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이다. 소년이 온다.

in #kr-book6 years ago





하루도 빠짐없이 올 소년에 대해서





훈련소에 입소하여 공포의 화생방 훈련을 앞두고 우리 모두는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쾌쾌한 가스실에 들어가 고장난 방독면 사이로 최루액의 냄새가 스믈스믈 기어올라왔고, 그 순간 나는 갑자기 어릴적 기억이 떠올랐다. 아마도 다른 훈련병들은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지옥같은 맛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에게는 광주에서 아주 어릴 때 맡아봤던 '그' 냄새였다.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여전히 광주의 거리에서는 단발적인 시위들이 끊이질 않았으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엄마는 아주 어렸던 내 손을 잡고 여기 저기의 시위에 동참했었다고 한다. 기억이라는 것이 저마다 자의적으로 재구성된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변신로봇 따위나 한창 가지고 놀았을 그 나이에 두 눈으로 보았던 희뿌연 광주의 거리를 나는 기억한다.


오일팔. 오.일.팔 이라는 단어의 '사운드' 는 최루탄 냄새보다도 더 내 몸 속에서 역사가 깊다. 아마 오일팔에 대해서 알기 훨씬 이전부터, 아니 어쩌면 갓난아기때부터 익히 들어왔을 단어였다. 80년 5월에 광주 도청에서 끝까지 항쟁했던 조그마한 이십대 여학생이 내 어머니가 되었고, 방송국에 다니면서 오일팔을 지속적으로 알려왔던 라디오DJ가 내 아버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성장하면서 오일팔에 대해 너무나 익숙했고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기 때문에 오일팔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무감각한 것도 사실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20대 후반부터 제주도 강정마을과 광화문 광장 등 수차례 현장에서 국가 폭력의 실체를 확인한 다음에서야, 나는 새삼스레 오일팔을 겨우나마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아니, 도대체, 80년 5월 광주에서는, 도대체, 어떤 일이, 어떤 일들이, 벌어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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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대한 숱한 진술들은 사실 관계에 대해 명확히 전달해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만으로는 듣는 사람의 피부 위에 안착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시간을 과거로 되돌려 그 현장에서 일어난 일들을 온 몸으로 체감할 수 있게 해주는 타임머신이 세상에 존재한다. 훌륭한 문학은 그 타임머신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낸다. 한강의 장편 소설, '소년이 온다'를 읽고 나서야 오일팔의 당사자인 부모님도 내게 전달해주지 못했던 일련의 감정들이, 흰 눈이 피부에 닿아 차갑게 녹아내리듯 비로소 내 신체로 실감되었다.


그저께 401번 버스를 타고 명동 사거리를 지나갈때 즈음, '소년이 온다'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있는데 거참 쪽팔리게시리 콧구멍이 훌쩍훌쩍 눈시울이 시큼시큼거리더니 기어코 눈물이 흘러내리고 말았다. 책을 덮고 한참동안 소년에 대해서 생각했다. 또 소년의 친구와 친구 누나의 죽음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언젠가 광주 천변가에서 꽃 핀 쪽을 향해 손잡고 걸었을 소년과 소년의 엄마에 대해서도 생각하다가, 다시 광주 오월에 대해 생각했다. 책 속의 문장과 문장, 쉼표와 마침표 사이사이마다 끊임없이 존재했을 우리 엄마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러다 자식을 잃어버린 80년 광주의 엄마들이 떠올랐고, 불과 몇해 전까지 광화문 광장에 앉아 있었던 자식 잃은 엄마들이 떠올랐다. 정말 어쩌면 좋아. 그 모든 엄마들은 자식과의 추억이 매일매일 생생하게 떠오를 텐데. 꽃 핀 쪽으로 걷자던 자식의 모습같은.. 소년은 매일매일 올 텐데. 하루도 빠짐없이 올 텐데.



P.192

네 중학교 학생증에서 사진만 오려갖고 지갑 속에 넣어놨다이. 낮이나 밤이나 텅 빈 집이지마는 아무도 찾아올 일 없는 새벽에, 하얀 습자지로 여러번 접어 싸놓은 네 얼굴을 펼쳐본다이. 아무도 엿들을 사람 없지마는 가만가만 부른다이. ......동호야.

가을비가 지나가서 하늘이 유난히 말간 날엔 잠바 속주머니에 지갑을 넣고, 무릎을 짚음스로 절름절름 천변으로 내려간다이. 코스모스가 색색깔로 피어 있는 길, 동그랗기 똬리를 틀고 죽은 지렁이들이 쇠파리가 꾀는 길을 싸묵싸묵 걷는다이.

네가 여섯살, 일곱살 묵었을 적에, 한시도 가만히 안 있을 적에, 느이 형들이 다 학교 가버리면 너는심심해서 어쩔 줄을 몰랐제. 너하고 나하고 둘이서, 느이 아부지가 있는 가게까지 날마다 천변길로 걸어갔제. 나무 그늘이 햇빛을 가리는 것을 너는 싫어했제. 조그만 것이 힘도 시고 고집도 시어서, 힘껏 내 손목을 밝은 쪽으로 끌었제. 숱이 적고 가늘디가는 머리카락 속까장 땀이 나서 반짝반짝함스로. 아픈 것맨이로 쌕쌕 몰아쉼스로. 엄마, 저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못 이기는 척 나는 한없이 네 손에 끌려 걸어갔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thelu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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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도청에서 끝까지 항쟁했던 조그마한 이십대 여학생이 내 어머니가 되었고, 방송국에 다니면서 오일팔을 지속적으로 알려왔던 라디오DJ가 내 아버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저는 소년이 온다를 읽고 이틀정도는 밥을 잘 못 먹었어요. 부모님께서 역사의 산증인이셔서 오쟁님께는 이 책이 더욱 아프게 다가왔겠네요. 정말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로도 많은 의미가 있는 아픔의 역사지요.

처음에는 그냥 봤는데.. 나중에 제 작업을 위해서 또 한번 펼쳐야만 했던 순간이 있는데 그때는 정말 넘기기가 힘들더라구요. 부모님을 그냥 부모님이라고 생각했었는데 518 생존자 라는 호칭이 더 어울릴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멋진 부모님을 두셨군요! 두 분의 삶의 궤적이 존경스럽습니다.
한강 작가 책은 읽어보질 못했는데 소개글을 보니 당장 읽어봐야겠습니다.
저도 창피함을 피하려면 집에서 혼자 읽어야겠네요.

네 특히 마지막 챕터는 정말 개인적인 장소에서 읽기를..추천드려요.

네. 읽고 나면 제 느낌도 공유할께요~

헐... 작년 학교 국어시간에 읽었던 책이네요. 글도 정말 잘 쓰시는 것 같습니다. 보팅하구 팔로하구 갑니다! 앞으로 자주 소통해요!! 아직 고등학생이라 반가운 글들을 보면 그냥 지나칠수가 없네요 ㅎㅎ

와.. 국어시간에 이 책을 읽으셨군요. 교과서 참 좋은 교과서네요.

잊지않고 반성해야할 역사지요.
요즘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여학생들에 대한
기사가 자주 눈에 띄네요.
살아주셔서 감사한 심정입니다.

살아주셨기 때문에 저도 지금 이렇게 태어나 숨 쉬고 있겠죠. 그러나 돌아가신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ㅠㅠ

전 읽다가 마음이 아파 다 읽지 못했습니다 ㅜ

518이라는 것을 알고 작정하고 호흡을 가다듬고 봐도.. 넘기기 힘든 페이지가 있습니다. ㅠ

감사합니다. 시간내서 꼭 읽어봐야 할 책입니다.

이 책을 읽기에 5월보다 더 좋은 달은 없을 것 같습니다.

가정의 달이라고만 생각했던 5월에 5.18 민주항쟁이 있었네요.

맞아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thelump님의 북리뷰만 읽었는데도 울컥하게되네요
이 책은 꼭 읽어야겠습니다.

비극에 다가가는 작가의 시선이 굉장히 입체적이고 섬세합니다. 괜히 상을 받은 것이 아니겠지요. 5월에 한번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 그 꽃길은 여즉 그기에 있당가요?

이 책을 읽은 후에 광주 천변을 보면 그냥 다 '그' 꽃길처럼 보이더군요.

오일팔을 겪은 모든 엄마들 응어리가 풀리고 더불어 현대사의 재정립 또한 어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학살을 명령한 사람이 빨리 밝혀져야겠죠.. 모두가 다 알고 있는 그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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