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갯속에 흐르는 시간

in #tripsteem6 years ago (edited)

인도 다람살라에서 몬순을 지내고 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공기 중에 가득 찬 안개 때문에 하얀 벽을 눈앞에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었는데,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한차례 비가 쏟아지고 나더니 거짓말처럼 안개가 걷혔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초록의 능선과 그 뒤로 솟은 트리운드 정상이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냈고, 자주 찾는 카페의 가장 전망 좋은 자리에 앉아 이를 바라보고 있다. 나와 마찬가지로 이 카페를 자주 찾는 한 인도 여성이 있는데 또 혼자 하염없이 웃는다. 이곳에 올 때마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것을 보면 그녀는 아마 문을 여는 시간부터 이곳에 와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늘 혼잣말을 하고는 키득거린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무엇이 그렇게도 재밌어서 늘 혼자 저렇게 웃고 있는 것일까. 인도를 여행하는 사람 중에는 정말 이상한 이들이 많아서 혼잣말하는 여자 정도야 이제 신경 쓰이지 않을 만도 한데...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웃으면(미소가 아니라 낄낄거리는 것에 가깝다) 나는 조금 흠칫한다.

뭐가 그리 행복할까, 뭐가 그리 즐거울까.

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낙천적인 사람이지만, 그것은 이 험난한 세상에 붙어있기 위해 스스로 진화한 것에 가깝다. 그렇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세상이니 말이다. 생존본능이랄까.

하여튼 몬순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하자면.

몬순을 보내는 이곳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가끔은 경외심마저 든다.

하늘은 마치 굉장한 활동력을 가진 생물체와 같이 변화무쌍하게 움직인다.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처럼 온 하늘이 어두워지다가 이내 번쩍이고, 바로 앞에 앉은 사람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비가 쏟아져 내린다. 그럴 때면 나는 입을 떡 벌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곤 한다. 매번 곤란한 상황을 겪게 되면서도 집을 나설 때 비가 오지 않으면 어지간해서는 우산을 챙기지 않는 전혀 쓸모없는 나의 배짱 또한 문제라면 문제. 매번 ‘아, 우산...’하면서 어떻게 집에 돌아가지 고민하는 사이, 이곳의 사람들은 태연하게 가던 길을 걷거나(우산이 없어도), 노점의 상인들은 진열된 물건을 느릿느릿하게 거둔다. 그리고 이내 다시 핸드폰을 들여다보거나, 뜨개바늘을 쥔 손을 바삐 움직이거나, 하는 것이다. 내가 턱이 빠지게 입을 벌리고 하늘을 바라다보고 있는 사이 말이다.

뭐 소나기라는 것이 한국에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갑자기 쏟아지는 비는 늘 당황스럽다. 가진 비를 전부 토해내고 해가 반짝 모습을 드러내면, 제 분을 못 이겨 펄펄 뛰며 화를 쏟아내고 나서는 이내 머리를 긁적이며 민망한 미소를 짓는 어떤 사람의 모습이 떠오른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얄미울 정도로 천연덕스러운 그 태도.

비가 오네.
그러네.
엄청 많이 오네.
그러네.

옆에 앉은 친구와는 참으로 얼빠진 대화가 이어지고, 곁에 걷고 있던 친구과 작은 우산 아래 비좁은 그 자리라도 나눌라치면,

노 엄브렐라.

해버리곤 하니 원. 그래, 너희들 또한 몬순을 나기 위해 나름대로 진화한 것이겠지.

내 고향에도 비가 많이 와서 산사태가 나고, 야크랑 양이랑 다 물에 휩쓸려 갔데. 야크는 분명 죽고 말 텐데... 당나귀들도 다 죽을 거야. 당나귀들은 늘 땅만 보고 다녀서 물속에서도 고개를 들지 못할 테니까. 그래도 말은 절대로 물에 빠져 죽지는 않을걸? 말은 언제든 달릴 준비를 하고 있거든. 그 커다란 머리를 꼿꼿하게 쳐들고 말이야.

티베트에서 유목민이었던 친구들이 동물 이야기를 할 때면 정말 좋다. 다 큰 사람들끼리 서로 염소네, 돼지네 하고 놀려대는 것도. 내가 그들로부터 순수를 발견하는 거의 유일한 부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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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leod ganj, india, 2016


이런 날씨와 함께 한철을 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비는, 그래, 비는 우산만 있다면 견딜 수 있다. 나를 정말 힘들게 하는 것은 안개이다. 이 카페에서는 안개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지, 차오르는지 확인할 수 있다. 보통 오른쪽 창틀부터 안개로 메워지기 시작하는데, 고개를 떨구고 핸드폰을 몇 초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면 두 번째 칸의 반만큼 안개가 들어차 있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들면 모든 창이 안개로 가득 차 눈이 부시다. 안개의 입자와 흐름마저도 느껴지면, '아. 이것이 바로 안개의 실체로구나!'하게 된다. 그리고 '무진기행'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 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어쩜. 어쩜. 안개를 이보다 더 정확하게, 이보다 더 아름답게 표현한 문장이 세상에 또 있을까.

눈앞에 보이는 모든 창에 안개가 들어차면 몇 초 후, 슬레이트를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후드득. 이내 앞에 앉은 사람의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쏴아아. 창밖으로부터 밀려든 차갑게 젖은 공기가 팔뚝을 스쳐 지나면 한기가 느껴진다.

안개 때문에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방 안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때도 있다. 종일 해가 나지 않아 눅눅해진 방 안의 공기와 옷가지 때문에 '차라리 사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보송보송한 그 촉감이 그리워진다. 습기를 제거하는 좋은 방법이라는 말에 온종일 방 안에 촛불을 곳곳에 켜두고 가만 앉아 있을 때면 신의 방문이라도 기다리고 있는 사람 같다.

신이시여. 내일은 눈 부신 태양을 내려 주시옵고, 마른 바람을 뿌려 주시옵소서... 덜 마른 빨래에서 나는 냄새만큼 지독한 것은 없사옵니다. 신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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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leod ganj, india, 2016


몬순, 정말 쉽지 않다. 하지만 곧 그리워지겠지. 이 냄새도, 이 눅눅함도.


와. 이거 트립스팀 이벤트 참가 가능한 부분입니까? 2016년 여행이지만 스낵님 저 의리 인정 좀...



안갯속에 흐르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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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ps.teem 으로 작성된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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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땐 님을통해 알게된 요아티스트와 함께

싱어이름도 보이스도 노래제목도 내용도 느낌도 글도 모두
끈적 끈적합니다.

그런데 요기는 가을 밤 건조하고 춥스.

서울에는 겨울이 시작되었다죠?! 이곳 날씨는 아아주 완벽해요. :-) 오늘은 자전거를 타야겠습니다!

@roundyround님 의리 !!! 감사합니다. ㅋㅋㅋ

여행에 소통과 의리를 더 하는 @roundyround 입니다?

이 글 읽고 있으니 마치 제가 그곳에 앉아 라라님이랑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만 같아요 :)

저는 비가오면 아파서 비오는 걸 정말 싫어하지만, 그래도 싱가폴 살 땐 아픈거 빼고는 그 습기도 좋아했어요. 피부가 건조한 편인데 싱가폴에서는 그런 느낌을 받을 겨를이 없어서인듯요 :)

이나라는 비가 오지 않아 안아파서 좋은데, 피부는...
게다가 요샌 습도도 높아서 이곳도 빨래가 잘 안말라요 :(

아이구 그럼 오신 김에 좀 앉아보셔요. 저는 실내에 있으면 비 오는 거 좋아하거든요. 우산 쓰고 다니는 건 귀찮아서 싫어하고요. 그런데 인도의 몬순은 정말 뭐랄까 몇 달을 어항 속에 들어가 사는 기분이랄까요...? 잠깐 몇 분 해가 나면 해 쫓아다니면서 빨래를 말려요. 문 열면 안개가 방에 들어차는게 눈으로 보이고요. 자칫하면 곰팡이 습격 당하고요. 아부다비에도 습도가 높은 시즌이 있군요! 떠올리면 타는 태양, 사막 이런 것만 생각나는데... 써니님 만나러 아부다비에 갈 때는 좋은 계절에 가고 싶어요. :-)

Posted using Moitto

좋은 계절이라... 11월이요! 12월~1월은 안개 낄 때가 종종 있긴 해요. ㅋㅋㅋ 12~3월에 오시면 1년에 10번 이내로 오는 비를 보실 수 있을 수도.

라라님 어디쯤 가고 계시나요???

호돌박니임! 지금 오사카에 있어요. 다음주엔 (아마도) 교토에 있겠네요. :-)

Posted using Moitto

언제 또 일본에서 인도로 넘어가셨나 했습니다 : 0
어릴 적 교과서에서만 보던 몬순을 이렇게 접하니 생생하네요.

놀랐습니다. 글이 넘 좋아서 놀랐고 일본에 계시다가 인도로 순간이동 하신 줄 알고 놀랐습니다.

와아, 안개가 방에 차는 게 눈에 보일 정도라니 정말 신기해요...! 안개와 시간, 이 두 물질은 무언가 같은 속성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아요. 돌연 차오르고, 때가 되면 보이지 않고.

오사카 날씨는 어떤가요 동글님! 산뜻한 가을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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