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코가 석 자
따르릉, 고요한 일상에 낯선 번호 하나가 끼어들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대뜸 내 이름을 확인하더니,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를 줄줄 쏟아내기 시작했다. 바쁜 일과 중이었지만 차마 매정하게 전화를 끊지 못하는 나의 성격 탓에, 상대는 숨 쉴 틈도 없이 말을 이어갔다. 참 곤란한 노릇이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이미 오래전부터 소액으로 꾸준히 후원을 이어오던 단체였다. 요즘 경제가 워낙 어렵다 보니 후원금이 많이 부족해졌다며, 조금만 더 증액해 줄 수 없겠냐는 조심스러운 부탁이었다. 하지만 선뜻 "그러마" 하고 대답하기가 머뭇거려져 결국 어렵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단돈 일이만 원, 이삼만 원이라도 매달 꾸준히 나가는 돈은 요즘 같은 불경기에 결코 가벼운 무게가 아니다. 게다가 최근 스팀(STEEM) 가격이 크게 하락하면서 마음의 부담은 배가 되었다. 스팀이 1달러 선만 유지해 주었어도 여기저기 기분 좋게 좋은 일에 보탰을 텐데,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너무나 큰 숫자의 스팀을 녹여내야 하니 선뜻 마음이 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전화를 끊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졌다. 기분 좋게 "좋은 일 하시네요, 조금 더 보태겠습니다"라고 말하지 못한 내 모습이 자꾸만 마음에 밟혔다. '지금 내 코가 석 자인데…'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참을 수 없는 침울함과 자괴감이 꾸물꾸물 피어올랐다. '내가 여지껏 세상을 잘못 살았나' 하는 극단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마치 몸속에 숨어있던 바이러스가 면역력이 떨어졌을 때 기승을 부려 병을 일으키듯, 내 삶의 면역력, 내 마음의 면역력이 많이 떨어져 있다는 증거 같았다. 육체적인 피로야 건강식품 한 포로 다스릴 수 있다지만, 이렇게 마음의 체력이 바닥났을 때는 대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 걸까.
복잡한 생각을 떨치려 옥수수밭과 콩밭으로 향했다.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려 애쓰며, 도를 닦는 심정으로 제초 작업을 시작했다. 한참 땀을 흘리며 풀을 뽑고 나니, 잡초에 가려져 있던 콩과 옥수수들이 햇살을 받으며 활짝 웃는 듯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도 마음이 온전히 편치만은 않았다. 사실 이 땅의 원래 주인은 저 잡초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든 탓이다. 인간의 경작을 위해 자연을 인위적으로 이용하는 이 과정이, 문득 거대한 문명 간의 영토 분쟁처럼 다가와 묘한 슬픔을 남겼다.
그럼에도 자연은 여전히 위대하다. 인간이 제아무리 이기적으로 이용하려 해도, 결국 대부분의 자연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며 인간 또한 자연친화적인 방식을 고민하게 만든다. 아마존이 파괴되고 있다는 뉴스에 가슴을 졸이는 것도 결국 우리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리라.
밭을 나오며 문득 거울을 보듯 어수선한 내 내면을 들여다본다. 이 어지러운 감정의 소용돌이마저도 어쩌면 내 삶이 겪어내야 하는 하나의 자연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마침 오늘 교육을 위해 멀리서 많은 파트너가 올라온다. 이제 슬슬 마음을 추스르고 그들과 합류해야 할 시간이다. 날마다 "오늘도 좋은 날!"을 크게 외치던 누군가의 얼굴이 스치듯 떠오른다. 나는 그처럼 당차게 외치지는 못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조용히 작은 울림을 만들어 본다.
'그래, 오늘도 좋은 날이다.'
이 소박한 다짐이 바닥난 내 마음의 면역력을 채워줄 오늘의 가장 따뜻한 양식이 되기를 바라며, 가만히 발걸음을 옮긴다.
감사합니다.
2026/07/08
천운
Upvoted! Thank you for supporting witness @jswit.
생각을 하지 않고 잠시 밀어 두세요.
계속 스팀잇 가격 생각하면 마음만 무거워지니까요.
천운님 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