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는 글] 일찍 나선 퇴근길: 쌀 사고 기름 넣고 병원가고 그림 그리고

in #busy6 years ago (edited)

집에 쌀이 떨어졌다. 지인의 추천으로 찾게된 쌀가게가 이제 단골이 되어서 쌀은 매번 같은 곳에서 산다. 쌀가게라기보다는 제법 큰 정미소라고 말하는 게 맞겠다. 요즘은 이런 곳을 RPC라고 부르나? 집사람의 출퇴근 코스와 나의 출퇴근 코스를 비교하면 내가 가는 게 조금 더 낫다. 어차피 둘러가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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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소 마당에 주차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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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 들른다. 깔끔하진 않지만 더럽지도 않은 사무실에서는 친절하진 않지만 불친절하지도 않은 직원이 나를 맞이한다. 세상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전통시장 같은 곳에서는 쌀, 생선, 과일 등의 생필품을 사면서 카드를 내밀면 가격을 갑자기 높여부르거나 싫어하는 곳이 많다. 그런데 여기는 좀 큰 곳이라 그런지 카드나 현금이나 같은 가격을 받는다. 놀랍게도 카드를 꺼낼때나 현금을 꺼낼때나 같은 태도로 응수한다. 생글생글하지는 않지만 찌푸리지도 않은 그런 무표정으로. 난 이런 접객태도가 참 마음에 든다. 과잉친절에는 나도 과잉친절로 응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들어 쓸데없이 입꼬리를 올리며 대화를 해야하는데 이게 참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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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증과 붙어있는 교환권을 갖고 사무실 바로 옆 쌀창고로 가면 아저씨가 아무말 없이, 정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교환권을 책상위에 있는 못에 푹 꽂는다. 못에는 이미 많은 교환권이 꽂혀있다. 예전에 극장에서 영화표를 그런식으로 받았던 것 같다. 그 아저씨는 창고 안쪽으로 가서 교환권에 찍혀있는 제품을 들쳐메고선 다시 내 쪽으로 걸어온다. 그리고 차 쪽을 향하여 고갯짓을 한 뒤 묵묵히 걷는다. 매번 그랬듯이 이번에도 나는 얼른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다가 얼른 트렁크로 뛰어가 열어놓는다. 쌀이 털썩 소리를 내며 트렁크에 자리잡는다. 집에서 좀 멀긴 하지만 한 번씩 쌀을 사러 가면 이런 모습이 다소 낯설면서도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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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기준 가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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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가는 길에 매번 가던 주유소를 들른다. 매번 그렇듯이 이번에도 딱 3만원만 넣는다. 해당주유소 어플을 설치하면 나오는 바코드를 주유기에 갖다대면 3만원 주유시마다 1천원 할인쿠폰이 나온다. 그 다음부터는 3만원을 넣으면서 해당쿠폰을 사용해서 1천원을 할인받을 수 있다. 내가 쓰는 신용카드에서도 주유비의 5%정도를 할인해준다. 3만원어치 넣으면 쿠폰과 카드할인을 합하여 2천5백원 정도 할인을 받는다. 셀프주유소라서 별다른 부끄럼 없이 가능한 일이다. 다만 이 주유소의 주유기는 센서가 좀 이상한지 주유 총을 좀 살짝 잡아야한다. 강하게 잡으면 좀 들어가다가 멈추기 때문에 다시 놓았다 잡아야한다. 집사람보고 이런식으로 좀 넣고 오라면 기겁을 한다. 차라리 할인 안 받고 사람 있는 주유소에 가고 말겠다는 식이다. 나도 안다. 나니까 이런 식으로 사는 거지. 나 아닌 사람더러 두 번 이상 말 꺼낼 이유는 없다. 까짓거 할인 안 받으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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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을 들를 차례다. 얼마전에 친구들과 술을 먹고 옆에 오락실이 보이길래 안하던 짓을 하다가 다쳤다. (돈을 넣지 않고)펀치머신을 오른손으로 툭툭 쳤는데 그게 느낌이 참 괜찮았다. 왼손으로도 힘주어 탁 쳤는데 손목시계가 풀리면서 왼손이 살짝 꺾였다. 그 이후로 왼손이 계속 아팠다. 이제는 가만있으면 괜찮은데 주먹쥐고 손가락에 힘을 줄 때 아주 아프다. 예를 들면 2L짜리 6개들이 생수병 묶음의 손잡이를 검지와 중지손가락에 걸치고 드는 경우.


네비를 검색해보니 5km이내에 수많은 정형외과가 뜬다. 대로변을 따라 4개의 정형외과를 봐 둔다. 첫 번째 병원을 지나칠 무렵 불법주차 된 차량이 많아 그걸 헤집고 들어갈 자신이 없다. 패쓰! 두 번째 병원을 지나치는데 주차장이 없다. 패쓰! 세 번째 병원을 지나치는데 역시나 주차장은 보이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옆 상가 주차장에 차를 대고 들어갔다. 병원에서 20여분 정도 기다렸다가 의사 얼굴을 15초 정도 보고 난 후 엑스레이를 찍었다. 당연히 아무 이상이 없다. 엑스레이는 뼈에 있는 문제만 비춰주니까. 다시 의사얼굴을 본다. 이번에는 2분가량 본 것 같다. 주먹을 꾹꾹 눌러보더니 이상이 없단다. "정 답답하면 MRI 찍어보든가, 오늘은 늦었으니 안되고 내일부터 나와서 물리치료나 받든가." 딱 내가 예상한 답변이다. 그러면서 진통제를 처방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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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방전을 들고 40초가량 망설인다. 접수부의 직원에게 묻는다. "이거 무슨 약입니까? 예, 그거 진통제와 소화제입니다." 가만있을 땐 아프지 않은데 굳이 진통제까지 먹어야하나. 처방전은 그냥 꾸깃꾸깃 접어서 조수석 수납함에 던져놓는다. 아마 이 처방전의 약을 먹을 일은 없을 것이다. 차를 몰고 집으로 간다.


트렁크에서 10kg짜리 웰바기 쌀을 꺼내어 낑낑대며 베란다까지 옮겨 놓는다. 당분간 일용할 양식이 될 24,000원 짜리 물건이다. 웰바기라는 제품명이 눈에 들어온다. 쌀 품종명일까 생각했는데 포장지에 혼합품종이라고 선명하게 인쇄해놓았다. 유행이 지난지 5년쯤 되는 단어, 웰빙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억지로 짜내어 '월박'이라는 단어의 변형이 아닐까 추측만 할 뿐이다. 예전에 광고에서 국밥을 잘 먹던, 슬리퍼를 신고 히딩크 감독과 사진을 찍던 아들을 둔 누군가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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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거실에서 쌀 자루를 들고 낑낑대는데 아이가 반가워하며 다리에 달라붙었다. 잠깐만 기다려 손 씻고 안아줄게. 쌀을 내려놓고선 손만 얼른 씻고 한 번 안아준다. 그리고 거실 바닥에 같이 엎드렸다. 놀랍다. 그림을 그리자고 하더니 자기 혼자서 무언가를 그린다. 지금까지는 나보고 '아빠, ㅇㅇ 그려줘, ㅁㅁ도 그려주세요'라고 한 뒤 내가 그린 그림에 색칠하는 정도였는데. 그림이 풍부해지도록 좀 다독거려본다. 우와 잘 그렸네 이건 뭐야? 아, 그래 머리카락도 그리면 더 예쁘겠다. 머리카락이 짧네? 너 이거 혹시 아빠 그린거야? 우와 어쩌고 저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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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기로 이번 그림은 스토리가 있는, 내 아이 최초의 단독작품이다. 주제는 엄마와 아빠의 결혼이다. 엄마는 배 한가운데 꽃다발을 들고 있고 아빠는 이상한 옷을 입고 있다. 이후에 빈 공간에 자기 모습도 그렸다. 아이는 우리가 결혼할 땐 본인이 태어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다. 성교육 동화책이 워낙 흔한 탓이다. 오른쪽 빈 공간에 '엄마 뱃속에 웅크리고 있는 태아'의 모습을 그려놓고선 자기 모습이라고 말한다. 내 마음도 배부르고 차도 배부르고 내 손은 좀 아프지만 감동적인 퇴근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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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가 아닌 정미소에서 쌀을 사시는 광경이 눈앞에 그대로 그려지는것 같아요
근데 왜 차가운 회색빛으로 연상이 될까요?
무뚝뚝하게 할일만 하는 직원모습이 그려져서 일까?
암튼 인상적인 정미소 같아요~

비온 직후의 약간 후텁지근하고 나른한 오후라서 그랬을까요. 즐거운 주말 되세요. 저는 별다른 말 없이, '안녕하세요 안녕히가세요'라고만 인사하는 가게가 가장 마음에 들어서 회색이라기보다는 아이보리빛 느낌입니다.

정미소 구경 잘했습니다. 치료 잘하시구요.

댓글감사합니다. 치료는 그 한 번으로 끝내야겠습니다. '그냥 두면 낫겠지' 정도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습니다ㅎㅎ

사무실 옆에 있는 나무를 보니까 뭔가 일본인 줄 알았네요.

댓글보고 사진을 다시 보니 그렇네요. 70년대~90년대 초반까진 조경이나 건축양식에 일본풍이 슬쩍슬쩍 묻어나왔는데 이 나무도 그 당시에 심어진 나무가 아닐까 싶네요. 아니면 그 시대 사람이 관리를 하고 있거나ㅎㅎㅎ

정미소에서 쌀을 사 먹을 수 있으니 좋으시겠어요.
쌀은 정미한지 오래 될수록 맛이 덜하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혼합쌀이 아닌 걸로 드세요.
좋은 정미소는 안 그러겠지만, 아무래도 혼합쌀은 여기저기 남은 쌀을 섞었을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그러면 밥이 되는 과정에 일률적으로 밥맛을 못낼 수 있어요.
잡곡을 다양하게 파는 게 눈에 띄네요.^^

손목 아프신 건 아무래도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는 게 나을 거 같아요.
저도 옛날에 인라인 스케이트 타다가 삔 발목을 2년 고생(무릎을 꿇는 경우만 아팠거든요.)하다가 한의원 가서 침 맞고, 그날 다 나았습니다.ㅋㅋ

우와.. 댓글 감사합니다. 지인은 여기에서 파는 '웰바기'라는 제품이 괜찮다고 소개해준건데 다음번에는 고시히카리 같은 단일품종도 시도해봐야겠습니다. 시간날 때 한의원도 한 번 가봐야겠습니다. 한의원에서 치료되는 과정이나 비결은 잘 모르겠지만 일반 병원에서 잘 치료받기 힘든 증상들은 한의원에서 해결되는 경우가 간혹 있더라고요.

정미소라니 부럽습니다. 품질이 왔다갔다하는 농협 쌀을 그것도 외제가 아니라 국산을 먹는데요.(정미한 지 얼마나 됐는지도 모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저는 아예 먹은 적이 거의 없어서 잘 모르지만 쌀은 일제가 훨씬 맛있다고들 합니다.

정미소 풍경과 작업 방식을 보니 웬 육지의 고도도 아니고 타임머신이라도 탄 것 같습니다.

아이의 그림이 퍽 좋으셨겠습니다

의례적인 손 걱정

광역시, 백화점과 대형마트가 있는 동네에 살지만 아직도 20분만 가면 시골스러운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달성군'이 가까워서 그렇겠지요. 당연한듯한 일상도 이렇게 글을 올리고나면 당연하지 않은 사람들의 댓글을 보며 '내 일상의 이런부분은 좀 특이하고 특별하구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안그래도 다음번에는 고시히카리를 한 번 사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오랜 자취경험상, 밥맛은 쌀보다는 밥솥이 결정하는 부분이 더 많다고 생각하지만 조금 더 비싼 쌀은 또 어떤맛일까 궁금하기도 하거든요. 항상 재미있는 댓글 감사합니다. 즐거운 오후시간 되세요.


의례적인 감사인사

요즘 아이들은 성지식이 해박하네요.ㅎㅎ 손목 재활 잘 하셔요~~

댓글 감사합니다. 이런 점이 좋은지 좋지 않은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내가 어디선가 그게 좋더라는 소문을 듣고 세트로 사온 책인데 '옆집 아저씨가 맛있는 것을 사주고 비밀놀이를 하자더니 엉덩이를 아프게 했는데 기분이 나빴고 무서웠다, 엄마한테 얘기하니 그림 선생님과 장난감 선생님을 만나게 해 주었고 거기서 이야기를 다 털어놓으니 이젠 무섭지 않더라. 옆집아저씨는 경찰이 잡아갔다'는 내용의 책도 들어있더라고요.

자유로운 그림 너무 좋은데요?ㅋㅋ
대구님의 글에서는 흔치 않은 일상이 있어서 흥미로워요.
정미소라든가ㅎㅎ

ㅎㅎㅎ사진 찍으면서도 다소 재미있는 풍경이긴 했지만, 다른 분들이 볼 때는 실제보다 더 낯선 풍경일 수도 있겠네요. 일상이 그렇듯이 두번째부터는 그 풍경이나 장면들이 당연히 그런 것이라고만 생각하게 되었는데 댓글들 덕분에 여전히 새로운 눈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미소에서 사면 찧은지 얼마 안되서 밥맛도 더 좋을듯 하네요~
음주후엔 항상 펀치머신같은건 주의 하셔야 합니다!! 저도 옛날에 음주펀치하다가 손에 상처가...ㅎㅎ

그럴 수도 있겠네요. 지금까진 정미소에 보관된 쌀이라 신선해서 그렇다는 생각은 못하고 '이 집 쌀이 좋다'고만 생각했는데ㅋㅋㅋㅋ깨달았습니다. 술먹고 평소에 안 하던 짓 하면 안된다는걸..

최초 단독 작품 그린 아이가 너무 귀여워요 아이의 어떤 모습이든 아이를 보고 있으 무언가 가슴이 따끔거리는게 행복한 미소를 짓게 되더라고요

감사합니다. 커 가면서 보여주는 새로운 면면들이 흐뭇한 웃음을 줍니다. 즐거운 일요일 보내시길.

정미소 정말 오랫만에 보네요~~
저희는 본가에서 쌀을 가져다 먹어서 딱히 마트나 이런곳에서는 사본적이 없어요~
예상치 못한곳에서 많이 다치더라고요. 얼른 회복되시길 ㅠㅠ

시간이 지날수록 증상이 약해지는 느낌은 드네요. 입이 좀 둔한편이라 정미소의 쌀이라 더 맛있다는 느낌은 없지만 주기적으로 쌀을 사러 어딘가로 짧은 여행을 간다는 느낌은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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