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단편 - 유령의 이름은 인도네시아 발리 블루문

in #kr-pen6 years ago (edited)

IMG_8814.JPG




유령의 이름은 인도네시아 발리 블루문





2009년 7월 2일에 마신 인도네시아 발리블루문을 소환할 수 없다. 난 이미 미래에 있기 때문이다. 그 커피는 붉은 꽃, 익어 터지는 과일, 빗방울에 젖는 흙냄새를 풍겼다.




IMG_8888.JPG갑자기 혀 끝에 닿는 몽글몽글한 커피 한모금.



사라 본의 노래가 흐른다. 나는 인디고의 바 의자에 앉아 선생님이 넬드립을 하는것-선생님은 오른팔 관절이 안좋아져서 이제 왼손으로 핸드드립을 한다-을 지켜보고 있다.

동주전자에서 90도 각도로 떨어지는 뜨거운 물에 커피가루가 닿자 커피가루는 머핀처럼 부풀어 오르고 잠시동안 뜸이 들기를 기다린 선생님은 드립을 시작한다. 한 줌의 커피가 뜨거운 물을 만나는 시간. 넬드립은 종이필터가 아닌 천필터로 커피를 추출한다. 한방울씩 정성들여서 내리다보니 시간이 약간 걸리지만 그 기다림을 보상하고도 남을 맛과 여운을 준다.




“자, 보얀씨 차례.”




인디고 선생님 말에 깜짝 놀란다. '아, 난 핸드드립을 배우기 위해서 주말마다 인디고에 왔었지.' 라고 미래의 나는 기억한다. 다부진 체격과 대조적으로 해맑은 선생님의 눈빛은 애써 장난기를 감추고 엄한 표정을 지으려고 한다. 나는 커피콩을 그라인더에 간 후 넬 드리퍼에 넣고 표면을 평평하게 만든다. 동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붓고 온도계의 숫자를 확인한다. 자, 모든 커피에 모든 물.



글렌 굴드 피아노 치듯 드립하게 하소서.



2009년 여름 내가 항상 입에 달던 주문이었다. 나는 매주 토요일 밤에 선생님이 드립하신 커피의 맛과 이어서 내가 드립한 커피의 맛을 비교했다. 그러나 2018년 여름에는 그 주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커피를 배우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도 떠나갔다. 주문이 없어진지도 모르고 신나게 살았다. 그 사이에 유령이 된 인도네시아 발리블루문은 여름을 찾고 여름은 매년 내 기억을 방문한다.




생각의 단편들


비, 데미안, K
어떤 혹등고래 위에서
누군가의 기억 속에 저장되는 것
꽃이 기다린다
파란 우연
산책자
어젯밤 꿈이 나에게 말해준 것
도착을 더듬으며
춤추는 생각들
종이 눈꽃을 노리는 시간
출발하기 위해 도착한다
비 맞는 시간

Sort:  

사라본 한번 들어봐야겠네요

Very good posts, hopefully a successful brother is always in the esteem business

커피는 커피 믹스만 아는 커피 무식자로, 발리블루문 이름이 아름답다는 느낌만 받네요.ㅎ 발리 해변에 앉아 있음 블루문을 볼 수 있을 거 같은.

드립은 개그 드립밖에 모르는 무식자 다녀갑니다.ㅠㅠ

이것저것 다 떠나서
발리의 여행 추억이 떠올라요
1년쯤 살다 보고 싶었지요

가을냄새 어떠셔요?

(╹◡╹)저도 한때는 나쁜 커피빈을 한알한알 골라낸후 볶아서 넬드립도 했었는데 지금은 모든게 귀찮아져버렸습니다. 보얀님 글을 보니 넬드립 커피가 마시고싶네요. 주말에 한번 시도해봐야겠어요.

모든 것이 계량화되고 정형화되는 세상이라지만, 감과 손맛의 느낌을 대체할 수 있는 건 아직까지 없는 것 같습니다. 계측되는 것 너머의 여백 - 각자 채워야할 여백 같은 것 말이에요.

이런 발리도 느껴봤어야 했는데 아쉽네요 ㅎㅎ

갑자기 굴드 커피란 카페가 떠오르네요!

글렌굴드처럼 드립한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으면서도 뭔지 딱 알 것 같아요.
음 하나하나가 오롯이 느껴지듯, 그렇게 -

Coin Marketplace

STEEM 0.26
TRX 0.11
JST 0.033
BTC 63868.85
ETH 3063.91
USDT 1.00
SBD 4.10