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과 예술, 그리고 전시공간

in #vr6 years ago (edited)


Spread 0099 – Take direction, Brian Kasstle, 2012

기존 건축은 현실에 기반을 둔다는 점에서 태생적 한계를 가진다. 이 한계는 크게 두 가지로, 건축물 자체가 가지는 내재적 한계와 건축물과 외부공간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외재적 한계다. 내재적 한계란 물리적 제약이 주를 이룬다. 지면 위 존재하는 건축물은 항상 중력을 고려해야 하며 이는 부재의 선택에도 영향을 미친다. 더불어 한정된 현실의 공간은 너비와 높이의 한계를 만든다. 반면 외재적 한계란 건축물은 위치하는 곳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그것이 건축물의 설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고려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설계자가 된 집짓기를 상상해보자. 나는 지붕을 아주 길게 빼고 싶다. 이 상황에서 받쳐주는 기둥이 없다면 안전 규제는 둘째 치더라도 그것은 시공과정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 중력이 지붕을 아래로 끌어당길 것이고 설령 지어진다 한들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떠안아야 한다. 더군다나 그 지붕을 투박한 철근 콘크리트 대신 한 장의 날렵한 통유리로 원한다고 하자. 유리의 면적이 커질수록 만들어내는 과정은 불가능에 가까워질 뿐 아니라 유리의 이동, 설치 과정이 제대로 수행될 확률은 더 낮아진다. 문제는 중력과 부재만이 아니다. 아무리 많은 돈이 있다고 한들 지구에서 오만킬로미터 너비의, 혹은 높이의 건축물을 만들 수는 없다.

한편 외재적 한계 또한 명확하다. 용도지역 같은 법적 규제를 떠나 현실에 위치하는 건축물은 필연적으로 주변 요소들과 관계를 맺는다. 설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이트-외부환경이다. 건축물의 위치가 서울 한복판인지 남쪽 끝 바닷가인지, 올망졸망한 집들이 가득한 골목인지 빌딩이 우거진 대로변인지, 해는 어디서 뜨는지 바람은 어느 방향으로 부는지, 수많은 요소가 고려대상이 된다. 이 요소들을 무시한 건축은 좋은 건축이 될 수 없다. 결국, 현실의 건축이란 수많은 다른 건축물에서부터 그 위치가 가진 공시-통시적 맥락까지 모든 것들과 어우러짐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한계는 현실에 지어지는 건축물이라는 전제를 가지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러나 가상현실은 다르다. 가상현실 공간에서 중력은 원한다면 만들어 낼 수도, 부분적으로 무시할 수도, 크기를 변화시킬 수 있는 제어가능한 변수가 된다. 데이터로 존재할 부재 또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얼음보다 단단한 물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용광로에 흐르는 끈적이는 무쇠를 정원 연못에 채울 수 있다. 너비와 높이는 무한하며, 배경의 맥락은 무에서부터 새로운 창조까지 모든 것이 가능하다. 가상현실의 건축은 새로운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인간의 창조적 사유는 많은 영역에서 일어났다. 그중 감각으로 표현되는 예술은 사유를 보다 자유롭게 표현했다.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영역을 탐구했으며 기존에 없던 시도들을 만들어냈다. 나는 예술이 가진 이 열린 특성을 주목했다. 더하기, 빼기, 섞기, 부딪히기 등 온갖 시도들이 일어나는 예술은 그만큼 그것이 부드럽게 담길 자유로운 그릇을 원한다. 그리고 수많은 제약이 존재하는 현실을 벗어나 가상현실은 예술 작품의 그릇으로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상현실은 단순히 공간을 넘어 경험을 다룬다. 단절된, 그러나 완벽히 몰입될 하나의 총체적 경험은 예술의 맥락과 닮았다.

미술 작품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작품을 독립적으로 감상하지 않는다. 작품은 어울리지 않는 액자에 끼워져 있기도 하며, 때로는 붐비는 전시실의 인파 속 떠밀려 감상하기도 한다. 게다가 미디어를 통한 작품 정보의 전달은 첫인상을 결정하기도 한다. 이러한 외부 맥락들은 작품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가상현실에 기반을 둔 전시 공간을 생각해보자. 수많은 제약들로 가득한 현실의 전시 공간과 달리 가상현실은 단순한 화이트룸을 넘어 작가의 의도를 극대화할 전시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작품과 전시 공간의 분리가 아닌, 전시 공간까지 작품의 영역 안에 결합 될 수 있는 것이다.

가상현실 전시 공간만이 만들어낼 특성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특성은 언급된 전시 공간과 작품의 결합이다. 가상현실 전시 공간은 제약들로부터 자유롭기에 현실에 기반을 둔 전시 공간보다 예술이 가진 창발성을 표현하는 데 유리하다. 작가는 그의 의도에 맞는 공간을 구상할 수 있으며, 가상현실은 이 구상의 폭을 무한히 확장해준다. 작품과 더 긴밀히 결합한 전시 공간은 작품의 몰입을 극대화해줄 것이다. 둘째, 가상현실 전시 공간은 작품을 사용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지금까지 많은 작품은 그 오리지널리티를 보호해야만 했다. 작품은 손댈 수 없으며 눈으로만 감상하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가상현실에서 작품은 데이터로 존재하기에 관람자는 작품을 얼마든지 변용, 변주할 수 있다. 관람자는 작품에 무언가를 더 그려 넣을 수도, 형태를 바꿀 수도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만의 새로운 경험,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 세 번째로 가상현실 공간은 변형이 쉽다. 현실의 전시 공간을 변형시키기 위해서는 전시를 중단하고 재시공을 해야 한다. 하지만 가상현실 전시 공간은 다르다. 업데이트처럼 변화된 전시공간을 만들어내기 유용하며, 변화했지만 기존의 가상현실 전시 공간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 특성은 접근성이다. 네트워크에 기반을 둘 가상현실 전시 공간은 물리적 거리를 초월하여 네트워크가 연결된 누구든 전시를 감상할 수 있게 된다. 나의 작품은 단순히 내가 속한 영역을 넘어 어느 곳으로도 전달 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현실의 제약을 뛰어넘은 가상현실 건축이 어떻게 예술의 영역에서 활용될 수 있는지 이야기했다. 가상현실 건축은 여러 영역에서 사용될 것이다. 그중 예술 영역은 그것이 가진 열린 특성으로 인해 보다 도입되기 쉽고, 그 창발적 성향을 표현하는 데 있어 적합할 것으로 생각한다. 작품과 완벽하게 결합한 전시 공간은 작품의 감상에 있어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낼 것이다. 이는 단순히 전시 공간의 변화뿐 아니라 작품 형태의 변화 또한 만들어낼 것이다. 예술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가상현실은 예술의 새로운 무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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