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과 새와 개의 재능

in #kr-art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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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진 개인전, <들과 새와 개의 재능>, PKM 갤러리, 2016









내가 질투하는 재능







질투난다. 시샘한다. 그리고 절망한다. 아 뭐야 어떻게 이렇게 그려?.. 동시에, 진짜 좋다, 진짜 요즘에 드물게 좋은 그림이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거구나, 나도 빨리 작업실로 가서 붓을 들면 뭐라도 나올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그의 그림을 마주할 때마다 교차한다. 백현진의 그림을 두고 하는 말이다.


화가의 입장에서 다른 화가의 그림에 대해 글을 쓰고 있지만 전문성은 전혀 없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감상글임을 미리 밝혀두고자 한다. 그의 그림은 내겐 여전히 동경의 대상이며 신비의 영역이다. 내가 분석하거나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같은 미술가라고 불리울 수는 있지만 엄연히 말해서 그와 나는 공통 분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는 전혀 다른 숲에 살고 있다. 마치 무인도나 우주 어딘가의 행성에 불시착해서 난생 처음 보는 사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나도 그의 그림 앞에서는 여전히 속수무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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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진, <어떤 동물에게 도구로 인식되기 이전의 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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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진, <정확히 이렇게 보이는 박스의 부감샷을 기준 삼아 새처럼 보이는 무엇과 함께>





보통 사람들이 백현진 그림같이 뭘 그렸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림을 ‘추상화’라고 퉁쳐서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나는 추상화에도 급수를 나누고 싶다. 어설프게 모더니즘 미술 이론을 수용해서 밑도끝도없이 물감을 막 싸지른다거나, 거기에 ‘구성’이랍시고 아주 조악한 형태들이 민망하게 범람하는 그런 추상화들과 백현진의 그림은 확연하게 구분된다.


백현진의 그림 역시 재인식 가능한 형태가 거의 없는 추상화다. 그런데 그의 그림을 보고 있자면 추상화임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보고 그렸다’ 라는 추측이 강하게 든다. 마치 누드 모델을 앞에 두고 재빠르게 종이에 옮기는 화가의 그림처럼, 백현진의 그림도 그 대상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뭔가를 보고 재빠르게 ‘받아쓰기’ 했다는 느낌이 든다. 적어도 단순한 색이나 형태, 구성 실험이 아니란 얘기다. 뭔가 그의 몸을 관통했거나, 봤거나, 경험한 그 순간의 받아쓰기다.


‘안 보이는 것을 그렸는데 마치 봤던 것을 표현한 듯한 그림’ 은 내가 생각하는 가장 높은 수준의 그림이다. 적어도 백현진의 그림은 이 범주 안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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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진, <뇌신경학과 입자 물리학을 거쳐 다시 괴석이나 괴목 따위를 경험한 어느 동양인에 의해 나올 수 있는 모던 토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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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진, <눈보라>





이 정도 왔으면 도달하는 다음 단계. 느낌이 좋긴 한데, 도대체 뭘 그린거야? 의미가 뭐야? 라고 자연스럽게 물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난해한 그림 앞에서 사람들은 흔한 오해를 하게 된다. 이걸 그린 화가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을 거라는 오해. 과연 그럴까? 추측하건대, 백현진 자신도 자기가 뭘 그린지 모를 것이다.


그림에서 그의 최초의 의도대로 완성된 구석이 거의 없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이런 그림이 나와버렸을 것이다. 붓질을 멈추고 그림을 끝내는 시점만이 그가 유일하게 그림에 의식적으로 개입한 순간일 것이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의미가 산처럼 가득하거나 혹은 황량한 사막처럼 하나도 의미가 없는, 허무로 가득찬 그림이다. 혹시나 하고 그림 제목을 보지만 의미를 찾는 목적이라면 더욱 혼란스러워질 뿐이다.


그의 그림은 보는 이의 닫혀 있던 감각을 마구마구 열어주는 짜릿함을 제공하는 동시에, 이게 다 무슨 의미? 라는 허무함도 동시에 안겨주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림에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 하얀 입방체의 건물, 적어도 ‘갤러리’라는 장소에서 마주할 수 있는 예술로서는 이보다 더 바랄 수가 있을까? 이런 그림도 그림 자체만으로 정치적이거나 사회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까? 아아 잘 모르겠다. 머리 아프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화가는 아니지만 좋은 그림을 알아볼 수 있는 감식안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백현진 그림은 아주, 좋은,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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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진, <귀여워 죽을 때까지>





*2016년에 PKM갤러리에서 열린 백현진 개인전 <들과 새와 개의 재능>을 보고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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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화는 참 볼때마다 어렵네요... 어쩌면 그림앞에서 어려워하는 인간상이 추상화가 바라는 그런것인가 싶기도 하고.. 문제는 모든 그림이 어려워서......... 하여간 참 어렵네요...

추상화의 심보!? ㅎㅎㅎ 뭐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추상화 입장에서 감정이입하시다니 흥미롭네요.

친절한 그림 같애요. 적어도, 뭘그렸을까가 궁금합니다. 첫번째 제목이 너무 좋습니다. 그림보다..ㅎㅎ 빨간 그림도. 초록과 하양은 그림이 마음에 들고요.
상관없는 얘기인 것 같은데, 저는 요즘 심리나 정신세계라는 것이 조금 지긋지긋해요. 물질..이나 현상 자체 같은 그런 것에 좀 관심이 가있어요. 그래서 그런가 처음 그림부터 좋습니다. 물론 제목이 없었다면 이거 뭐지ㅡ.ㅡ;했겠죵.ㅎ 저도 그냥 되게 개인적인 감상.. 어차피 어려운 그림 제맘대로.. 흐흐

백현진 작가의 sns를 염탐하다보면 길거리 골목에 아무렇게나 배열해있는 사물들에게서 아마 그림의 영감을 받는 것 같더라구요. 제목 짓는 센스도 엄청나시도.. ㅎㅎ 제 감상도 완전 제 개취입니다. 그냥 생각하는대로 보고 내뱉는거죠 별거 있겠습니까 ㅋ

저는 그림을 볼주는 모르지만 제목들이 참 독특하네요~~^^

제목짓는 센스만 봐도 무림의 고수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수들은 보통 '무제 - 92224' 뭐 이런걸로 대충 떼우려 하거든요 ㅎ

화가의 의식에 한계가 어디까지 일런지. 한계를 넘어 본 자만이 한계를 알터인데 아직 저는 눈만 꿈뻑꿈뻑~ ㅠㅠ 표현을 해내는것 차체가 신기할 따름입니다.

저도 한계를 한번 넘어보고 싶은데.. 사람마다 각자 넘어야 할 한계가 다른 것 같아요. 저는 아무리 그려도 그릴 수 없는 그림이란게 있더라구요. 그런걸 다 떠나서 말씀하신대로 보이지 않는 뭔가를 포착하려고 시간을 내고, 표현을 하나하나씩 해낸다는 자체에 묘한 감동이 있습니다.

예전에 일민에서 음악을 먼저 접했었는데,(그때는 어어부 프로젝트 음악이었네요.)그림으로 알게되니 또 다른 느낌이네요.

음악 쪽에서도 대단하신 분이죠. 영화 감독이기도 하시고, 또 가끔 배우로 출연해서 깜찍한 연기를 선보이기도 하시고... ㅎㅎㅎ

작품의 제목이 정말 친절해서 좋으네요.
에너지가 한가득인 작품이네요. 전 빨강 모던토킹 작품이 좋으네요.
부족한 에너지를 토킹으로 채워야 하는지..
감사합니다.

그림만 봐서는 뭐지 했다가 제목을 보고 좀 웃겼다가 다시 그림을 보고 음...뭐 그럴수도 있겠네.. 뭐 이런 과정이었던것 같아요 ㅎ

전 오쟁님 그림들이 더 좋아보이는데요?ㅎㅎ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학수고대했던 날, 이 들려오는 것 같네요. 그림들에서.

100이면 100 다 다른 것을 발견할 것 같아요. 이 그림들에서는.

원래 형태를 애써 떠올릴 필요가 없는거군요.. 그림이 갖는 느낌적 느낌만으로...

느낌적 느낌적 느낌적 느낌만이 있을 뿐이겠죠. 작가에게 뭘 그렸냐고 물어보면 정말 허탈할 겁니다. "당신이 보고 느끼는 것이 바로 정답이다" 라고 말할 확률이 99%일 테니까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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