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에 대하여] 국토대장정의 기억

in #busy6 years ago (edited)

제게 한여름의 낭만이라고 하면 락페도 락페지만 20대 때 국토대장정을 했던 기억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20대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기획하고 스폰서를 구해서, 200X년 7월5일부터 7월31일까지 거의 한 달 동안 해남 땅끝마을에서 38선이 근접해 있는 강원도 을지전망대까지 종단했습니다.

저는 결혼한 지금도 내향성이 강한데다 수줍음이 많은 편입니다(그래도 어떻게 상담도 하고 심리평가도 하면서 먹고는 삽니다). 기질이란 게 잘 안 바뀌죠. 20대 초반에는 특히 수줍음이 심했기에 이런 성격을 좀 변화시켜 보고자 지원했던 것이 국토지기였습니다. 대학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온 참가자 모집 공고를 봤죠.

보통 국토대장정 하면 박O스에서 주관하는 행사를 많이들 떠올리게 마련인데, 당시 홈페이지에 올라왔던 국토대장정은 5년째 이어지고 있는 자발적인 모임으로 참가비는 거의 없지만 구성원 한 명 한 명이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해야 하는 그런 팀 어프로치에 가까웠습니다. 자율성을 강조했다는 것이죠.

'자기 역할이 있다는 거네? 그럼 뭐.. 꿔다 놓은 보릿자루 될 일은 없겠다.' 이런 단순한 생각이 동기부여가 돼 참가서를 내고 대전에서 4월인지 5월쯤에 열렸던 첫 오프모임에 참여를 했습니다. 오프모임 장소가 어떤 민박집 비스무리한 곳이었는데 도착해 보니 이미 여러 사람이 어우러져 술판이 벌어져 있었죠.

무리에서 나이가 많아 보이는 어떤 형이 와서 앉으라고 해서 정말 뭐에 홀린 듯 그냥 가서 따라주는 막걸리를 받아 마셨던 기억이 납니다. 낯선이들이 우르르 모이는 그런 모임을 극도로 싫어하는 저였지만, 뻘쭘하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는 거죠. 저는 또 원체 술이 약해서 금방 알싸하게 취했고 쉽게 무리에 섞여 들 수 있었습니다.

넓은 방에서 다 같이 하룻밤 자고 나니 '우리는 모두 친구~'가 돼 있었죠. 서울에서 혼자 내려갔지만 올라올 때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동갑내기 친구도 둘이나 생기고, 강원대 다니는 어떤 누나와도 친구가 됐죠.

출발 전날인 7월 5일에 서울/경기 지역 참가 인원들이 모두 서울역에서 모여서 렌트한 버스를 타고 땅끝마을까지 내려갔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감상에 젖어들 틈이 없이 10인용 텐트 치는 것을 도와야 했습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먼저 집결한 다른 지역 사람들이 너무 분주하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어서 도저히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죠. 10인용 텐트라는 것을 처음 치는 상황이었지만, 왠지 단체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 거란 예감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텐트에서 하룻밤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7월 6일에 일어나보니 빗발이 거세져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판쵸우의를 입은 채 땅끝탑에서 고사를 지냈습니다. 저는 시설팀에 배정이 돼 1톤 포터 트럭 두 대(제 기억이 맞다면..)에 100명의 식량과 텐트와 기타 잡다한 물품들을 싣고 내리는 일을 하게 됐죠. 시설팀에는 형들이 세 명 있었고(고작 24~25살인 형들이었는데 그 때는 왜 그리도 어른스럽게 보이던지요 ㅎ) 첫 오프모임에서 친해진 동갑내기 친구가 한 명, HS라는 동생이 한 명 있었습니다.

딱 지금 이맘 때 열심히 한국의 국도길을 두발로 누볐던 것인데요. 비가 올 때가 많았고, 무거운 짐을 옮기다가 넘어져서 무릎이 정말 심하게 까지기도 했습니다. 국토대장정 초반에 다친 무릎 상처가 잘 아물지 않아서 중간에 읍내 병원 같은 곳에 갔던 기억도 있네요. 그리고 지금도 저를 늘 잔잔하게 괴롭히는 허리 통증이 이미 이 당시부터 가뜩이나 힘든 국토대장정 길을 고되게 만들었습니다.

육체적으로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임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충실히 해내야 된다는 압박이 있어서 별로 내색은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더욱이 잘 씻지도 못 하고 하루에 25~40km를 뙤약볕이나 폭우 속에서 걷다 보면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그냥 앞사람 뒷꿈치만 보고 걸을 때도 많았습니다. 나름 자아성찰의 계기로 삼고자 간 것도 있었는데, 오랜 트래킹이나 여행을 해보신 분은 알겠지만, 성찰은 개뿔 당장 하루하루 먹고 자고 싸는 생존미션을 달성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다 보니 전두엽이 정지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시 썼던 일기의 일부를 발췌해 옵니다.

첫행진 이래 최대의 폭우다. 젖은 옷이 너무 추워서 윗도리를 벗고 일했는데 비가 워낙 거세게 몰아쳐서 추운 건 매한가지였다. 아침 뒷정리를 마치고 예정된 중식지로 이동하였는데 중식지를 거치지 않고 바로 숙영지로 간다는 얘기에 행진 대열에 합류하기로 맘을 먹고 도보로 그들을 뒤쫓았다. 피로가 누적됐던 탓인지 무서운 기세로 휘몰아치는 계곡의 우레와 같은 물살 소리가 오히려 자장가로 들리더라, 졸음행군이라니.

땅끝에서 출발한 지 채 일주일도 안 돼 사람들 사이에서 크고 작은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고, 저도 예민해졌는지 상대방의 별것 아닌말에 혼자 열받아서 속으로 삭히기도 했습니다. 정말 불과 일주일만에 단체생활이 버겁다고 느꼈죠.

하지만 시설팀에 속했던 어떤 형과 함께 걸으며 책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공유된 관심사로 이야기할 수 있는 벗이 있고, 눈 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국토에 새삼 감탄하기도 하고,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 여러번 찾아오는 변덕스러운 날씨에도 사람들과 깔깔거리며 42.8km를 완주한 날도 있었죠.

걷고 걸어 지리산 벽소령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고 힘들게 오른 만큼 감동도 컸죠. 그 날 산안개에 휩싸였 있던 지리산 능선의 장엄함을 사진에 담지 못 한 것이 아쉽네요. 벽소령을 내려와 숙영지에서 같은 조 JH라는 친구와 밤늦게까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습니다. 함께 여정에 관한 소회를 나누며 단체생활에 대해 가졌던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것들이 비단 내게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됐죠. 8명 정도가 한 조로 편성이 돼 한 텐트에서 다 같이 잤습니다. 곁에서 자고 있는 조원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가족이나 다를 바 없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예정된 27일의 행진 중 절반 정도가 지났을 때 전북과 충남의 경계를 넘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그 경계를 넘을 때의 이미지가 머리에서 생생하게 재생되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합니다. 기억이란 참 오묘하죠. 그 때 저는 이 대장정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 대해 약간의 슬픔을 느꼈던 것도 같습니다. 조원들과는 매우 친한 상태였지만 다른 조 사람들과는 친해지기가 어려웠고, 아직도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하루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아서 슬펐던 것 같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지 못 하는 자신의 모습에 다소 실망감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이런저런 감정을 느끼며 속리산 문장대를 올랐고, "구비구비 펼쳐진 능선이 구름에 휩싸여 있다가 간간이 그 자태를 드러내는 광경은 경이로움에 가까웠다"고 당시 일기에 적혀 있네요. 한국은 산세가 정말 아름다운 나라인데요. 아마도 이 때 처음 그걸 느꼈던 것 같아요. 이후 제가 등산을 열심히 다니게 되는 많은 이유 중 하나가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국토대장정 중후반부부터는 짝사랑의 열병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남자반 여자반 있는 그런 곳이고 한 달여를 같이 생활하다 보면 커플이 생기게 마련이죠. 당시 세 커플 정도 생겼고, 그런 사랑의 분위기가 제게도 전염이 되었을 수 있겠습니다(쿨럭). 하지만 전 그 때까지만 해도 모쏠이었고 여자에게 어떻게 호감을 표현하는지 몰랐죠. 그 친구가 걷는 것을 힘들어 할 때 손수건으로 제 손목과 그 친구 손목을 묶어서 이끌어주기도 했는데, 싫어하는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제게 호감이 있다고 볼 정도는 아니었을 수 있겠고요(너무 싫었을 수도. ㅋ). 그 친구 마음을 몰라 참 애가 탔던 것 같아요.(뒷 이야기는 여러분도 충분히 짐작하실 수 있는 중2병 sad story라 생략하겠습니다.)

춘천에 당도했을 때부터는 sad story의 여파로 인해 정신적으로도 급격한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행진이 무척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빨리 이 여정이 끝나기만을 바랐던 것 같아요.

다 떨어지기 일보직전의 샌들이 버텨주길 기도하며 배후령을 올랐다. 굽이굽이 꺾이는 도로의 경사는 십도밖에 안 됐지만 오십도는 되는 듯한 체감 경사에 많은 지기들이 힘들어 하는 듯했다. 평소엔 조이름처럼 팔팔하던 우리조원들도 다른 날에 비해 유난히 힘들어 보였다. 대열에서 자꾸 쳐지는 EY 누나와 JH를 뒤에서 밀어주며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강원도 진입하니 왠 꼬불꼬불 언덕길이 그리도 많던지요. 행진 마지막 날인 7월31일에 을지전망대로 향하던 가파른 언덕길은 정말 눈물나게 힘들었습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데, 이를 악물고 있는 힘 없는 힘 다 짜내 다른 조원들의 등을 밀어줬습니다.

저는 종점에 도달하면 안 울 줄 알았습니다. 퍽이나.. 처음 오프모임을 가졌던 날부터 대장정의 하루하루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저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네요. 울지 않으려고 했지만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눈에 띄는 모든 사람의 손을 잡으며 수고했다는 말을 전하고 포옹했습니다.

대성리에서 뒤풀이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와서 거울을 보니 옷으로 가려진 이외의 부위는 새까맣게 타서 거의 흑인이 돼 있었죠. 거울 앞에 있는 건 난데, 거울 속의 나는 내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국토대장정 이후에도 여전히 super shy한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대 때 가장 잘한 일 중 하나가 국토대장정을 했던 것일 만큼 대장정의 하루하루는 여러모로 제게 많은 추억거리를 남겼습니다.

지금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요즘 같은 날에는 판쵸우의 입고 일렬로 무리지어 국도길을 행진하던 기억이 떠올라요. 아이가 어느 정도 크고 기회가 된다면 Wild의 주인공처럼 미대륙을 종단하는 트레일을 와이프와 걷고 싶어집니다. 이것도 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예요. 언젠가는 할 것 같습니다. 사진이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 당시에는 폰카가 일반화되기 전이라 사진이 별로 없네요. 그 때 같이 걸었던 누군가의 싸이월드에서 퍼 온 한 장의 사진을 남겨요. 저 긴 대열 어딘가에 제가 있습니다. 전 보이는데 여러분은 안 보일 테죠.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thumb.jpg


@garden.park 님께서 주최하신 한여름 밤의 도라지 위스키, 글쓰기 공모전 출품 포스팅입니다.

Sort:  

아주 소중한 경험과 추억이십니다.
언제 저런 경험을 해보겠어요, 젊으니까 가능했죠.
의미깊게 읽었습니다.

네 이십대 젊은 혈기로 완주했던 것 같아요. 의미깊게 읽어주셨다니 영광입니다.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그 사람들이 또렷이 기억나겠네요.

네 그 때 얼굴 그대로 기억이 나죠. 한 달을 같이 지냈으니 지금도 얼굴과 목소리가 그대로 기억이 납니다. 다들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테죠~

지금도 멋진 청춘이십니다.

맞습니다. 경력 사다리 끝에서 아둥바둥 올라가려고 애쓰고 있지만 지금 청춘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릴때 왜 저런곳에 안가봤을까 하는 마음이 생기네요.
새드 스토리도 듣고 싶습니다 ㅎㅎ

제가 teaxen님 오도바이 여행기를 잼있게 읽는 건 이렇게 걸었던 기억들이 있기 때문일 거에요. 자전거로 남한 땅 여기저기 누비고 다녔던 기억도 있고.. 새드 스토리는.. 하하.. 저는 HS(글 어딘가에 나옵니다)가 조용히 작업하고 있는 줄도 모른 채..(중략) 새됐죠 머. ㅋ

네이버 블로그도 있으셨군요. 정주행 들어갑니다. 만화 잘 모르는데, 매력적이에요 그림체가.

언젠가 꼭 해보고 싶습니다 국토 대장정... 어린 시절의 소중한 기억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에구 답이 늦었습니다. 팔로하고 종종 찾아 뵙겠습니다.

Coin Marketplace

STEEM 0.30
TRX 0.12
JST 0.034
BTC 63475.77
ETH 3117.23
USDT 1.00
SBD 3.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