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의 서사구조로 인한 전사기록의 왜곡문제(홍천 전투와 개화산 전투)

앞에서는 한국전쟁 기습남침론의 문제점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이제까지 살펴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북한의 남침은 기습이라고 보기에는 여러가지에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전략적 작전적인 측면에서 기습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전술적인 측면에서 기습이라고 볼 수 있는 측면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총체적인 측면에서 기습이라고 하기보다는 고의적인 혹은 무능에 의한 총체적인 상황관리 능력의 부재를 기습이라는 말로 덮어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한국전쟁의 초기 작전실패를 북한군의 기습으로 인한 불가항력적인 상황으로 규정하는 것은 정치지도자였던 이승만 뿐만 아니라 작전지휘에 실패했던 백선엽과 유재흥을 위시한 만주군 혹은 일본군 출신에게 서로 도움이 되었다. 한국전을 거치면서 중국군과 일본군에서 유능하다고 인정받았던 장군들이 모두 물러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한국작전의 초기작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바로 그 다음해부터 한국전쟁의 상황을 정리하여 발간한 육군본부의 전사자료를 보면 당시 전사작성과정에서 작전상황일지등이 매우 잘 활용되었다는 정황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 존안된 자료를 보면 전쟁초기의 작전상황일지가 누락되어 있었다. 특히 존안된 자료집에서 자료들이 고의로 삭제되었다는 의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정황도 많이 존재한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한국전쟁 초기를 기습으로 규정함으로써 드러난 문제점의 하나인 다른 전투의 의미를 평가절하하게 된 내용을 살펴보려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미 전편에 춘천전투의 의미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6사단의 홍천전투와 김포 개화산 전투의 의미를 짚어보고자 한다. 우선 홍천 지역의 전투는 중공군 출신으로 구성된 북한군 제 12사단과 함병선 중령이 지휘하던 6사단 2연대의 전투이다. 홍천지역에서 한국군 6사단 2연대는 춘천지역과 달리 처음에는 포병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고 전투를 수행했다. 중공군 출신의 제12사단은 당시 북한군의 최정예 사단이었다. 1950년 3월까지 국공내전에서 작전을 수행하여 전투경험도 풍부했다. 6사단 2연대는 북한군 12사단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함병선 중령의 6사단 2연대는 약 5일동안 홍천에서 원주까지 이르는 도로에서 지연전을 실시함으로써 춘천지역의 6사단 7연대가 원주로 철수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을 뿐만 아니라 춘천으로 들어온 북한군 2사단이 수원 방면으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군이 춘천지역에서의 초기전투가 성공적이지 않았다고 판단한 소련군사고문단의 평가는 단순하게 춘천지역의 전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춘천과 홍천지역 전체에 대한 북한군 제2군단의 작전구상과 그에 대한 한국군 6사단의 방어작전 전반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군 전사는 홍천지역의 빛나는 전투의 의미를 높이 평가하지않고 있다. 실제 홍천지역에서 함병선의 제6사단 2연대는 세계전사에도 쉽게 찾아 보기 어려운 방어시 공세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것도 압도적인 병력의 열세하에서 아무런 화력지원을 받지 않고 작전을 수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한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은 당시의 모든 전투와 작전을 성공적으로 평가할 수 없었던 육군본부의 상황때문이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초기 작전의 의미가 훼손된 것은 춘천과 홍천지역뿐만 아니다. 가장 크게 의미가 훼손된 전투중의 하나가 개화산 전투이다. 개화산은 김포공항을 바로 내려다 볼 수 있는 고지이다. 백선엽이 지휘하던 제1사단은 전쟁초기에 무력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당시 백선엽의 제1사단을 초전에 격파했던 북한군 6사단 또한 홍천지역에 투입된 북한군 제 12사단과 마찬가지로 중공군 출신의 부대로 국공내전이 끝나고 50년 3월에 북한으로 들어온 부대였다.

북한군 제6사단은 초전에 백선엽의 제1사단을 붕괴시키고 영등포 방면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북한군 제3,4사단이 서울방면으로 공격하는 한편, 북한군 제6사단은 영등포 방면으로 진출하여 한국군을 완전히 포위하고자 한것이다. 그러나 북한군 제6사단은 6월 26일부터 28일까지 개화산에서 전투를 한 다음 더 이상 진출을 하지 못했다.

당시 육군 본부는 육군정보학교장 계인주 대령을 김포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김포반도에서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김포반도에는 잡다한 부대들이 집결했으나 김포사령관으로 임명된 계인주 대령은 도주를 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 이후 부교장이던 최복주 중령이 사령관으로 개화산 방어를 실시했다. 작전경과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최복주 중령이 지휘하던 김포사령부는 개화산에서 1000명 이상의 부대원 전원이 옥쇄하는 상황까지 가고 말았다. 전언하는 바에 의하면 최복주 중령은 당시 부하들의 죽음을 보고 그 자리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고 한다.

최복주 중령이 자결한 이후 정보학교 작전참모(일설에는 3사단 참모장이라고도 함)이던 우병옥 중령은 김포공항까지 진출한 북한군 제6사단을 향해 짚차에 기관총을 달고 사격을 하면서 김포공항으로 돌격했다고 한다. 우 중령은 날아오는 총탄에 맞아 산화하면서 기관총을 사격했다고 한다.

그 이후 북한군 제6사단은 7월 초까지 더 이상 진출을 하지 못한다. 왜 진출을 하지 못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알수 있는 것은 개화산전투이후 임충식 중령이 지휘하던 한국군 제3사단 제18연대가 시흥과 안양방향으로 진출하여 방어작전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당시 시흥과 안양방면에서의 전투 상황도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개화산 전투의 전후과정을 살펴보면 당시 작전이 전황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북한군 제6사단은 개화산에서 김포사령부의 강력한 방어작전 이후 차후 진출에 신중해졌을 가능성을 배제 할수 없는 것이다. 만일 북괴군 제6사단이 계속 진출하였다면 한국군의 한강 방어선 구축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전쟁은 초전에 끝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 북한군 제6사단의 진출을 지연시켰는지 알수는 없다. 개화산에서의 저항이었는지 아니면 임충식 중령의 3사단 18연대의 방어작전이었는지 불문명하다. 그러나 북한군의 기습남침에 의한 불가항력론은 이토록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전투에 대한 연구의 가능성을 애초부터 없애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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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학 전문가이신 것 같아요. 좋은 글 잘 읽고갑니다.👍👍

항상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이 글보다보면
우리가 배운 대부분 역사가
사실은 왕조 중심이다 싶습니다.

역사에 가정은 있을 수 없겠으나
한국전쟁이 초전에 끝났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두려움마저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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