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또한 승병으로 싸웠던 스님들도 불살생의 계를 어겼다며 스스로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그 전후의 논공행상에서 모두 빠지고 말았다. 임진왜란당시 스님들이 약 3만명 이상 전사했다고 한다. 그정도 피해라면 조선의 절집들이 거의 모두 문들 닫을 정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교과서에서 스님들이 호국불교의 정신에 입각해서 왜군과 싸웠다며 애국심을 강조하는 이야기로 승병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정작 불살생의 계를 깨고 전투에 참가했던 스님들이 어떤 마음 어떤 생각을 했을까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을 하지 않은 듯 하다.

이미 해는 하늘 높이 올라가서 머리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대흥사에 가시면 표충사를 한 번 찾아보시기 바란다. 별로 사람들이 찾지 않는 표충사에 가보시기를 바란다. 그 당시 승려들이 왜 칼과 창을 들었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숭유억불의 유교사회에서 승려들이 목숨보다 중요한 계를 버리고 칼과 창을 들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 그냥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애국이라는 패러다임으로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나라를 침탈당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지키기는 것이 불가의 계보다 더 중요하다고 그럴 듯 하게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말의 위기상황에서 스님들이 임진왜란 때처럼 나서지 않은 이유는 또 무엇일까 ? 임진왜란이 끝난지 불과 200년도 안되어 조선은 열감의 침입에 시달리게 되었다. 결국 조선은 일제의 지배하게 들어가게 되었다. 임진왜란때 그렇게 싸웠던 스님들이 일제의 침략에는 왜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을까 ?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한여름 뜨거웠던 표충사를 거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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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지연 학연은 ... 언급하기 거시기 한 부분 입니다만, 몇자 적어 봅니다.

  • 승병, 우리 민족사에서 수많은 전란이 있었고 그 가운데서 승려들이 참전한 사례는 무수히 많습니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승려 3만이 맞서 싸웠고, 화랑의 수신계로 세속오계(임전무퇴와 살생유택)를 만든 이도 진평왕 때의 원광법사입니다. 통일 후의 신라는 별도의 승병을 양성했습니다. 후고구려의 궁예도 그러한 승병이 군벌로 발전한 경우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 고려때에는 군제에 항마군이 있었습니다. 몽골의 침략 때에 적장 살리타이를 꺾은 김윤후도 승병입니다. 무신 집권 시에도 문벌귀족과 연결된 승병은 무신 정권의 가장 큰 견제 세력이였습니다.
  • 그러한 전통이 적어도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했던 조선 전기까지도 이어왔고, 휴정이나 유정과 같은 명망있는 고승들이 이러한 승병을 규합하여 왜적에 대항했지 싶네요. 또한 조선의 군제가 진관체제(Area Defece )에서 경제적인 제승방략체제(Man to Man)로 바뀌면서 지역방어에 공백이 생기는 곳에 승영사찰을 지어 승려를 통제하고 안보를 맡긴 부분도 있습니다.
  • 이러한 의승방번제는 영정조때에도 혁파하지 못하다가 갑오개혁 때에서야 폐지됩니다.
  • 이러한 조선의 오랜 승병 전통을 알고 있는 총독부는 1911년 사찰령을 공포하고 조선의 전 불교사찰을 총독부 직할에 두었습니다. 또한 그 가운데서 권상로(후에 동국대 초대총장) 같은 친일부역자들이 나서서 '임진왜란 때 승병처럼 승려들이 대동아 전쟁에 지원해야 한다'며 '참전이 성불'이라며 식민지 조선의 불교계를 이끌었습니다.
    .....
    요즘도 조용하지 않은 절집을 보면 참으로 거시기 합니다. ....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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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공부 많이 했습니다.
말로만 호국 불교했는데 실제로 보니까 그런 말을 할 만 하군요

개인적인 생각으로, 조선시대 때 스님들은 사실상 예비군 비슷한 역할을 했던 게 아닐까요? 군역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시에는 노동력을 제공하기도 하고, 전쟁이 나면 예비군처럼 동원되기도 했던 것 같아요.
실제로 신도시 한양 건설이나 북한산성 남한산성 축성에 스님들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하잖습니까? 남한산성에는 절이 6-7곳 있었다고 하더라구요. 지금도 제가 아는 것만 해도, 2곳 남아 있습니다. 단지 도량의 역할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넓지도 않은 공간에 절이 그렇게 많이 있을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2곳의 절이 불과 5분 거리에 있거든요. 성곽 유지보수도 하면서, 유사시 수비도 하는...그런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측됩니다.
올드스톤님 글을 보니까, 조선후기에는 스님들이 왜 적극 나서지 않았을까 저도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지배층인 유학자들에 대한 반감이 깔린 가운데, 삼정이 문란해 지니까, 스님들에 대한 조정의 통제력을 잃게 되었고, 조직적으로 동원하기 어려운 상태가 아니었을까?하는 추측을 해봅니다. 민족감정이 없는 건 아니었을 겁니다. <토지>를 보면, 동학이나 독립운동하는 사람들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하지 않습니까. 단지 조직적인 움직임은 올드스톤님 말씀대로 별로 없었던 것 같네요.
역사공부한 적 없는, 개인의 상상입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그런 듯 합니다. 종교도 시대에 따라 다 의미가 달라지니까요

태국의 사원은 한국의 사찰과 같은 느낌이 안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보다 보니 이제는 다정감도 느끼고 있습니다. 포스팅 하시는 한국의 사찰 너무 좋습니다. 제가 잊기를 잘하여 자주 못어지만 앞으로 자주 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태국의 사원을 구경하고 싶습니다.

오늘 아유타야에서 찍은 사진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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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t Borom Puttharam-왓 보롬 풋타람 사찰입니다.

자전거로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인 아유타야 문화유산 일주하고 왔습니다. 그 사진 중 하나입니다.

스님들은 속세를 떠나 있다 나라가 위기 상황이면 창을 들고 내려 오셔 뜻을 모았는데 지금은 속세와 가가이 하며, 속세의 부를 저장 하고, 이젠 속세의 사람을 뛰어 넘는 부를 축척하며 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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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울때 가셨네요..!
터덜 터덜 걸으며 느끼는 산사의정취에
고독을 즐기며, 살아온 발자취를 회상하기 딱 좋은
계절이 가을이 아닌가 싶은데요~^^
스톤님 글 읽다보니 불현듯 제가 떠나고
싶어지네요.
계절이 계절인만큼 이맘때 떠나는 여행지로
번잡한곳 보다는 조용하다 못해 고요한 산사
로 드라이브삼아 다녀올까 합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저도 다시 조만간 길을 떠날 생각입니다.

Wow...my lovely friend oldstone...lovely post and photography.,,😱💕really i love you

Thank you so much

우리는 그저 교과서에서 스님들이 호국불교의 정신에 입각해서 왜군과 싸웠다며 애국심을 강조하는 이야기로 승병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정작 불살생의 계를 깨고 전투에 참가했던 스님들이 어떤 마음 어떤 생각을 했을까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을 하지 않은 듯 하다.

불교를 깊이 알지 못해 규율이 부딪히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대로 그저 교과서에서 승병들이 의병 활동을 했다는 것 정도로만 알고 있죠.

위에 @i2015park님께서 댓글로 승려들이 참전한 예들을 몇 개 적어주셨는데, 그렇다하더라도 제가 알고 있던 불교의 성향이랑은 조금 거리감이 있기는 하네요 ㅎㅎ

우리가 호국불교라고 하는데 그것이 모두 역사적 배경이 있는 듯 합니다.

그날만큼은 불교정신을 버리고 나라를 지켰던 스님들 멋지네요

스님들은 파계를 하는 것이 었으니 칭송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생각할 점이 많네요.
정말 살생을 피하는 스님들이
목숨을 걸고 전쟁을 했다는 진실이....
또 시대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인 점도...

그렇지요. 어디에 방점이 찍히는가에 따라 판단도 달라지는 법이니까요.
세상에 절대적인 진실과 진리는 없는 듯 합니다.

중생의 고통 눈 앞에 있는데... 원칙의 준수가 중요했을까요. 그 원칙도 중생을 구원하는 것이 목적일텐데요. 원칙에 매몰되지 말고, 그 원칙의 목적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원칙대로만 하면 목적을 달성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 않을까요.

서산대사 선택처럼요^^ 오늘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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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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