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정원

in #kr-pen6 years ago (edited)


어버이날이라고 작은 카네이션 바구니 하나를 들고 할아버지 댁에 갔다. 맛있는 거 드시러 가자는 아빠의 말에 할아버지는, 근처 사는 할머니를 데리고 가고 싶다 하셨다. 혼자 사시는 할아버지와 잘 지내시는 분인 것 같았다. 귓불이 늘어질 정도로 큰 귀걸이를 하고 손톱에 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할머니는 올해 아흔다섯이었다. 할아버지가 누님이라 하며 좋아하는 분이라 했다. 

함께 오리 백숙을 먹으며 빨간 매니큐어의 할머니는 엄마를 붙잡고 하소연했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왜 하늘이 날 데려가지 않았는지 한탄한다고. 그런 말씀이 무색할 정도로 할머니는 유쾌했다. 예전에 장사를 했었는데, 그 구역에서 왕초였다고 당신을 소개했다. 할아버지는 그 이야기에 덧붙여 “생긴 것만 여자지, 남자나 매한가지야.”라고 하셨다. 할머니는 호탕하게 웃으셨다. 얼마 전엔 딸과 해외여행을 다녀왔는데 가이드에게 팁을 주니 멋쟁이란 소릴 들었다고 했다. 

점심을 먹고 엄마, 아빠, 할아버지는 왕초 할머니를 모셔드리러 가고 나만 먼저 할아버지 댁으로 돌아왔다. 전기장판 위에 앉아 TV를 켰는데 귀가 아플 정도로 큰 음량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내 TV를 끄고 한쪽 팔을 괴고 옆으로 누웠다. TV 바로 옆에 돌아가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찍은 사진이 보였다. 



할머니는 다시 태어난다면 우리 엄마의 자식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던 모습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암 수술 이후 몸이 안 좋아지셔서 병원에서 지내시다가 잠깐 우리 집에 계셨을 때였다. 그때 하신 말씀들이 종종 영상처럼 재생된다. 

가을이었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걸 보고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나무들은 얼마나 좋아, 저렇게 떨어져도 또다시 잎이 나고.” 할머니는 아마도 당신이 세상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계셨던 것 같다. 돌아보니 그렇다. 

또, 봄이 오면 얼굴의 잡티를 빼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할머니가 적어도 몇 번의 계절을 더 사실 거라고 생각했다. 잡티를 없애고 싶다는 말이 정말 강력한 생의 의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람의 숨 같은 건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건지, 할머니는 그해 가을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평생 몸이 편치 않으셨다. 겔포스, 판피린 같은 걸 달고 사셨고 병원에도 자주 다니셨다. 아빠가 어렸을 때는 아빠가 결혼할 때까지만, 결혼하고 나서는 손주를 볼 때까지만, 내가 태어나고는 내가 대학교 들어갈 때까지만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내가 대학생이 된 후에는 내가 시집갈 때까지만 살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더 오래 사셨다면, 증손주 볼 때까지 살고 싶다 하셨을지 모르겠다.

잠깐 옥상에 올라갔다가 마당을 둘러봤다. 예전에는 분재와 수석, 예쁘게 가꾼 화초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가장 눈에 띄는 게 담벼락 기둥에 생긴 이끼다. 기둥 윗면에, 작은 돌들이 놓여 있는 모습이 꼭 하나의 작은 세상 같았다. 그걸 사진으로 담고 있으려니 좀 서글펐다. 할아버지가 이제 더는 가꾸지 않는 마당 정원이.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는 노인정에 나가기 시작하셨다. 노인회 회장도 맡아 하시고 여러 번 놀러 다니기도 하셨다. 할머니가 몸이 편찮으시니 할머니가 계실 땐, 할아버지도 밖에 잘 다니지를 않으셨다. 

할아버지는 요즘이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 걱정거리가 하나도 없고 몸도 괜찮다고 하시며 말이다. 어쩌면 행복 같은 건, 아주 오랜 기다림 끝에, 이제 더는 기다린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때 찾아오는 걸지도 모르겠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여러 이유로 자주 싸우셨다. 어렸을 땐 방학 때 길게 할머니 댁에서 지냈는데, 그때 보면 거의 날마다 그렇게 싸우셨다. 방에 내가 있다는 걸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언성을 높이셨다.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성격이 불같았다. 

할머니가 지금 계신다면 두 분이 싸우지도 않고, 요즘 우리 정말 행복하다며 한가로운 하루를 보내실지도 모르겠다. 아주 오랜 옛날, 할머니는 미꾸라지를 가지고 다니며 팔았다고 했다. 그러다 할아버지를 만났는데 한 번 결혼을 약속했다가 그만두기로 한 일이 있었나 보다. 어떤 곡절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는 부부가 됐다. 

정말 미꾸라지 장수를 하셨느냐고, 할아버지랑은 왜 결혼 안 하려고 했냐는 물음에 할머니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보니 내 할머니, 할아버지라는 것 말고는 두 분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젊었을 땐 어떻게 살았고 결혼해서는 얼마나 힘들게 사셨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그저 그런 시간들이 내 몸과 마음 어딘가에 녹아 있을 거라고 생각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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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를 담담하게 한번에 읽었습니다.
걱정이 없는 때가 가장 평화롭고 행복하게 느껴지겠죠. 그태는 어쩜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을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게요. 그런 생각을 하니 슬퍼지네요. 유한한 시간 걱정 없이 살면 좋으련만, 욕심도 많고 생각도 많아서 언제나 걱정이 많네요. ruka님 걱정 없는 하루,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랄게요^^

뭐라고 말을 두고 가기 어렵게 먹먹해집니다.

저도 쓰면서 먹먹했어요. 쓰고나니 더 먹먹해졌지만요..ㅎㅎ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해요. 진심어린 마음 남겨주신 것도요^^

문득 제 할머니 할아버지가 보고싶고 궁금해집니다. 저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뭘 좋아하시는지 잘 모르고있네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것들이 참 후회돼요. 친구처럼 지내지 못한 거요.
앞으로 잘해보려고요. 남은 시간이 많지는 않은 것 같지만요..

사람이 한평생 살아간다는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할머니 이야기는 마음이 아프네요
어머님께서 할머니를 지극 정성 보살펴 주
셨나봐요 그런 보살핌이 할머니는
너무 좋으셨고요
잘 읽었어요^^

말씀에 너무 공감이 돼요. 사람이 한 평생 살아간다는 게 참 어렵고 힘든 일인 거 같아요. 물론 행복하고 좋은 일도 많겠지만요. 글 진심으로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가만히 놓아두고 흐름에 맡기는 것이 할아버님의 방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아픈 건 아픈대로 놓아두고 현재를 살아나가는 것이, 결국 살아있는 사람들의 숙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떠한 방식이든 행복해지시면 좋겠다고 바라봅니다.

@홍보해

그러게요. 어쩌면 이제서야 가만히 놓아두게 되셨을지도 모르겠어요. 살면서 힘든 일을 많이 겪으셨거든요.
제 주변 모든 사람이 아니 그냥 세상 모든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applepost님 안녕하세요. 써니 입니다. @qrwerq님이 이 글을 너무 좋아하셔서, 저에게 홍보를 부탁 하셨습니다. 이 글은 @krguidedog에 의하여 리스팀 되었으며, 가이드독 서포터들로부터 보팅을 받으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제가 태어나고 할아버지 두분 모두 안 계셔서 작은할아버지를 할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지냈어요.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 장면은 군대가기 전 할머니댁에 들러 돌아가는 길에 두분이 마을어귀에 나와 배웅하던 모습이네요.

할아버님과 행복한 시간 많은 이야기 나누며 보내시기를!

그런 장면 하나하나가 힘들 때 힘을 주기도 하는 것 같아요.
제가 워낙 무뚝뚝해서 할머니, 할아버지께 살갑게 못했던 게 좀 후회돼요.
앞으로 행복한 시간 만들어봐야죠. 감사해요^^

그 분들은 예전에는 선남선녀 셨을텐데 우리는 처음부터 할아버지 할머니였던것으로... 잘 읽고 갑니다.

맞아요. 젊으셨을 때 사진 보면 정말 선남선녀셨어요. 어쩌면 젊음이라는 것 자체가 좋은 걸지도 모르겠지만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애플님 글 오래간만이에요. 이 글을 읽고 이제야 오늘을 마무리하고 잠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아니, 정말 이제 자야겠어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너무 보고싶어서요. 꿈에서 만나면 좋겠어요.

아이구ㅠㅠ 댓글을 읽으니 좀 슬퍼지네요. 누군가 보고싶은 마음이 어쩔 땐 참 힘든 것 같아요.
꿈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만나셨는지요. 못 만나셨더라도 아마 기억을 못하시는 걸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들과 즐거운 하루 보내시기를 바라요^^

애플님에게는 그날의 꿈 이야기를 해드려야 할 것 같아서 다시 왔어요! 할머니, 할아버지는 만나지 못했어요. :-) 느닷없이 문재인 대통령이 나와서 악수를 나누었답니다. 하하.

음 그러셨군요. 할머니 할아버지는 못 만나 뵀지만. 문재인 대통령과의 악수라니! 복권이라도 사시지 그러셨어요~~~
반가운 소식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 너무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귀걸이하고 빨간 매니큐어 할머니가 호탕하게 웃는모습이 그려집니다^^ 시집갈따까지라는 말을 듣고 여자분인걸 알았습니다. 스티밋에서의 인연도 이렇게 알아갑니다 ㅎㅎ

재밌다니 다행이네요. 사실, 시집간다는 말이 싫어서 '시집갈 때까지'라고 작은 따옴표를 붙이려 했는데 그것만 붙이기가 그래서 냅뒀어요. '결혼할 때까지'라고 하기도 좀 그랬어요. 할머니는 그런 말을 하지 않으셨으니까요.
저도 스팀잇에서 누군가의 성별을 생각해 보다, 그 생각이 틀렸던 적이 있어요. 어쩌면 이런 점 때문에 이 세계가 더 마음에 들기도 해요.
북키퍼님,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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